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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2021년 10월 8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요엘 예언자는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며,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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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요엘 1장 13-15절, 2장 1-2절
주님의 날,
어둠과 암흑의 날
13
사제들아, 자루옷을 두르고 슬피 울어라. 제단의 봉사자들아, 울부짖어라. 내 하느님의 봉사자들아, 와서 자루옷을 두르고 밤을 새워라. 너희 하느님의 집에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
14
너희는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원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을 주 너희 하느님의 집에 모아 주님께 부르짖어라.
15
아, 그날! 정녕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전능하신 분께서 보내신 파멸이 들이닥치듯 다가온다.
2,1
너희는 시온에서 뿔 나팔을 불고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보를 울려라. 땅의 모든 주민이 떨게 하여라. 주님의 날이 다가온다. 정녕 그날이 가까웠다.
2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먹구름의 날이다. 여명이 산등성이를 넘어 퍼지듯 수가 많고 힘센 민족이 다가온다. 이런 일은 옛날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세세 대대에 이르도록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
화답송
주님은 온 누리를
의롭게 심판하시네.
주님, 제 마음 다하여 찬송하며, 당신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주님은 온 누리를 의롭게 심판하시네.
당신은 민족들을 꾸짖으시고 악인을 없애셨으며, 그 이름을 영영 지워 버리셨나이다. 민족들은 자기네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지고, 자기네가 쳐 놓은 그물에 제 발이 걸리네. 주님은 온 누리를 의롭게 심판하시네.
주님은 영원히 좌정하여 계시고, 심판하시려 어좌를 든든히 하셨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심판하시고, 겨레들을 올바로 다스리시네. 주님은 온 누리를 의롭게 심판하시네.
복음
루카 11장 15-26절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군중
15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24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25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26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자라나 마침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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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어느 나라가 더 크고 힘 있는 나라일까요?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나라가 사탄의 나라보다 더 크고 힘이 세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마주치는 모습들에서 하느님의 손길보다 사탄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제 착각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의 힘이 아니라 사탄의 힘으로 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였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의 나라로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의 반응도 그러하였는데, 하느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이야기를, 그분의 가르침보다 성공하는 방법을 더 좋아하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우리가, 하느님의 손가락이 펼치시는 능력을 바라보기는 더욱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탄이 지닌 힘은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보다 사탄의 유혹이 더욱 부지런하게 우리에게 손짓합니다. 사탄은 하느님께 향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고 더욱 부지런하고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또한 유혹에서 한 번 벗어났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악하고 강한 영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하느님과 사탄의 투쟁 속에서 전개됩니다. 분명 하느님의 힘이 사탄의 능력보다 더 강하고 위대합니다! 그분의 힘을 믿으면서 오늘 우리 자신에게 다가오는 작은 유혹 하나를 이겨 낸다면, 날마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서 있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듯
우리나라에 성령 쇄신 운동이 시작되고 얼마 안 돼서 성령 쇄신 운동에 열심하신 분들이 상당을 청해오신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같이 운동을 하는 분들 사이에서 분열이 생긴 것이었고,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면 좋을지 도움을 청하러 오신 거였습니다.
양쪽 다 자기들이 옳다고 하고, 자기들이 다 성령을 따르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는데 제삼자인 저의 눈에 볼 때 둘 다 성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당신과 함께 모아들이지 않고 흩어 버리는 자"라고 말씀하시듯 성령은 사랑이고 일치인데 미워하고 싸우다가 갈라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성령이 아니라 악령의 인도를 따르는 표시지요.
왜냐면 그분들이 성령 쇄신 운동을 하며 처음에 받았던 것은 분명 성령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성령은 그들에게서 떠나가고 악령이 들어와 그분들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성령을 모신 사람은 더더욱 겸손해야 하는데 성령을 모신 것 때문에 교만하기 쉬운 것이 영적 인간이지요.
영적으로 무딘 사람은 성령이건 악령이건 무관하게 살지만 영적 인간 그러니까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그때그때 영적인 식별을 잘하지 않으면 성령의 사람이었던 사람이 어느 새 악령의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이건 악령이건 영들은 한번 들어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기에 따라 들락날락한다는 것인데 성령과 악령의 차이가 있다면 성령은 초대해야지만 들어오시고 악령은 침입한다는 것이고, 당연히 악령이나 더러운 영은 쫓아내야지만 억지로 나가고 성령은 우리가 겸손과 사랑 대힌 교만과 미움으로 가득차면 조용히 우리에게서 떠나가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나의 집에 더러운 영이 차지하고 있다가 나갔는데 계속 말끔히 치워지고 비어있으면 그 영이 다른 영들을 데리고 나의 집에 와서 다시 차지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더러운 영이나 악령이 나가면 성령을 모셔들여야 하는 것이고,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성령으로 악령을 쫓아내 하는 것인데 우리가 더러운 영이나 악령이 나간 것으로 안심하고 있으면 오늘 주님께서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고 하시듯 더 나빠지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복음을 어제 복음과 연결시켜 얘기를 넓혀보겠습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청하는 우리에게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주님 말씀대로 성령을 청하여 모셔야 하고 오늘 주님 말씀에 늘 깨어 있으면서 영적인 식별을 잘해야 하며 그럼으로 성령으로 늘 충만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 있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주님 말씀대로 영적인 자 그 차지가 성령이 아니라 악령으로 바뀔까 조심해야 함을 묵상하고 성찰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일을 기쁘게 하면 인격이 닦이고, 선교를 기쁘게 하면 신격이 닦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니까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마귀를 쫓아낸다는 말은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나 선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도 한 팀이고 성령으로 일하는 사람도 한 팀이라고 하시며 같은 팀이 어떻게 같은 팀을 쫓아내느냐고 하십니다.
만약 11명이 뛰는 축구경기에서 한 선수가 못한다고 주장이 그 선수를 쫓아내면 10명만 뛰어야 합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못 뛰는 선수라도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명이 서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떨까요? 차리라 나가는 편이 낫습니다. 그 사람이 해 줄 것으로 믿고 있던 동료들은 멍하니 서 있는 선수 때문에 피해를 봅니다. 차리라 없다면 자신들이 조금 더 뛰며 그 자리를 메워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예수님께서 감독이시다면 신앙인들은 선수들입니다. 당신의 목적은 악과 싸워 많은 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를 하지 않는 신앙인이 있다면 그 신앙인은 뛰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오히려 다른 선수들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성령은 능력을 줍니다. 그 능력을 받고 아무것도 안 하면 오히려 더 안 좋은 상황이 됩니다. 세례받고 선교하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선교의 능력입니다. 이는 마치 우물을 파고 물을 퍼내지 않으면 말라버려 안 좋은 독충들이 그곳에서 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물 없는 곳을 찾다가 다시 돌아오는 악령들과 같습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하지만 아직도 물이 흐르는 우물이라면 그것들은 그 자리에도 머물지 못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흐르던가 말라버리던가, 선교하든지 흩어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는 것은 그냥 흩어버리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선교 열정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그냥 나만 신앙생활 잘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왜 지칠까요? 선교의 열정에서 진정으로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실패와 비난일까요, 아니면 칭찬과 성공일까요?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와 비난 등이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임을 잘 압니다. 그래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공하고 칭찬받아 현재에 머물려고 하는 마음이 자신을 망칩니다.
일본인인 가장 존경하는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는 교토의 막 작은 중소기업인 ‘교세라’(KYOCERA)를 시작했을 때 기대치 않게 현 ‘파나소닉’의 전신인 ‘마쓰시다 전기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기업이라 그런지 납품기준도 까다롭고 일정도 빠듯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다른 업체들은 마쓰시다가 갑질을 하고 있다고 불평불만을 자아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보통 ‘이 정도만 하면 됐지!’라는 생각과 ‘내가 왜 못해?’라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더 큰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안정된 지금의 삶을 포기하고 더 큰 성취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물론 이나모리는 몇 년 동안 끝까지 마쓰시다의 갑질을 받아 주며 기술력도 성장시키고 생산비도 줄여서 미국의 반도체 회사까지 납품하는 큰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다른 회사들보다 기술력도 뛰어났고 심지어 가격도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교세라는 그렇게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사람을 몰락시키는 것은 늘 00이었다.’, 유튜브 채널, 체인지그라운드]
실패와 고통은 성장시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가장 큰 독은 안주하려는 마음입니다. 만약 우물물을 더는 퍼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대부분 다시 말라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은 마른 우물이 다시 솟아나게 하는 마중물과도 같습니다. 물이 솟지 않고 말라버리면 그 안엔 이전보다 더 안 좋은 것들이 살게 됩니다. 그래서 더는 물을 마실 수 없는 상황까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일하는가』에서 이나모리 가즈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당신이 일하는 것은 스스로를 단련하고, 마음을 갈고 닦으며, 삶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행위이다. 나는 내면을 키우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한다. 매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내면을 단련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놀라운 작용을 한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80세에 엄청난 적자를 내는 일본항공의 경영을 맡아 13개월 만에 흑자로 전환하고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가 일한 목적은 돈이나 성취가 아니었습니다. ‘인격수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인격수양의 끝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격수양은 하느님처럼 완전해지지 않으면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도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몸이 아파 좋은 대학도 나오지 못하고 망해가는 아주 작은 중소기업에서 연구자로 일했습니다. 회사에서 연구비용을 대줄 수가 없어서 자기 돈으로 연구를 위한 기계를 구입하고 책도 사서 읽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그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일한 목적인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는가!’
하느님도 우리를 ‘선교’로서 인격수양을 시키십니다. 선교를 죽도로 하면서도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물이 계속 나와서 그 안에 악한 것들이 깃들이지 않게 됩니다. 선교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선교하면 하느님 자녀로서의 인격을 갖추어갑니다. 아니 신격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일하며 인격을 닦는다면, 선교하며 신격을 닦는 것입니다.
이나모리는 말합니다.
“20대 초반 나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특출난 재능도 없었고, 모든 일에 흥미가 없었다. 그런 청년이 어떻게 50년 이상 한 가지 일에 매달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도록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참조: ‘왜 일하는가’, 유튜브 채널, ‘2분 독서’]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돈을 주지 않으면 일을 대충하게 됩니다. 성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성과가 없으면 다른 길을 찾습니다. 하지만 정말 큰 성공은 돈이나 성공이 아니라, 일 자체를 목적으로 할 때, 일을 자신의 인격 수양의 도구로 여길 때, 그 모든 것은 나중에 따라온다고 이나모리는 말합니다.
하느님 자녀 됨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선교만한 사랑의 실천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교를 성과를 바라고 한다면 금방 지칩니다. 선교를 하느님 자녀로서 신격수양으로 여기고 한다면 지치지 않고 좋은 성과까지 얻게 됩니다. 선교를 그리스도를 더 닮은 신앙인이 되기 위한 도구로 여깁시다. 이것이 아니면 세례를 받았어도 일곱 마귀가 들어와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의 비결은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인 것처럼, 선교에서의 성공의 비결은 내가 선교하는 일을 좋아하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서 결정됩니다. 일하지 않으면 인격을 수양할 수 없듯, 선교가 좋은 이유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내 안의 신성이 살아나고 드러나게 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엇을 주님께 청하고 있을까요?
요즘에는 인터넷에 요리 레시피를 쉽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레시피를 따라 요리를 하는 분도 많은 것 같습니다. 레시피에서 제시하는 재료들을 일일이 구합니다. 그리고 정량에 맞게 손질하면서 준비합니다. 그 뒤에 요리를 따라 하며 만듭니다.
저 역시 이런 방법을 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종종 발생합니다. 재료를 사다가 1~2개를 빼놓고 구매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마트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기에 때로는 포기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레시피를 보기는 하지만, 무조건 있는 재료로만 합니다. 음식을 만들어 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끼 식사인데, 고기가 없으면 어떻고 감자가 없으면 또 어떻습니까?
대충 흉내만 내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진짜 원하는 맛이 무엇인지 알면 다른 부수적인 것들을 포기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점만 확실히 알면 모든 재료를 갖추고 있지 않아도 나의 만족도를 충분히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한다면서 많은 것으로 가지려고 합니다. 그 순간 가지지 못한 몇 가지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몇 가지에 집중할 수 있다면, 가지고 있음 자체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무척 놀랍니다. 그러나 이를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난하며 하늘의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채울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보이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너무나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능력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지, 베엘제불에게서 온 것인지가 문제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됩니다. 당신께서 사탄과 한편이라면 사탄의 하수인들을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이라 불리는 성령으로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오시는, 모세보다 위대한 새로운 예언자이심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뜻에 집중하면 절대로 헛된 요구를 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으로도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엇을 주님께 청하고 있었을까요? 정말로 중요한 주님만을 바라고, 하느님의 영광을 청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두려움의 종류가 위험의 종류보다 더 많다. 우리는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더 크게 고통받는다.
- 세네카
무엇이 중요한가?
1973년 어느 신학대학에서 ‘예루살렘에서 예리코까지’라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장차 성직자를 꿈꾸는 신학생에게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주고 자료로 성경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나눠주었습니다. 신학생들은 자신이 발표할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담당 교수는 발표는 다른 곳에서 하겠다며 지금 당장 강의실을 옮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빨리 다른 강의실로 옮긴 학생에게는 가산 점수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신학생들은 서둘러 강의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복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힘든 표정을 지으며 벽에 기대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은 교수가 고용한 배우였습니다. 신학생들의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었지요. 신학생들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읽었음에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이 아닌, 성경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의 모습처럼 몸을 돌려 피해서 강의실로 향했습니다.
눈앞의 과제가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에,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 제외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사랑을 제외하는 삶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아닌 사제, 레위인의 모습으로 사는 삶입니다.
의식적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식하지 않는 나의 일상은 그냥 사는 삶이 될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루카 11,26)
안타까운 분열의 모습이다. 하느님 앞에서 작아져야 할 우리들 삶이다. 작아지는 것이 깨어있는 참된 삶이다. 깨어있지 않으면 금세 분열로 치닫는 우리들 어둠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순을 지적하시며 깨우쳐주신다.
외적인 정화보다 내용의 변화가 더욱 중요하다. 하느님으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갈등과 대립 그리고 불행으로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하느님으로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워지는 영적인 우리들 삶이다.
싹 비워낸 자리에 자아가 다시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비워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다. 비워낸다는 것은 우리마음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내어드리는 것이 변화의 삶이다.
변화의 삶이란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이며 실천이다. 더 나빠지지 않도록 삶의 방향을 분열이 아닌 통합으로 바꿀 때이다. 잘 산다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신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것이다.
비움과 채움 성찰과 참회의 중심엔 우리의 자아가 아닌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셔야한다. 하느님을 위한 정화와 회개가 결국 우리를 살리는 참된 변화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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