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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10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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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8주일 -

 

 

2021년 10월 10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저자는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진흙처럼 여겨진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10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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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지혜 7장 7-11절

 

나는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0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11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가 기뻐하리이다.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가 기뻐하리이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저희가 비참했던 그 날수만큼, 불행했던 그 햇수만큼 저희를 기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가 기뻐하리이다.

당신 하신 일을 당신 종들에게, 당신 영광을 그 자손들 위에 드러내소서.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가 기뻐하리이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히브 4장 12-13절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10장 17-30절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눈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듣고서도, 자신의 재물을 감추어 두고 나누지 못하며 우울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10일 (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10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신앙인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는 부유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켜 왔으며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의 질문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라는 결의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그는 자신의 약점을 마주하게 되었고 부족함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지닌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까지도 꿰뚫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을 믿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원한 생명일까요? 구원일까요? 물론 우리는 그것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인가요? 

우리의 내면에는 하느님 나라라는 지고한 가치를 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세에서도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원하며,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오직 현세의 안락함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눈은 하느님 나라뿐 아니라 세상의 나라까지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친 모습이 아니라 온전하게 모든 것을 내던지고 당신을 따르는 모습을 원하십니다. 어쩌면 이 말씀을 들은 지금 우리 얼굴이 복음의 부유한 사람처럼 울상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슬픈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버릴 줄 알고 떠날 줄 아는 지혜

 

가장 대표적인 깨달음의 종교가 불교라고 합니다. 왜냐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 또는 붓다가 바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고, 석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깨닫게 되면 부처가 된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란 궁극적으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고, 이 깨달음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거지요. 

그리고 진리란 도리라는 말이 있듯이 행복에의 길입니다. 그러니 지혜란 진리를 통해 행복에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고, 그러니 행복의 길을 모르고 불행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며, 그러니 행복의 길을 모르는 무지가 어리석음이고, 불행의 길을 행복의 길로 잘못 아는 것도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 지혜서 말씀처럼 지혜가 무엇보다 소중함을 또한 알고 있기에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고,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비교할 때 한 줌의 모래처럼 여깁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부자 청년이 아니라 어리석은 청년입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에 지혜의 눈 곧 혜안(慧眼)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은 혜안이 있다고도 하고, 반대로 돈에 눈이 멀고 욕심에 눈이 멀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욕심에 눈이 멀어 돈이 이웃보다 가치있음을 보지 못하고, 돈에 집착하여 사랑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이 세상에 안주하였기 때문입니다. 천상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이 세상 행복에 안주한 그였는데 이 세상에서 행복할 때 그 행복과 그 안정을 깨고 싶지 않고, 또 그 행복과 안정이 영원히 갈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너무 고통스러운 사람이 이 세상 삶을 빨리 끝내고 싶고, 이 세상에서 너무 불행한 사람이 천국 행복을 더 바라지요. 

그러나 이 청년의 어리석음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것이고,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몰랐기에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임을 몰랐고, 그래서 참행복의 길과 영원한 생명의 길이신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오늘 그가 예수님께 온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지요. 복음은 그 첫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열성을 보입니다. 느릿느릿 걸어온 것이 아니라 달려왔고, 길 떠나시는 주님을 붙잡아 세웠으며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열망과 얻고자 하는 열성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참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몰랐던 것이고, 또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았으며 그래서 다 버리고 떠나고 싶지도 주님을 따르고 싶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지혜는 얻기 위해 버릴 줄 아는 것이요. 따라 가기 위해 떠날 줄 아는 것입니다. 

더 풀이하자면 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덜 소중한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며, 주님을 따라 가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날 줄 아는 것임을 깨닫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말씀을 실천할 것인가? 말씀과 동행할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예수님께 찾아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계명은 다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버림과 가난을 전제합니다. 내가 가난해지려 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계명은 이웃사랑을 지향하는데 이웃이 굶고 있는데 본인만 부자로 산다면 그것은 이웃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예수님을 ‘스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스승은 ‘말’로 가르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 스승은 ‘동행’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만약 하와가 하느님과 동행했다면 어땠을까요? 결코, 뱀의 말을 듣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뱀의 ‘설득’에 지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뱀이 함께 눈에 보인다면 하느님 대신 뱀의 말을 듣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듣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입니다. 기도에서는 묵상과 관상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듣는 것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의 음성만 들었다면 물 위를 걸을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동행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영화 ‘나의 산티아고’(2015)는 이런 줄거리가 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 인기 코미디언 하페가 과로로 쓰러집니다. 의사는 최소 3개월을 쉬어야만 한다고 경고합니다. 하페는 잠시 일에서 떠나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기로 합니다. 

하지만 순례길은 만만치 않습니다. 첫날부터 폭우와 허름한 숙소, 불면의 밤까지. 하페는 일단 걷는 것보다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긴 여정을 빨리 끝마치고 싶어 합니다. 잠은 고급 호텔에서 잡니다. 도장만 받는 게 목적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힘이 듭니다. 호텔이 없는 곳에서 벌레에게 물려가며 잠을 한 번 자고는 포기하고 돌아가려 합니다. 

이때 스텔라를 만납니다. 그녀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딸을 잃었습니다. 딸은 암이었고 순례를 하다 죽고 싶다고 해서 엄마와 함께 순례하다 중간에 죽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을 잃은 아픔을 딸과 함께 마지막으로 걸었던 순례길을 되밟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페는 뭔지 모르는 목표의식이 발동합니다. 어머니를 잃고 돈과 성공에만 집중하며 달려왔던 길. 그리고 지금 서 있는 길은 고통과 외로움과 시간을 허비하는 듯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받아들입니다. 그분께서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걸어주셨음을 믿고 정말 오랜만에 그분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가 순례하는 동안 쓴 일기를 살짝 들여다볼까요?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 신앙이 확고한 적이 있었다면 다시 찾고 싶다…. 내 발이 길을 밟는 걸까, 아니면 길이 나의 발을 미는 걸까?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감정 표출도 감동도 없다. 자비로운 상태. 재미없지만 아픔도 없다. 가장 놀라운 건 이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이 길의 힘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대한 존재와 이 세상에 미치는 그의 놀라운 영향력을 철석같이 믿는다. 신을 만나려면 먼저 그를 영접한다고 말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 신을 올 수 없으니까.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누구든 신과 나름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자만이 지속적인 관계가 가능하다. 나와 너……. 나와 당신.”

그는 모든 것 안에서 신을 발견합니다. 눈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비로소 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를 만났다. 나머지는 오직 그와 나의 문제다.”

이제 그는 친구들을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무례한 여자의 손을 잡아주고 딸을 잃은 스텔라의 손을 잡아줍니다. 그리고 산티아고 대성당에 입성하여 향을 받습니다. 
“난 물론 혼자 간다. 이제 알았다. 사실 지금 집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왜 그래야지? 순례의 길을 걸으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는 매일 신을 만났다는 거다.”
할머니는 하페에게 “묻지 말고 신께 의지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페는 신께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신께 의지할 때 외로움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신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어릴 적 신앙에 관한 말씀은 하페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800킬로를 가는 여정 중에 하페는 하느님을 만났고 하느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말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구약으로 충분했습니다. 존재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으니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자 비로소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내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욕심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음은 존재에 대한 믿음만이 변화시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이가 어떻게 줄곧 게임만 할 수 있겠습니까? 존재가 곧 법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가 눈에 보인다면 행동과 생각만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여서 본성까지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그리스도와 동행함을 믿고 그리스도를 보는 듯이 행동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전례’만 하는 것과 ‘성찬의 전례’까지 하는 것이 이 차이입니다. 말씀과 동행하는 것과 그분의 실존과 동행하는 것의 차이인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걷는 것, 이것이 관상입니다. 묵상에 머무는 사람은 배 위에 있는 제자들입니다. 이 세상 삶에서부터 관상이 시작되면 언젠가 그분은 진짜 당신 모습을 보여주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그분처럼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소유나 소득이 내가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게 되면, 또 내가 원하는 지위나 상태에 오르게 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순간의 만족에 불과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90년대 중반,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 컴퓨터의 중요성이 알려지면서 이쪽 분야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어졌습니다. 286, 386, 486, 586 펜티엄으로 이어지는 발전에 저 역시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최고 사양으로 업그레이드를 해도 부팅하는데 2~3초 빨라질 뿐이고, 다른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는데 조금 빨라진다는 것 외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몇 초 때문에 비싼 돈을 들여 업그레이드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업그레이드를 하고 난 뒤의 기쁨은 얼마나 갈까요?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잠시뿐인 기쁨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최선 스마트폰을 사면 그 순간은 너무 기분이 좋지만, 그 기분이 며칠 가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늘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를 외치면서, 자신은 욕심이 없다는 식의 합리화를 시킬 뿐입니다. 
 
물질적 만족은 분명히 외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도 외적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행복은 내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얻겠다는 마음이라면, 내적 만족을 이룰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합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그래도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지켜왔습니다. 이런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를 주님께서는 발견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렇게 주님 말씀은 이 부자 청년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냈습니다(히브 4,12). 그렇다면 부자 청년은 어떻게 했을까요? 주님 말씀을 듣고서 마음의 생각을 바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복음은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말해줍니다. 즉, 그는 외적인 만족을 추구했었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행복은 이런 외적인 만족이 아닌데도, 내적인 만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재물이라는 외적인 만족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만족을 추구하고 있을까요? 입으로는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외적인 만족만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행복은 내적인 만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무언가를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바람도 필요합니다.

 

수십 년 전 과학자들이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 ‘바이오스피어 2’라는 인공생태계를 건설하고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유리와 쇠로 된 거대한 돔 내부에 정화된 공기와 깨끗한 물, 영양가가 풍부한 토양, 다량의 자연 채광을 공급했습니다. 이렇게 내부의 동식물 군에 이상적인 생존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실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이곳의 식물은 최적의 조건에 걸맞게 최고의 가치를 간직하면서 성장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곳의 나무는 일정 높이가 되면 자꾸 쓰러졌습니다.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이 제공되었는데 왜 그럴까 싶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나무가 건강하기 위한 필수 조건 하나가 빠졌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람’이었습니다. 자연환경에서 나무는 바람에 의해 흔들거립니다. 이를 통해 줄기가 더 튼튼해지고 뿌리가 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면 안정적이고 훌륭한 존재로 성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상징하는 ‘바람’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또 육적으로 결코 튼튼해질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마르 10,21)

 

연민과 존중의 마음에서 사람은 사람다워진다. 사람을 귀하게 하며 아름답게 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이다. 사랑은 구체적인 실천이다.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하느님께서 매순간 주시는 행복이다. 

참된 행복은 자유로 우리를 이끈다. 하느님의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가장 자유로울 때이다. 자유는 나눔을 전제로 한다. 나눔이 사랑이다. 참된 사랑이 있는 곳에 참된 나눔이 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묶인 것도 많다. 하느님께서는 대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난이 있고 나눔이 있다. 복음은 나눔을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욕심으로 사랑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의 길은 나눔의 길이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으로 오셨다. 건강한 삶은 하느님에게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나누시고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신다. 생명은 나눔으로 공동체가 된다. 구원의 공동체는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공동체이다. 

행복은 나눔이고 나눔은 진정한 자유이다. 무엇을 나눌 것인가! 모든 삶을 가난하신 하느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나눔의 날이며 새로운 열림의 날이다. 나누는 것이 자아가 열리는 해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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