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12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12.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0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

 

 

2021년 10월 12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거나 감사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12일 (화)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1장 16-25절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형제 여러분,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17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9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21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23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25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1장 37-41절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12일 (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12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행동이 율법과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어야 하는 율법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바리사이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렵고 복잡한 계명이 아닌, 일상의 계명을 왜 지키지 않으셨을까요? 그 답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태 5,17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대조되는 이미지들을 보여 줍니다. ‘깨끗함과 더러움’, ‘겉과 속’, ‘탐욕과 자선’이 그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적용하는 율법은 외적인 모습에만 적용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함(바름)과 부정함은 손을 씻었는지, 잔과 접시는 깨끗한지, 먹으려고 하는 음식이 정한지 부정한지가 중요하였습니다. 자연스레 율법은 하나의 기준만을 제시하였습니다. ‘맞고 틀림’, ‘합당과 부당’, ‘정함과 부정함’을 나누기만 하였을 뿐입니다. 

이에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에 매일 것이 아니라, 본질을 기억하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율법이 내면을 향하고 마음을 움직여 내 것만을 추구하는 탐욕과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율법은 절대로 축복과 구원을 자동으로 가져다주는 장치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인의 의무, 곧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요. 외면이 아닌 내면을 향하는 주님의 법이 지닌 본질을 잊는다면, 우리의 모습도 바리사이들과 같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 속에 담긴 것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바리사이가 손 닦는 것을 얘기하니 주님은 속 얘기를 하십니다. 겉을 얘기하니 속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속 얘기로 겉 얘기를 한판 되치기 하시는 것입니다. 

씨름에 되치기 기술이 있는데 공격을 되쳐서 한판승하는 것입니다. 이 <한판 되치기> 예가 주님께는 참으로 많습니다. 어쩌면 복음의 거의 모든 것이 이런 되치기 얘기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을 바리사이들이 시비하니까 안식일에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옳냐고 되치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주님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하자 의사가 병자와 건강한 사람 누구에게 필요하냐는 말로 되치십니다. 

사실 겉 얘기를 하는데 속 얘기를 하면 겉 얘기를 하던 사람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겉의 정결과 속의 정결을 얘기할 때는 더더욱 그렇지요. 

내면을 살피고 가꾸고 꾸미는 사람은 외면은 상대적으로 덜 가꾸고 더 나아가 자신의 위선을 부끄러워하고 아파하고 고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남 얘기가 아니고 제 얘기입니다. 지지난주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옛날 저는 일기를 매일 썼는데 대부분 저의 내면을 성찰하는 내용이었지요. 그러던 제가 나이를 더 먹고 일기까지 쓰지 않자 내면 성찰이 그만큼 줄어들었고 당연히 위선덩어리가 되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위선을 부끄러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천연덕스러운 점입니다. 

그렇지만 나이 더 먹은 지금이 전보다 나은 점도 있습니다. 전처럼 저를 비하하거나 학대하지 않고 긍정하는 점이나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더라도 그 관점이 조금 달라진 점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 내면이 욕망으로 가득한 것보다 사랑이 충만하지 않음을 더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이고, 사랑에 욕망이 얼마만큼 불순물로 있느냐 성찰하는 점입니다. 

몸에 안 좋은 것을 가려 먹기보다는 몸에 좋은 것을 먹으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을 다 가려 먹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현재로서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몸에 좋은 것을 챙기는 수준이라는 거지요. 

아무튼 오늘 주님은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행하라고,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하시는데 내 속에 담긴 것은 무엇일까, 사랑과 욕망 중에서 내 속엔 무엇이 담겨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지나친 의전이나 형식주의는 내적 탐욕과 사악의 열매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형식주의’를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바리사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사람이 형식주의자가 되는 이유는 속이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숨기기 위해 그 반작용으로 겉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겉을 지나치게 깨끗하게 하고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 안에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형식에 신경 쓸 에너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저의 동기 신부 하나가 보좌 신부 때 랍스터를 처음으로 단 한 번 먹어보고는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동기 신부가 부자 동네 본당에서 제2 보좌를 할 때였습니다. 그 신부의 영명축일을 맞이해서 본당 청년들이 신부님께 음식 대접을 해 드리겠다고 청했습니다. 그 신부는 학생들이 돈이 어디 있느냐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선배 신부인 제1 보좌 신부님을 통해 청년들에게 잘 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제1 보좌 신부님은 신부님이 청년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니 이해하라고 청년들을 설득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은 워낙 고급스러워서 너희들 돈 많이 들걸? 그 신부님은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아니면 안 가.”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청년들은 돈을 모아 호텔 레스토랑에 랍스터를 예약해 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축일 날 그 신부님은 청년들을 따라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주눅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개씩 놓여있는 스푼과 나이프, 포크 등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고, 또 랍스터가 나왔는데 함께 나오는 서로 길이가 다른 가위와 뱀 혀처럼 생긴 꼬챙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청년들을 보며 따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또 신부님이 먼저 드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청년들이 포도주를 시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어떤 포도주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촌스러웠던 그 신부님은 “어? 그냥 다 좋아!”라고 말을 흘렸고 청년들은 자신들이 고른 포도주를 시켰습니다. 웨이터는 포도주를 따고 신부님에게 “테이스팅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어…. 그냥 주세요. 좋은 포도주 같은데….”라고 하였고 청년들은 급기야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긴장 속에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라면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아닌데 그런 척하려니까 정말 힘들더라. 그냥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맞습니다. 본질보다는 형식에 주위를 더 기울이며 살면 인생을 즐기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포도주 전문가가 말했습니다.

“포도주는 마시고 취하면 그만입니다.”

아마 음식 전문가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먹어서 맛있으면 좋은 음식입니다.”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은 것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면 잘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이 가미되면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청년들이 고급 레스토랑에 가기를 싫어하는 사제를 억지로라도 그런 곳으로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만약 사랑했다면 형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형식을 차리며 먹는 랍스터보다 집에서 혼자 끓여 먹는 라면이 더 맛있습니다. 형식에 얽매이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자유롭게 해 주는 게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먼저 그런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 줍니다. 

저도 유학을 10년 가까이 다녀왔기 때문에 물론 어느 정도는 레스토랑 식사법에 대해 압니다. 그러나 약간 어려워하는 신자들과 그런 곳에 가면 스테이크를 자르지도 않고 그냥 포크로 찍어서 한 입 베어 뭅니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형식을 중요시 하는 곳에 가면 숨이 막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교회 내에도 이런 형식주의가 얼마나 만연한지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신부님, 주교님, 추기경님, 교황님이라 부르기보다는 Reverendo(존경할만한 분: 사제), Eccellenza(탁월하신 분: 주교), Eminenza(위대하신 분: 추기경), Santita(거룩하신 분: 교황)등의 칭호를 붙입니다. 예수님이 들으시면 웃으실 것입니다. 이런 용어들은 하느님도 어쩌면 부담스러워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들이 이런 용어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과 형식은 어떻게 균형을 맞추어야 할까요? 그냥 본질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본질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형식만 하면 됩니다. 이는 마치 나뭇잎과 열매의 관계와 같습니다. 나무는 분명 잎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언제나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가 가져가야 할 에너지까지 잎을 키우는 데 쓰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게 됩니다. 그러면 못 쓰는 나무가 됩니다. 에너지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열매를 최대한 많이 맺게 하려면 잎은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게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 오셨을 때 의전 차량을 가장 작은 것으로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고심 끝에 소울로 의전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교황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기분 나쁠 수도 있습니다. 돈 자랑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커지기 위해 형식은 작아져야 함을 압니다. 형식이 지나치면 모두가 사랑의 에너지를 빼앗는 것입니다. 

나무는 열매와 잎의 균형을 맞출 줄 압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균형을 맞추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탐욕과 사악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무 형식에 치우치고 있다면 그만큼 사랑에 쏟을 에너지가 줄어들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선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

 

책장을 보다가 옛날 신학생 때 읽었던 책이 보였습니다. 당시에 상당히 어렵게 느꼈던 책으로 친구들과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신부가 되면 이런 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어려운 신학책이 과연 신부가 되어서는 전혀 소용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용이 없을 것 같지만 분명히 소용이 있었습니다. 아니 꼭 필요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나 삶 안에 하나씩 더해지면서 자신의 영성을 성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 공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학교 졸업하면 “공부 끝!!”이 아니라, 더 많은 공부와 깊이 있는 공부를 통해서 자신의 영성을 성장시켜서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더 쉽게 선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말과 행동이 미래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노력과 열정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해야 할 것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 공부하는 것은 당연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그 모든 지식을 다듬으면서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래도 주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이런 꾸짖음이 과연 예의에 맞는 것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겉으로만 그럴싸한 그들의 위선을 그냥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겉만 깨끗한 것이 아니라, 속도 깨끗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자선을 통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자선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의로운 행동이 아닌, 남은 전혀 눈치챌 수 없는 그래서 하느님만이 알아줄 수 있는 자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이유만 계속해서 만들어갑니다. 시간이 없어서, 능력이 되지 않아서, 여유가 되지 않아서, 남들도 하지 않아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계속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것을 가지고도 크게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펼치십니다. 그런데 자신의 작은 사랑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서, 사랑할 수 없는 이유의 목록만을 늘릴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으로 찬양하지도 않고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로마 1,21 참조). 부정적인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사랑을 실천하는 이유를 만들어가서 적극적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리사이와 달리 칭찬받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언제나 복음을 전하라. 필요하면 말을 사용하라.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애시의 실험

 

미국의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Solomon Asch)는 사람이란 기본적으로 부화뇌동하는 존재이며,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려 하는 존재라고 가정했습니다. 그래서 1952년 하나의 실험을 했습니다. 
 
한 장의 카드에는 직선이 하나 그어져 있었고, 또 다른 카드에는 세 개의 직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카드에 그려진 세 개의 직선 중 하나는 먼젓번 카드에 그려진 직선과 길이가 같고, 나머지 두 개는 전혀 다른 길이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애시는 피험자에게 직선이 하나 그려진 카드와 세 개 그려진 카드를 차례로 보여주고, 두 번째 카드에 그려진 세 개의 직선 중에서 첫 번째 카드의 직선과 길이가 같은 선을 골라내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문제는 피험자 안에는 애시의 연구진이 끼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도적으로 정답이 아닌 오답을 큰 소리로 답하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험자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을까요? 
 
피험자의 절반 가까이는 눈에 빤히 보이는 정답 대신 가짜 피험자들이 우기는 직선을 답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생각나는 실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나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기도 합니다. 남에게 영향을 미칠 나의 말과 행동을 더 신경 써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루카 11,41)

 

마음을 살피는 것이 삶을 살피는 깨끗함의 여정이다. 마음이 밝아지면 관계가 밝아진다. 마음을 살피는 것이 곧 믿음이다. 나눌수록 풍요롭고 비울수록 깨끗해지는 마음이다. 버리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이기심과 어리석음을 치유하는 삶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삶이 바로 자선의 삶이다. 지극한 마음과 지극한 자선은 서로를 살리는 복음이다.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우리 모두를 행복한 가족이 되게한다. 

자선으로 드러나는 축복의 빛깔이다. 자선의 나눔이 성장과 성숙의 삶이다. 참된 성숙은 꾸밈이나 감춤이 없다. 자신을 돕는 사람이 이웃을 도울 수 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에서 자선을 배운다. 

사랑은 기적을 만들고 자선은 사랑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한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길은 모든 것이 깨끗해지는 자선의 길이었다. 자선의 길 위에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다. 복음은 자선을 통해 기쁘고 깨끗한 사랑을 다시 알려주신다. 모든 것을 깨끗이 하는 사랑의 힘은 언제나 위대하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