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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2021년 10월 6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에 기뻐하고 화를 내는 요나 예언자에게, 그렇다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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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요나 4장 1-11절
네가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1
요나는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났다.
2
그래서 그는 주님께 기도하였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4
주님께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말씀하셨다.
5
요나는 그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
6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오르게 하셨다. 그러자 아주까리가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그를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 주었다. 요나는 그 아주까리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7
그런데 이튿날 동이 틀 무렵, 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쏠게 하시니, 아주까리가 시들어 버렸다.
8
해가 떠오르자 하느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보내셨다. 거기에다 해가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9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11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화답송
주님, 당신은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리오니, 주님, 이 종의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주님, 당신은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주님, 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애원하는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은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나이다.
주님, 당신이 만드신 민족들이 모두 모여 와,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 이름에 영광을 바치리이다. 당신은 위대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당신 홀로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 당신은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나이다.
복음
루카 11장 1-4절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자라나 마침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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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인간의 편협함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애
우리는 지난 월요일부터 제1독서를 통해서 요나 예언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들과는 달리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요나 예언자의 모습도 여느 예언자들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다른 예언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지 않고 백성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였지만, 백성은 그들의 선포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오히려 탄압하였습니다. 반면에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피하여 도망가기도 하였으며, 단 한 번의 선포만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더욱 놀라운 것은 예언서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예언자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부터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임금까지, 모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의 시간을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요나 예언서가 3장에서 끝났다면, 모든 것이 행복하게 끝나는 결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장에 이르러, 너무나 당황스럽게도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였던 요나 예언자가 불만을 터뜨립니다.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도 마음에 들지 않아 투정을 부리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오늘 제1독서에서 그려집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민의식’과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이 충돌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하느님께서는 우리만의 하느님이 되셔야 한다는 인간적 고집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요나서의 중심에는 인간의 편협함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애가 있습니다. 요나 예언서는, 우리의 편협한 시선과 생각이 하느님의 자비를 방해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만의 하느님이 아닌, 세상 모든 이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요나처럼 될까, 말까?
천벌을 받으라는 저주가 있고, 그런 짓하면 천벌을 받을 거라고도 얘기합니다.
그러고 보니 천벌은 사람의 벌이나 자연재해보다 큰 벌입니다. 사람이 못하는 것을 하늘이 벌한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요 며칠 우리가 들은 요나서의 요나는 니네베에 회개를 선포하라는 주님의 부르심과 명령을 요리조리 피하다가 어쩔수없이 파견되지만 니네베가 자기의 회개 선포로 회개를 하자 하느님께 화를 냅니다.
자기의 회개 선포로 회개를 하였으면 기뻐해야 할 텐데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은 무슨 이유겠습니까?
자기의 말을 들었으면 기뻐할 텐데 자기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을 들은 것이고 그래서 천벌을 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자기 생각에 천벌을 받아야 할 니네베 원수들이 오히려 용서의 은혜를 받게 되니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라며 하느님께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것이 어찌 화낼 이유입니까? 하느님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심에 찬미 찬양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 이스라엘은 일찍부터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주님을 찬양해왔습니다. 이번에 조사해보니 분노에 더디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내용이 구약에 11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11번 중 오늘 욥기에서만은 하느님께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분노에 더디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은 찬양하지만, 원수들에게도 분노에 더디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은 찬양할 수 없고 오히려 자기들이 하느님께 분노를 터트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그 유명한 시편 136편을 보면 하늘과 땅과 커다란 빛들을 만드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라고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신 주님을 찬미한 다음 이집트 사람들의 맏자식을 치신 주님을 또한 찬미하는데 이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찬미와 분노의 구조'인 것인데 그런데 이스라엘의 '찬미와 분노의 구조'만 이렇습니까?
우리의 구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일본 사람들에게도 자비하신 하느님을 우리가 찬미하고 그들에게도 분노가 더디신 것을 우리가 좋아하겠습니까?
우리의 사랑과 자비가 선인이나 악인에게 똑같이 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우리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요나처럼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느님께 분노를 터트리기도 할 것입니다.
사실 요나는 이스라엘만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입니다. 오늘 요나처럼 우리도 하느님 자비를 독점하려고 하고, 오늘 요나처럼 우리도 고작 아주까리 잎에 행불행이 좌우되며, 오늘 요나처럼 조그만 고통에도 꺼떡하면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쉽게 죽는 타령을 하며 하느님을 협박하곤 하지요.
그런데도 요나가 예언자라니! 요나처럼 예언자 되기 싫은 우리도 요나처럼 예언자로 파견될까 봐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래도 예언자가 돼야 할까요? 도망칠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청할 때 일어나는 일 : 다 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을 알려주십니다.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것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스승마다 기도하는 내용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자 요한대로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기도가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이 우리 ‘수준’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수준을 자녀들이 본받습니다. 만약 내가 세속적인 것을 청하며 기도한다면 자녀들은 부모를 닮아 세속적인 것을 원하는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만약 다른 스승을 만나 부모가 전해준 욕구를 바꾸지 않으면 말입니다.
나는 어떤 욕망을 갖기를 원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바로 그 욕망을 욕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자녀가 가져야 하는 것을 욕망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주님의 기도’에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는 것을 청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 자녀가 욕망해야 하는 것을 욕망하기에 하느님 자녀입니다.
하지만 자녀가 부모 외에 부모가 주는 돈만을 매일 청한다면 어떨까요? 부모는 필요 없고 먹을 거 차려놓고 사라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어떨까요? 부모는 주고 싶었던 것까지 주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는 경우는 자녀로서 당연히 청해야 하는 ‘주님의 기도’ 내용이 아닌, 주님의 기도를 통해 돈이나 명예, 자녀의 성공 등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이용당하는 느낌을 느끼고 그 사람을 자녀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무언가 얻어내려면 먼저 부모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녀가 청할 때 가장 기뻐합니다. 먼저 그렇게 청하고 나면 받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가 자신에게 청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이 ‘주님의 기도’에 들어있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인 영국군과 우세했던 프랑스군이 전투를 벌인 적이 있습니다. 크레시 전투라고 합니다. 이때 영국군이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18세밖에 되지 않았던 에드워드 왕자가 선봉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아버지인 국왕은 강한 친위대를 높은 지대에 배치하고, 즉각 왕자의 부대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필요한 준비를 하고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심한 공격을 받고 위험에 처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즉각 구조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구조가 더뎌지자 왕자는 또 다른 사자를 보내어 즉각적인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왕은 왕자가 보낸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가서 왕자에게 나는 언제 구조가 필요한지 모르는 그런 미숙한 지휘관도 아니고 또 구조대를 보내지 않을 만큼 무관심한 아버지도 아니라고 왕자에게 전하게.”
왕은 적의 진영에 혼란이 생기는 것을 간파하고 왕자가 조금만 더 견디면 유리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날의 영예가 그의 아들의 것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왕은 아들에게 명성이 돌아갈 수 있을 때 지원부대를 투입할 작정이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곧 나도 아버지께 바라는 것이 되게 만드는 기도입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적진에서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아버지는 자신의 아이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전교 1등 하면 스마트폰 사달라는데 안 사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먼저 스마트폰 사주면 전교 1등 해보도록 노력하겠다니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을 따라주는 자녀에게 아버지는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부모가 가장 사랑스러워하는 자녀는 자신의 원하는 것을 청하는 자녀입니다. 만약 자녀가 축구선수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데, 자녀가 갑자기 “아빠, 나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한다면 아빠는 재산은 물론이요, 가진 모든 것을 다 털어 자녀를 도울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의 꿈은 처음부터 축구선수였습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해서 형이 선생님에게 그냥 교실에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축구만 하라고 쫓겨난 적이 있는데 그것을 그렇게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본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손웅정 씨는 두 번이나 진짜 축구를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축구선수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축구선수였지만 키가 작고 볼 다루는 기초실력이 부족하여 힘들어하던 중 또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축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니 아버지는 가진 모든 것을 아들에게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근슬쩍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이 이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겨울만 되면 소금을 100포 이상씩 뿌렸습니다. 소금기가 있으면 눈이 와도 빨리 녹고 넘어져도 푹신해서 덜 다치기 때문입니다. 눈이 와도 아버지는 먼저 와서 흥민이가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은 먼저 치워놓았습니다. 흥민이는 당시 가지고 싶은 게임기가 있었습니다. 아마 플레이스테이션 같습니다. 그러나 집안 사정상 그 게임기를 사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때 그 게임기를 놓고 슛을 하는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흥민이가 게임기를 탈 수 있도록 데리고 나가서 슛에 대한 속성 과외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게임기를 탔습니다. 게임을 하면 축구에 방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축구를 위해 게임기가 자극제가 될 수 있다면 아버지는 그것까지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만약 축구는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데 게임기만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였으면 어떨까요? 집안 사정상 절대 게임기를 사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먼저 그분의 꿈과 같아야 하고 더불어 받는 것은 기 꿈을 이루는데 자극제가 될 것들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만 하십시오. 그러면 필요한 모든 것들은 생각만 해도 들어주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는 것과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곧,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죄에서 벗어남입니다.
디팩 쵸프라는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욕망을 원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것만 한다면 나머지는 아빠가 다 책임져주마!”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어떻게 내 이웃에게 전달하고 있습니까?
어떤 지식인이 가톨릭에 입교했습니다. 그의 입교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친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가톨릭 안에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지 않나? 이렇게 문제가 많은데 왜 가톨릭에 입문했는가?”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 역시 가톨릭에 너무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교회 초창기 때부터 계속 있었지. 그런데도 계속 존속해 오는 것을 보면 이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네.”
교회 안에 무능함과 한계는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시작해서 계속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교회 안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교회 나가지 않는 이유를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2,000년 이상 계속되고 있었으니까요. 교회 안의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엄청난 특권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제자들에게 직접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이 하던 기도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즉,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 역시 기도를 통해 당신과 하느님의 관계와 똑같은 관계에 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엄청난 특권이 아닙니까?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는데 이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교회 안에서 특권을 받습니다. 그러나 조건 없는 특권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커다란 책임도 동시에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 마지막에 ‘용서’에 대해 말씀을 하시지요.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차마 내치지 못하시는 동정이 담긴 사랑을 가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도 동정이 담긴 사랑으로 모든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용서를 받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희에게 잘못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4)
다른 이들을 용서해주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속되는 한 늘 되풀이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특권만이 아닌 책임도 주어지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어떻게 내 이웃에게 전달하고 있습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99도까지 죽을 힘을 다하여 온도를 올려두어도 마지막 1도를 넘기지 못하면 물은 영원히 끓지 않는다. 물을 끓이는 것은 마지막 1도, 포기하고 싶은 그 1분을 참아내는 것이다.
- 김연아
성공의 비결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나라 안의 현자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 백성들이 잘살 수 있는 성공의 비결을 연구하라.”
현자들은 세상의 모든 지혜를 찾아서 성공의 비결을 12권의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시 이 12권의 책을 정리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임금은 “바쁜 백성에게는 한 권의 책도 너무 부담스럽다.”라면서 더 간단하게 정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현자들은 오랫동안 토의했고 결국 한 줄로 성공의 비결을 요약해서 임금에서 보고했습니다. 그 비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공짜는 없다.”
‘공짜 치즈는 쥐덫에만 있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생각납니다. 공짜를 좋아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그 공짜에 대한 우리의 책임도 분명히 요구됩니다. 그래서 공짜는 없습니다.
주님께 청원 기도를 많이 바칩니다. 그런데 자신이 할 것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공짜만을 청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삶, 진정한 성공의 비결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루카 11, 1)
주님의 기도는 하루를 열고 하루를 마감하는 가장 아름다운 인사(人事)이다. 우리의 생활이 우리의 기도이다. 사람과 생활 사람과 기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관계이다. 주님께서 간절히 기도하신다.
기도의 출발은 주님이시다. 우리를 살리는 기도이다. 삶의 길을 기도로 가르쳐주신다. 기도의 의식전환이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기도 없이는 용서도 없다. 주님의 기도는 간절한 감사를 매순간 일깨워준다.
우리 인생에 가장 고마운 기도를 선물로 주셨다. 이제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합니까? 라고 묻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기도하여라." 가르쳐주신다. 생명으로 숨쉬듯 기도로 사는 우리들이다.
주님의 기도가 빚어내는 새로운 일상이다. 아버지 하느님께 인사를 드리는 새날 새아침이다.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주님의 기도가 우리에게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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