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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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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2021년 10월 1일 (금) 소화 데레사,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Memorial of Saint Thérèse of the Child Jesus) 동정 학자 기념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소화(小花) 데레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데레사 성녀는 1873년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습니다.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간 그녀는 결핵을 앓다가 1897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했습니다. 

짧은 기간의 수도 생활이었지만 데레사 수녀는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면서 고행했습니다. 일상의 단순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였던 그녀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그리고 사제들, 특히 먼 지역에 가서 선교하는 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선종한 뒤에 나온 데레사 수녀의 병상 저서들은 세계 각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이를 감동하게 했습니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은 그녀를 시성하고, 1929년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했습니다. 1997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녀를 교회 학자로 선포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바빌론에 유배된 이들은,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다고 고백하며 참회 기도를 드립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는 고을들에게, 당신을 물리치는 자는 당신을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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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바룩 1장 15ㄴ-22절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거역하였습니다.

 

1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 

16 
우리 임금들과 우리 고관들과 우리 사제들, 우리 예언자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17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18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19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날부터 이날까지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20 
주님께서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려고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던 날, 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21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22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소서.

 

하느님, 민족들이 당신 유산의 땅에 쳐들어와,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었나이다. 당신 종들의 주검을 하늘의 새들에게,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살을 땅 위의 짐승들에게, 먹이로 내주었나이다. 주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소서.

그들의 피를 물처럼, 예루살렘 둘레에 쏟아부었건만, 묻어 줄 이 아무도 없나이다. 저희는 이웃에 우셋거리가 되고, 주위에 비웃음과 놀림감이 되었나이다. 주님, 언제까지 마냥 진노하시렵니까? 언제까지 당신의 격정을 불태우시렵니까? 주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소서.

선조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소서. 어서 빨리 당신 자비를 저희에게 내리소서. 저희는 너무나 불쌍하게 되었나이다. 주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소서.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주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0장 13-16절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받아 모신 성체의 힘으로 복된 데레사가 주님께 바친 그 사랑이 저희 안에서도 타오르게 하시어 저희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1일 (금)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10월 1일 (금)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우리의 눈과 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고을은 도대체 무슨 일로 “불행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불행 선언’을 듣게 되었을까요? 

『성경』 부록에 있는 ‘신약 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도를 살펴보면, 코라진,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이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고을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고을이었습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처음 시작하셨던 곳이며(마태 4,13; 마르 1,21; 루카 4,31 참조),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마르 8,22 참조), 제자들과 함께 자주 들르셨던 동네였습니다(마르 6,45; 루카 9,10 참조). 

그러한 이유로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과 병행하는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곳들을 “예수님께서 ……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마태 11,20)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활동하셨고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던 고을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을 보고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수많은 임금과 예언자가 보고 싶어 하고 또 듣고 싶어 했던 것들을 직접 보고 들었으면서도 그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내려진 ‘불행 선언’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이제 우리를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미사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빵의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바른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지요? 우리의 눈과 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불행하여라!”가 아니라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을 들려주실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귀가 오롯이 그분을 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지옥에 가는 이유 : ‘행복’을 원하지 않아서

 

오늘 복음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 고을은 한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실 때, ‘하늘’과 상반되는 ‘저승’은 곧 지옥을 나타냅니다. 이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이들의 운명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기쁩니까? 이 소식은 나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의로우신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삽니다. 내가 죽고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면 기쁩니까? 오늘 저주받은 고을들도 그렇게 주저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사실 행복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은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누구나 다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것이 더 많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미 무엇이 행복인지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복음이 맛이 없는 것입니다. 술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술을 끊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서전에서 평생 122명의 여인과 잠자리를 하였다고 써서 전 세계에 유명하게 회자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카사노바’입니다. 그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혹은 “나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 “나는 여자를 위해 태어난 남자다.”라는 등의 말을 남겼습니다. 

카사노바는 배우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그는 성직자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키도 크고 외모도 출중했지만 동시에 천재였습니다. 그래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스페인어, 영어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대학교 때 학습 능력이 대단하여 고전 문학을 줄줄이 꿰었음은 물론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훗날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특히 춤, 펜싱, 승마 등 몸으로 하는 모든 궁중 예술과 카드놀이에서 여느 귀족 가문의 기사보다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환상적인 기억력입니다. 카사노바는 70년 평생 자기가 본 얼굴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고, 자신이 듣고 읽고 말하고 본 것을 모두 다 기억했다고 합니다.

서품 준비에 한창이던 때 일흔 살인 사제 말리피에로가 어린 가수 테레즈를 농락하는 것을 봅니다. 혼란스러운 그는 백작의 딸은 루시아라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은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욕정을 절제한 채 그녀를 떠납니다. 하지만 훗날 그녀가 어느 호색한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절제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도 여러 여자와 특별히 높은 신분의 여자들과의 관계로 그는 성직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 여기저기를 평생 도망 다니며 많은 여자를 꾀고 돈을 위해 사기를 치고 다녔지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한 공작부인의 돈을 빼앗기 위해 임신한 여인을 데려와 방금 죽은 아내의 영혼에 그녀가 죽으면 영혼을 환생시켜주겠다고 말하고는 만약 유산을 이 배 속의 아이에게 상속하면 죽은 아내는 다시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 것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워낙 말을 잘했나 봅니다. 

평생 도망치며 감옥을 들락거리고 세상을 떠돌다 다시 베네치아로 와서 한 여자에게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73세의 나이로 외롭게 세상을 떠납니다. 가장 오래 사귄 사람이 3개월입니다. 사실 그는 문란한 생활 때문에 성병에 자주 걸려 40대 중반부터는 성기능 장애가 오기도 했습니다. 천재로 태어나 성직자의 길을 택하여 위대한 그리스도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그는 결국 자신이 믿는 행복을 찾아 떠났고, 그렇게 자신이 원한 자유로운 떠돌이 생활만 하다 외롭게 죽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천재였지만 실제로 이룩한 업적은 하나도 없고, 돈으로 여자의 성을 착취한 호색한이며, 그 돈을 벌기 위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기를 치던 정말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는 평가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습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그리스도인으로 죽는다.”

카사노바는 분명 그리스도를 택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정도는 그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여자의 성을 착취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복이라고 믿는 철학을 추구한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살면서 결국 돈도, 명예도, 성도 나를 온전히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행복은 돈이다.”, 혹은 “행복은 명예다.”라는 식으로 결정해 버리면 참 행복이 왔을 때는 그것을 밀쳐내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간신히 나뭇가지 하나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하던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그래, 그럼 그 손을 놓아라.” 

“당신 말고 다른 분은 안 계시는가요?”

위 사람은 살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행복을 원하는지, 행복에 대한 내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으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하느님만 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당신 자신이기 때문에 나를 버리고 당신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행복을 찾지 않고 이미 그 행복을 인간의 수준으로 규정하여 복음을 밀쳐내면 오늘 저주받은 마을들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믿음이 가득한 곳에는 기쁨이 넘쳐난다.

 

미국을 여행 중인 어떤 형제님께서 주일미사 참석을 위해 성당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성당이 있는 모르기에 호텔에서 나가 교통경찰에게 성당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소개받은 성당으로 가는데, 가는 길에 보니 다른 성당도 있는 것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아까 소개했던 교통경찰에게 더 가까운 곳에도 다른 성당이 있던데 왜 더 먼 곳을 소개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성당이 좋은 성당인지 제가 가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에서 교통정리를 해보니까 이 성당에서 나오는 신자들의 표정이 가장 행복하고 기뻐 보였습니다.”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이 많은 성당이 가장 좋은 성당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긴 나쁜 성당에 특히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한 곳에 어떻게 기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믿음이 가득한 곳에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곳에는 기쁨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있는 공동체는 어떤 것 같습니까? 기뻐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인상을 쓰면서 화를 내는 사람이 많습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당신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기쁘게 이 세상을 사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탄식이 이해됩니다. 갈릴래아 호수 북쪽 물가에 있는 도시들을 대상으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사실을 꾸짖습니다. 이는 저주가 아니라 탄식이며 마지막 호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당시에 상업적으로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도시를 자주 방문하셨고 또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계속해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제1독서의 바룩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바룩 1,17.18) 
 
지금 우리는 기쁘게 살고 있나요? 믿음으로 기쁘게 살아야 하는데, 믿음이 없어 기쁘게 살지 못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세상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말씀에 집중하면서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주님의 탄식을 부르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기쁨을 맛보는 능력은 관심을 갖는 일로부터 비롯된다.

- 줄리아 캐머런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난 7월부터 제 생활 리듬을 바꿨습니다. 3~4시에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던 것을 5시에 일어나서 시작합니다. 책을 읽어보니 하루에 7시간 이상을 자야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해서, 나쁜 머리를 더 나쁘게 만들지 않으려고 밤 10시에 자고 5시에 일어납니다. 
 
아침기도 후에 식사합니다. 요즘에 즐겨 먹는 것은 ‘떡’입니다. 냉동실에 있던 떡을 밖에 꺼내놓고 아침기도를 하고 나면 떡이 말랑말랑해져 있습니다. 냉동실에 넣기 전의 떡 맛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만약 떡 녹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겠다면서 그냥 먹는다면 어떨까요?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지.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이 기다림의 시간을 생각해봅니다. 꽁꽁 얼었던 떡이 녹는 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녹도록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또 하느님의 마음을 녹이는 기다림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기다리지 못합니다. 늘 급하고 ‘빨리빨리’를 외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관계가 회복될 시간을 기다려야 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행복이 하느님의 행복이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 16) 

날이 새니 다시 가을이다. 주님의 뜻은 단순한 사랑으로 다시 깊어진다. 사랑은 단순하다. 단순함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들 시간이다. 하느님 사랑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를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순수한 아픔이 순수한 기쁨으로 다시 영롱하다. 우리 모두는 순간의 삶을 살고있다. 잠시 지나가는 우리들 삶이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순간 순간의 슬픔과 아픔 기쁨과 행복까지 하느님께 내어드린다. 아름다운 봉헌이 아름다운 삶으로 이끌었다. 물리칠 수 없는 우리의 작은 일상안으로 하느님께서 들어오셨다. 우리의 작은 일상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작은 일상의 마음이 소박한 사랑임을 뜨겁게 깨닫는다. 

사람의 행복이 하느님의 행복이다. 행복은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 마음이다. 마음이 사람을 만든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우리들에게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작은 일상 작은 나눔 작은 기도 그리고 단순한 사랑을 보여주신다. 이 단순한 사랑의 힘이 모여 울타리에 갇힌 우리들 사랑을 깨워 보편적인 교회의 사랑으로 날아오르게 하신다. 

사랑은 영원하다. 사랑을 따르는 우리들 일상의 여정이다. 일상(日常)이 사랑이다. 가을이 일상 안으로 점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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