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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4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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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2021년 10월 4일 (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Memorial of Saint Francis of Assisi)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그는 많은 보석금으로 석방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회복한 그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기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를 설립하여 복음적 가난을 실천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무렵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러한 오상의 고통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2년 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요나 예언자는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다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게 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드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4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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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요나 1장 1-16절, 2장 1절, 11절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려고
길을 나섰다.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야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그러자 뱃사람들이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배를 가볍게 하려고 안에 있는 짐들을 바다로 내던졌다. 그런데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그러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말해 보시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고 어디서 오는 길이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느 민족이오?” 


요나는 그들에게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 사람들은 더욱더 두려워하며,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말하였다. 요나가 그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그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11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2 
요나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13 
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 

14 
그러자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었다.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주님, 당신께서는 뜻하신 대로 이 일을 하셨으니, 저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15 
그러고 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16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 

2,1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11 
주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분부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뱉어 내게 하셨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은 구렁에서 제 생명을
건지셨나이다.

 

곤경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당신은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저승의 배 속에서 부르짖었더니, 당신은 제 소리를 들어 주셨나이다. 주님, 당신은 구렁에서 제 생명을 건지셨나이다.

당신이 저를 바닷속 깊은 곳에 던지시니, 큰물이 저를 에워싸고, 그 모든 파도와 물결이, 제 위로 덮쳤나이다. 주님, 당신은 구렁에서 제 생명을 건지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당신 눈앞에서 쫓겨난 이 몸, 어찌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다시 바라볼 수 있으리이까?” 주님, 당신은 구렁에서 제 생명을 건지셨나이다.

저의 넋이 아득해질 때, 저는 주님을 기억하였나이다. 저의 기도 당신께,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 다다랐나이다. 주님, 당신은 구렁에서 제 생명을 건지셨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0장 25-37절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의 힘으로 복된 프란치스코의 사랑과 열정을 본받아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온 힘을 기울이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4일 (월)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10월 4일 (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4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너무도 익숙한 말씀이기에, 오늘은 ‘사마리아인’이 아닌 ‘율법 교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의 행동을 주목해 보면,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또 자기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그의 의도가 몹시 불순합니다. 

아울러 그의 질문은 매우 형식적이며 기계적입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지만, 이 질문을 다시 살펴보면, “나는 그 ‘무엇을’ 잘하고 있으며,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라는 교만함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른 화법으로 접근하십니다. “누가 이웃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율법 교사에게는 ‘아무개’라는 이웃의 이름이 중요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되어 줌’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율법 교사에게 하느님의 가르침, 곧 율법은 일종의 수학 공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가르치는 교사였으니, 율법의 계명에 관한 지적인 앎은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계명을 바탕으로 ‘무엇’과 ‘누구’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계명을 통해서 정작 중요한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지는 못하였고, 따라서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며 이웃이 되어 줄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고 그분의 계명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읽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율법 교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위기 의식이 없음이 더 큰 위기이다.

 

너무도 잘 아시다시피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로 가지신 교황님은 이 시대의 문제에 대한 답을 프란치스코에게서 찾으셨고, 이 시대의 제일 큰 문제인 지구 위기에 대한 답도 당연히 프란치스코에게서 찾고자 하셨지요. 

그래서 교황께서는 2015년 프란치스코의 축일을 기해 <찬미받으소서>라는 회칙을 내셨고,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을 올해 시작하며 9월 1일 지구의 날서부터 프란치스코의 축일인 오늘 10월 4일까지  <창조 시기>를 위한 기도를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교황님의 노력과 촉구에 프란치스칸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란치스코가 생태 보호를 위한 주보 성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교황님이 이렇게 프란치스코를 부각하고 대안으로 제시하시는 것을 그저 자랑만 해도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 부담이 되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하고 있다고 변명이나 강변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안주하거나 변명을 할 것이 아니라 뭔가를 우리가 해야 하는데 제 생각에 7년 여정의 첫해인 올해는 우선 생태적 회심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심을 한다면 그 첫 번째 회심은 지구의 위기를 느끼지 못함에 대한 깨달음과 뉘우침이 되어야겠습니다. 

교황님이, 과학자와 환경 운동자들이 그렇게 경고를 해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그리고 이스라엘이 예언자들의 외침과 주님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처럼 심각하게 듣지 않는 우리의 무딤과 안주를 뉘우쳐야겠습니다. 

생태적 회심의 두 번째는 공동의 집에 대한 책임감과 우주적 형제애의 부족에 대한 뉘우침입니다. 

'가서, 허물어져가는 주님의 고치라'는 소명을 받은 프란치스칸의 <가는 영성>은 형제애가 인류를 넘어서 피조물까지 이 땅을 넘어서 전 지구와 온 우주까지 확장되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주와 지구가 우리 공동의 집이며 그 안의 모든 피조물이 우리의 형제라는 인식과 의식이 부족했고 그래서 내집만 가꾸고 공동의 집이 허물어져가는데도 걱정하거나 기도하지도 않는데 이것이 우리의 생태적 회심의 세 번째 차원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생태적 회심은 행동하지 못했음에 대해 뉘우쳐야 합니다. 그것은 공동의 집이 허물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행동과 허물어진 집을 고치려는 행동을 실제로 취하지 않았음에 대한 뉘우침입니다. 

그런데 왜 행동을 하지 않을까요? 앞서 위기에 무디고 안주하려는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고 했는데 무딤이란 지구 위기를 강 건너 불처럼 생각하는 것이며, 장소적으로는 내가 사는 곳이 아닌 다른 대륙의 문제요, 시간적으로는 나 죽고 난 뒤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주란 본래 편리한 것에 길들여져 느리고, 작고, 불편한 것을 못 견뎌 할 뿐 아니라 요즘 시대는 소비주의에 너무도 쇠뇌되어 있어서 수도자들조차 싼 것을 살지라도 안 사고는 못 배기고 절약을 할지라도 아예 없이 사는 것은 도무지 엄두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의 위기를 심각하게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코로나 위기는 지구의 위기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이것은 몇 년의 위기이고 백신이나 치료제로 곧 극복이 되겠지만 지구의 위기와 기후의 위기는 노아의 홍수와 같이 지구의 멸망입니다. 

그리고 코로나는 모든 사람이 그 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공동 대처하지만 지구의 위기는 사람들의 위기의식이 크지 않고 아직 강 건너 불보듯하지요. 사실 위기 의식이 없는 것이 더 큰 위기임을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고통은 왜 신비인가?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율법의 핵심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깨달은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깨달았지만, 아직 실천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은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면 모두가 다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분별하는 이유는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사람을 분별하여 나에게 이익이 될 사람에게만 잘해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버려야 분별심이 사라지고 모두에게 자신에게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버리는 방식은 타인을 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타인이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를 위해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자아를 위하는 삶에서 벗어납니다. 생판 모르는 채로 태어나 만난 형제이지만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분별이 사라지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 인류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모든 생명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생명이 다 그분에게서 왔으므로 그분과 별개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모든 존재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살 때 필연적으로 내가 죽습니다. 이것을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자아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어서 사랑하려면 필연적으로 넘어야 하는 산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하느님께 예배는 드리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을 믿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져있던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친형제였다면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분별력이 생겨서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을 예배하러 성전에 가지는 않지만,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아픔을 남의 아픔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아를 죽이는 아픔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아픔 안에 세상의 아픔이 포함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이기에 타인의 고통을 통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아픈 것처럼 상대를 바라보니 아픈 사람을 그냥 놓고 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해야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어서 하게 됩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높은 탑에 갇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탑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도움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소리를 크게 질렀지만, 탑 아래의 분주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순금 동전을 떨어뜨렸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금 동전을 줍기 위해서 몰려들었지만, 금 동전에 온 정신이 팔려서 아무도 탑에 갇힌 사람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엔 무너진 벽에서 굳은 회반죽 한 덩어리를 떼어 내어서 구멍 밖으로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가던 어떤 사람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머리를 다친 사람이 고개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았고, 탑 안에 갇힌 사람의 처지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은 고통받는 사람뿐이란 뜻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길을 잃고 남의 집에 들어가 부모 없이 사신 까닭에 버려지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 잘 아십니다. 그래서 집의 물건들을 잘 버리지 못하십니다. 물건들에 당신의 아픔이 투영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적에  가출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씻겨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신 적도 있습니다. 당신과 같은 처지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이런 사람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고통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고통이 타인도 살리고 나도 살리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고통과 멸시를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고통은 물론 나를 상처입힙니다. 그러나 상처받아 봐야 내 몸처럼 치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일부러라도 단식도 해보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도 당해보는 등의 고통을 친구처럼 여기고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사랑하게 만드는 또 다른 원리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주님께 항상 고통과 멸시만을 청했습니다. 능동적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받고 싶을 정도로 고통의 가치를 아는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기도할 때, 위로와 고통에서의 해방만을 청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묵주기도에서 ‘고통의 신비’를 바치며 실제로는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신비는 곧 은총입니다. 고통이 은총이란 뜻입니다. 은총이라면 오히려 달라고 청해야 옳은 것이 아닐까요? 그것을 자꾸 피하려고만 한다면 나에게 이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면 더 약해지고 생명도 잃습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란 말이 있습니다. 미 해군 장교였던 제임스 스톡데일은 베트남전 당시 포로로 잡혀 기약 없는 잦은 고문을 당하며 8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후 삼성장군이 되어 대통령 후보로도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떤 이들은 왜 포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석방되리라 믿었던 이들은 크리스마스를 지나게 되면 그래도 부활절이 되기 전까지는 석방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면 상실감이 반복되어 결국은 버티어내지 못했습니다. 불필요한 낙관주의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가혹한 현실을 직시하되, 마침내 이기겠다는 믿음 또한 유지해야 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물론 고통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이 신비롭다고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보다는 지금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드는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을 빨리 떨쳐버려야 할 원수처럼 여기기보다 나를 동반 성장시키는 친구처럼 여겨야 합니다. 

두 친구가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는 매우 추운 겨울이었고 눈보라가 치고 있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은 죽지는 않았으나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길을 가던 두 친구도 탈진 상태였습니다. 

한 친구는 그 사람을 데리고 가자고 했고 다른 친구는 그러면 우리 모두 죽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한 친구는 먼저 떠났고 다른 한 친구는 그 사람을 들쳐 업고 걸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이르자 먼저 갔던 친구가 얼어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쓰러진 사람을 들쳐 업은 친구는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 덕분에 살게 된 것입니다. 

칼 융은 “모든 신경증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고 했고,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날 더 강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고통이 쓸수록 열매가 달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만 말고 친구로 대해봅시다. 내가 참아내는 고통이 이웃을 더 공감하고 사랑하게 만들어서 결국엔 그것이 나를 살리게 할 것입니다. 내가 이기지 못할 고통은 주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통을 이겨낼 때 사랑할 수 있게 되어 그것이 나의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는 왜 수학만 잘해?

 

고등학교 친구 중에 수학을 무척 잘하는 친구가 기억납니다. 그런데 이 친구를 기억하는 이유는 보통 수학을 잘하면 다른 과목도 잘하는데, 이 친구는 딱 수학만 잘하는 경우였지요. 다른 과목의 성적은 아주 형편없는 특이한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너는 왜 수학만 잘해?”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이 질문에 친구는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중학생 때 수학 선생님을 너무 좋아했어.” 
 
수학 선생님을 좋아하다 보니 수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래서 수학 공부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수학 성적도 올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과목의 선생님은 무조건 혼내고 몽둥이를 들어서 너무 싫었답니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혼내는 선생님의 과목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실제로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은 이 세상에 더 큰 가치를 만듭니다. 주님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관심을 두게 되고, 주님을 알기 위해서 더 노력할 것입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주님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 큰 가치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랑을 가장 강조하시고 중요한 계명이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덧붙여 ‘사랑’에 관한 가르침을 보충합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모든 이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문제는 명확했습니다. ‘이웃’은 자기들 사이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을 뺀 모든 동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이란 이방인이건 이단자이건 다른 이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모든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이제 율법 교사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음은 옳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질문은 이렇게 되었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사랑해야 더 높은 가치를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사랑이야 이견이 없지만,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 특별한 이웃만을 나의 이웃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되고 있습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의 목적과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 톨스토이

 

 

유머를 구하는 기도 (성 토마스 모어)

 

주님, 저에게 충분한 소화력을 주시고 소화할 음식도 주소서. 
 
건강한 몸을 주시고 또 이를 되도록 잘 간직하는 데 필요한 감각을 주소서. 
 
죄에 빠졌다 해서 절망하지 않고, 사물에 다시금 제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 착한 것과 깨끗한 것을 분별할 거룩한 마음을 내려주시옵소서. 
 
따분함도, 불평도, 신음도, 탄식도 모르는 마음을 주소서. 
 
갈수록 볼품이 없어져 가는 ‘나’라는 것에 관하여 너무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생활 속에서 자그마한 기쁨을 알고, 남에게도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도록 유머 감각을 주시고, 농담을 이해할 은총을 내려주옵소서. 
 
토마스 모어 성인의 기도를 보면서, 나의 기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삶 전체가 기쁨과 행복의 시간이 되려면, 성인의 청처럼 유머가 필요합니다. 유머를 구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 37)

 

아름다운 계절의 생생한 향기이며 넘치는 빛깔이다.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우리들 삶이다. 가난의 실천이 곧 복음의 실천이다. 가장 간절한 가난이 가장 행복한 은총이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맑은 가난이 세상을 치유한다. 맑은 가난으로 하느님을 찬미한다. 하늘 나라의 문을 여는 가난이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만나는 가난이다. 가난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최고의 기쁨이다. 자아에서 빠져나오는 가난은 서로를 살린다. 

맑은 가난은 사랑이며 용서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가난한 마음이 잘 가르쳐주고 있다. 하느님을 위한 가난이다. 복음의 요약은 가난한 마음이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간절한 가난 간절한 사랑이 있다. 

사람의 맑은 가난이 풍요롭게하시는 하느님을 향한다. 가난이 만들어가는 감사의 눈물이다. 가난하기에 숨길 것 없는 우리들 기도이다.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서로를 구원하는 가난한 십자가가 있다. 

가장 가난한 십자가가 가장 풍요로운 사랑이 되었다. 모든 것을 여는 가난의 신비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온전한 가난으로 가장 충만한 사랑의 신비를 만났다. 생생한 만남의 정수(精髓)이다. 가난의 신비는 참된 만남의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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