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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15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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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2021년 10월 15일 (금)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아빌라의 데레사'로 널리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르멜 수도회에 들어간 그는 평생을 완덕의 길에 정진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수도회의 발전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많은 어려움에 맞닥뜨렸으나 주님께 매달리며 곤경을 이겨 나갔습니다. 

수도 생활과 영성 생활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긴 성녀는 158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이 데레사 수녀를 시성하였고, 1970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교회 학자로 선포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는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니,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1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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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4장 1-8절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형제 여러분, 


혈육으로 우리 선조인 아브라함이 찾아 얻은 것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8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당신은 저의 피신처.
구원의 환호로 저를 감싸시나이다.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 당신은 저의 피신처. 구원의 환호로 저를 감싸시나이다.

제 잘못을 당신께 아뢰며, 제 허물을 감추지 않았나이다. “주님께 저의 죄를 고백하나이다.” 당신은 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셨나이다. 당신은 저의 피신처. 구원의 환호로 저를 감싸시나이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음 바른 이들아, 모두 환호하여라. 당신은 저의 피신처. 구원의 환호로 저를 감싸시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2장 1-7절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때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 하느님, 주님의 가족에게 천상 양식을 베풀어 주셨으니 저희도 복된 데레사를 본받아 영원토록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즐거이 노래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15일 (금)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15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나는 지금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하느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나요?

 

오늘 복음은 몇 가지 단편의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두려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이 부분의 본문에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옵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하나의 테두리를 형성하고, 그 사이에 ‘두려워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처음 언급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육신은 죽일 수 있으나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마지막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러한 존재에 대하여 가지는 감정은 대개 공포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신 하느님을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소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우리를 극진하게 아끼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며 보살피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공포가 아닌 경외심으로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나는 지금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하느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나요? 우리가 공포에만 머문다면,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하느님마저도 공포의 대상으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짓누르고 괴롭히는 공포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깨달음이 오늘 은총 안에서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의 벗인 우리

 

어제까지 바리사이와 율범 학자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놀랍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제자들을 당신의 벗이라고 부르시는 스승이시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당시 제자들에게만 당신의 벗이라고 부르시겠습니까? 지금의 우리도 주님의 제자도를 실천하기만 하면 벗이라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긴 한데 제자도란 무엇이고, 주님의 제자도를 따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바리사이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잘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위선자인 바리사이를 조심하거나 상종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는 말씀이지요. 

주님의 벗이라면 주님처럼 진리와 진실과 벗하는 사람이어야지 위선에 물드는 그런 허약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당당하게 들추어낼 것은 들추어내고, 선포할 것은 밝은 데에서 그리고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고 두려움이 없어야지요. 그래서 주님의 벗들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런 다음 이제는 정말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숙하고 올바른 사람이라면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자기 방을 나오지 못하는 은둔형 외톨이들이 많습니다. 자기 아닌 남을 두려운 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들과 어머니까지 두려워 피하는데 잘되라고 자기를 나무라는 말이 상처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할수록 아기가 주삿바늘을 두려워하듯 조그만 상처도 두려워하는 그런 미성숙한 두려움에 머물지 않고 사실 아무것도 아닌 위험과 위협에 두려워 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숙한 사람도 이러하지만 주님의 벗이라면 이런 미성숙한 두려움에 빠지지 않음은 물론 진정한 두려움 곧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하느님을 공포의 하느님이라고 믿는 두려움과는 다름을 웬만한 신앙인이라면 우리 모두 잘 압니다.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두려움과 경외심은 인간 앞에 있지 않고 이사야 예언자처럼 거룩한 하느님 앞에 있는 자의 그 두려움이며, 그래서 우리가 진정 주님의 벗이라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곧 좋으시고 인자하신 하느님으로 체험하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는 주님 말씀을 주님의 벗이라면 철석같이 믿고 마음 따스해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눈치 보지 않으면 외톨이가 되고, 눈치 보면 위선자가 된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위선이란 본래는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에게 그런 것처럼 보이려는 행동을 말합니다.

위선은 사람을 두려워함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의식하고 살면 위선자가 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변형시키고,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는 ‘휴식’이 되기에 다른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주체가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좋을까요? 그 사람은 ‘외톨이’가 됩니다. 그 지독한 외로움을 이겨낼 자신이 있다면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어차피 한 번 보고 안 볼 사람이라고 여기고 마음대로 사람을 대해보십시오. 일주일도 안 돼서 혼자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저도 강론하다가 신자들에게 거슬리는 말 한 번 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대부분의 우정은 그 한순간에 끝난 것을 압니다. 

미국 드라마 ‘더 라스트 맨 온 어스’(2015)는 바이러스로 인류가 멸망한 후 남겨진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2년 동안 홀로 버텼으나 외로움에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러다 한 여자를 만납니다. 문제는 자신이 생각하던 예쁜 여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둘은 결혼합니다. 그 며칠 후 이상형의 여자를 만납니다. 주인공은 결혼했으면서도 위선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좋아할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자 주인공은 실망합니다. 그런데 또 예쁜 여자 둘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멋진 남성도 나타납니다. 남자는 위선을 떨지 않기 위해 이혼을 신청하고 여자들에게 수작을 부립니다. 여자들은 이 남자가 유일한 생존자라 믿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있고 결혼까지 했음을 알고는 주인공을 밀쳐냅니다. 그러다 결국, 마을에서 쫓겨납니다. 

이 드라마는 그냥 외로움과 위선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관계의 굴레를 묘사한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눈치 보지 않으면 혼자가 되고 의식하면 위선자가 되니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요? 사람을 의식하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 됩니다. 이것이 양심이든 주님의 존재이든 사람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에 대한 눈치 때문에 사랑할 때 그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천국의 공동체를 닮아갑니다. 

영화 ‘싱크홀’(2021)은 동원이 10년 넘게 걸려 마련한 자기 집이 500m가 넘는 싱크홀로 인해 내려앉으며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동원이 이사 올 때부터 항상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만수입니다. 만수는 아들 하나 잘 키우기 위해 조금은 이기적인 삶을 살아서 외톨이 아빠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삿짐 차가 와도 차도 안 빼주고 되려 늦게 나와서는 주말에 왜 이사를 하느냐며 짜증을 냅니다. 주위 시선을 하나도 의식하지 않는 외톨이형 인간입니다. 

동원은 사람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회사 동료들에게 성공한 직장인처럼 보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집들이를 할 때 돈 8만 원이 아까워서 만수가 제안하는 대리운전을 거부하고 직원 김대리와 은주를 자신의 집에서 재웁니다.

은주는 신입 인턴사원으로 시키면 뭐든지 하는 김대리를 짝사랑하는 인물입니다. 김대리가 다른 사원을 좋아하는 것을 알지만 사람 눈치보지 않고 필요할 때는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도와줍니다. 도와주어야 할 이유가 없지만 도와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자기 마음이 아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은주의 조건 없는 희생 때문인지 만수도 조금씩 이웃을 위해 희생하게 되고 동원도 남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기 집 안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가차 없이 집어던집니다. 김대리도 은주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서로의 희생으로 결국엔 탈출하게 되고 전에 없이 끈끈한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누구에겐가 ‘속하기를 원하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속하기를 원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속하기를 원합니다. 자녀는 또한 부모에게 속하기를 원하고 우리는 어떤 친구집단이나 공동체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공동체성’이라 합니다. 

다만 관계를 맺을 때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위해 사랑하면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사랑하면 이기적인 나뿐인 놈이 되고 타인을 위해 사랑하면 위선자가 됩니다. 혼자 있을 때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눈치 좀 그만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분 때문에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항상 내 위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외로움과 위선의 관계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 보이지 않는 존재의 눈치를 보며 살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어떤 승려가 수양을 위해 산속 토굴에 들어갔습니다. 깊은 산속이라 사람도 없고 어떤 시끄러움도 없는 고요함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산나물 캐는 아주머니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이렇게 묻습니다. 
 
“조용히 공부하러 왔나 보네요. 그런데 물소리, 새소리는 안 시끄러운가요?” 
 
이 말을 듣는 순간에 그 전에 전혀 느끼지 못했던 물소리와 새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승려는 이 순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시끄럽고 조용한 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 역시 비슷한 체험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개인 피정을 위해 어느 피정의 집에 들어갔는데, 피정의 집 앞으로 차 지나가는 소리가 너무 큰 것입니다. ‘잘못 왔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피정에 집중하면서, 차 지나가는 소리가 어느 순간 들리지 않았습니다. 고속도로 앞이라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그렇게 많았는데도 말이지요. 
 
자기 마음이 이렇게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하느님입니까? 세상입니까? 하느님께 있다면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라면, 하느님께 불평불만 하는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바로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킨 이유가 무엇이었겠어요? 바로 하느님을 두려워했기에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치 새로운 말씀을 하시듯이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데에 더 큰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만 율법의 준수를 강요하면서 정작 본인은 보여주는 식의 모습만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을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마음이 향하는 우리가 될 때, 세상의 어떤 유혹도 우리를 침범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다른 누군가가 할 수 있거나 인생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이라면, 나 역시 그럴 수 있다.

- 토머스 J.빌로드

 

 

잘 할 수 있는 이유를 찾으세요

 

학창 시절 제일 자신 없는 과목 하나를 고르라면 조금의 망설임 없이 ‘미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는 것, 만드는 것 모두 소질이 없어서 미술 자체가 싫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술 전시회에 가는 것도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싫어했던 미술인데, 성지순례 가서 성화를 보며 새로운 세계에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화가가 표현하려고 했던 내용을 설명 들으면서 그 안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미술 관련 책도 많이 읽게 됩니다. 미술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긴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고 노래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없으니까요. 
 
어떤 방식으로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하지 못한다고 아예 관심을 끊어버리는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을 잘할 수 없다는 사람들은 꼭 이유가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 생겨서, 신앙인으로부터 받은 상처…. 등등의 이유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좋아할 수 있는 이유는 만들 수 없을까요? 예수님만으로도 충분히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데, 부정적인 몇 가지만으로 좋아할 수 있는 이유를 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루카 12,7)

 

깨어있는 삶이 깨어있는 일상의 열매를 맺는다. 십자가의 노고와 인내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개혁은 또 다른 개혁을 낳는다. 십자가의 체험은 오염된 세속의 삶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더 나은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몸소 되었다. 예수님의 삶을 철저하게 따르는 삶이었다. 성장과 변화는 고통을 동반한다. 스스로 쇄신과 개혁의 밀알이 되어야 개혁은 이루어진다. 

새 포도주를 담듯 낡은 의식을 우리가 버리는 것이다. 수도생활의 생명력은 스스로의 참된 쇄신이다. 악습을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워 질 수 없다. 부족한 부분을 하느님께 열어 보이는 것이 또한 새로움의 시작이다. 

적나라한 삶이 적나라한 우리의 봉헌이다. 문제의 근원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다. 막막함 속에서 길을 찾게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새로움과 힘찬 변화는 언제나 하느님에게서 온다. 외적인 모습이 이닌 내적인 모습을 찾을 때이다. 

가장 확실한 길은 하느님께 있다. 한계와 오류까지 성장의 밑거름이 되게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하느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일상생활의 쇄신이 참된 수도생활의 쇄신임을 믿는다. 정직한 농부의 발걸음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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