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3.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0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7주일 -

 

 

2021년 10월 3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십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 오늘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셨고,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영도자이신 그분을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니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3일 (일)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창세 2장18-24절

 

둘이 한 몸이 된다.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한평생 모든 날에
복을 내리시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한평생 모든 날에 복을 내리시리라.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주님은 한평생 모든 날에 복을 내리시리라.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주님은 한평생 모든 날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 아들의 아들들을 보리라.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기를! 주님은 한평생 모든 날에 복을 내리시리라.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히브 2장 9-11절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10장 2-16절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무색해진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자라나 마침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3일 (일)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10월 3일 (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혼인의 의미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혼인의 의미를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따라 산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교회의 가르침대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부부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담은 하와를 만나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하고 외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협력자를 마련해 주신 데 대한 기쁨과 감사의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난 뒤, 하느님 앞에서 하와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앞에서 한 말과 지금 이 말이 같은 사람이 한 것으로 보이나요? 아담의 이 말을 들은 하와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그에게 아담은 남편이 아니라, 이른바 ‘남의 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인류의 첫 부부도 이처럼 현실적인 모습을 지녔습니다. 

성경이 전해 주는 부부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맞이한 어려움을 하느님 안에서 함께 견뎌 내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느님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혼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때로는 ‘남의 편’ 같고, 때로는 ‘부인하고 싶은 사람’일 수 있겠지만, 남편 그리고 아내는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어 한 몸을 이룬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혼인하지 않으면 하늘 나라 들어갈 길이 없다.

 

오늘 복음은 혼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한 번 성사된 혼인은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혼인을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믿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혼인은 행복을 위함이라기보다는 ‘자기완성’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자기완성에 필수적인 코스가 자아의 종말입니다. 자기가 살아있으면 자기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냥 혼자서도 자기완성을 이루면 안 될까요? 혼자 살아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는 안 됩니다. 나를 죽여 피를 내어주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관계 안에서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배우면 그 둘은 혼인 관계가 됩니다. 혼인이 아닌 이상 이것을 배울 곳은 없습니다. 사제도 혼인합니다. 신자들과 혼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내어주는 법을 배웁니다. 누구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 혼인한 사람뿐일 수밖에 없습니다. 

혼인해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을 위해서도 내 피를 완전해 내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누구에게서도 그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심지어 둘의 열매인 자녀가 있음에도 그 능력을 배울 수 없다면 그 어디에서도 사랑을 배울 수 없습니다.

다행히 혼인 안에는 자아의 소멸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때문에 혼인하지 말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이 때문에 혼인이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말에 동의하십니까? 

어떤 결혼한 아내요, 한 아이의 엄마인 자매가 ‘결혼하고 아내와 엄마가 된 후, 자아의 종말’이란 제목으로 쓴 글입니다. 아마 대부분이 공감 가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러니까 결혼해야지!’라고 생각하시면 신앙인이고, ‘그러니까 결혼하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면 그냥 사람입니다. 



결혼하고 집안일이 이렇게 힘든 건지 처음 알았다. 밉게만 보이던 우리 엄마가 점점 이해가 된다. 점점 엄마에게 동질감이 생기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꾸자꾸 문득문득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도 그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내가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엄마는 당연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 엄마는 그랬으면 안 되었던 거였구나. 엄마는 나와 아빠를 미워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남이 먹은 거 치우고 남이 먹을 거 차리고 예전 같았으면 불공평하다고 내가 시다냐고 버럭 했을 일들을 포기가 쌓여 이젠 잘도한다.

집안일은 끝이 없다. 변기가 이렇게 자주 더러워지는지 예전엔 몰랐다. 몇 명이서 쌀을 몇 킬로 사야 한 달을 먹는지 반찬은 뭐가 어느 정도 남았는지 저 빨래는 돌아가다가 언제 끝나는지 밥은 몇 시쯤 차려야 하는지 이런 집안일 계산이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뺑글뺑글 돈다.

이걸.... 앞으로 몇십 년을 해야 하나 손목 무릎 아작나도 속으로 눈물 먹으며 한다. 나 말곤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루종일 집안일을 하고 나면 밤엔 쉬고 싶다. 잠자리 갖는 것도 귀찮다.

애 낳고 이제 전업주부로서 일자리도 잃게 되면 나의 자아는 완벽히 끝이 난다. 나는 이제 남편의 성공을 바라는 서포 터로서의 인생을 살게 된다. 돈의 힘은 크다. 집 명의도 남편 쪽... 내 돈은 고작 혼수와 결혼 준비 따위로 다 날려버리고 남편이 벌어 오는 돈으로 살수밖에 없게 되면... 감히 집안일 반반하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된다. 남편도 당당히 퍼질러있기 시작한다.

내가 이 집안을 떠나서 홀로 선다면? 내가 지금 경단이 몇 년인가... 나 혼자 집을 구하고…. 내가 먹을 음식을 사고 그럴 수 있을까? 겁이 난다. 갑자기 집이 안락하게 느껴진다. 밖에서 실컷 남편 욕을 하며 풀어지면 다시 집에 와 집안일을 한다. 내 남편 욕만 잘 들어주면 되지 그냥 내 갑갑한 속만 풀어주면 되지 떠날 생각은 없다. 이쯤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이다. 남편 성 매수쯤은 무감각하다. 넘어갈 수 있게 된다. 돈이나 벌어와라...

매일 전쟁 같은 아침..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너도나도 자기 일자리로 출발하면 나는 홀로 텅 빈 집에 남아 슥 삭 슥 삭 뒷정리를 하고 집안일을 한다. 햇빛이 좋아 잠시 창밖 풍경을 본다.

남편이 밤에 먹고 그대로 두고 간 상하기 시작한 컵라면. 단 한 번도 먼저 닦여있지 않은 세면대. 식사 후 남편은 누워서 폰 게임 하러 갈 때... 그걸 내가 치우고 설거지할 때... 남편과 자식이 방과 소파를 차지하면 내 자리는 부엌밖에 없을 때 내 자아는 서서히 서서히 죽어간다. 내가 의식하지도 못할 새에 점점 좀먹어간다. 흩어진다.

과거의 나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헉하고 문득 뒤돌아보면 예전 나였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을 서서히 순응하며 하고 있다. 내 자아는 갈기갈기 조각조각 찢어져 내 남편 그리고 내 자식들에게 가서 붙는다. 그들만을 바라보고 그들의 인생과 목표가 곧 내 성취가 되고 목표가 된다.

결혼 후에 머릿속에선 정말 생경한 자아가 사라지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초반에 그 자아 상실의 느낌이 갑갑하고 익사하는 것 같아 많이 울고불고 발버둥도 쳐봤으나 쇠창살이 있는 벗어날 수 없는 쳇바퀴 안을 영원히 탓 탓 탓 달리고 있는 거 같아 포기하게 된다. 이젠 멍한 상태로 그 속에서 미소짓고 있다.

여자가 결혼하면 나는 없어지고 엄마가 된다는 말... 말로는 많이 들어봤다. 하지만 그 말을 진짜 이해하지 못했다. 진짜 경험해보면 아, 이게 그 느낌이구나 하고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한다는 건 그전 내 이름 세글자…. 내 인생이 죽어버리는 것과 같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집안과 식구들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달려나갔던 그 자유. 내 목표, 나의 꿈! 사회에서의 내 위치 모조리 분쇄되고 어머니, 아내만 남아 나는 없다. 나는 죽었다. 결혼은 자아의 종말이다. 사랑은 결혼을 통해서야 비로소 깨지는 지독한 환상이다.



사랑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로맨스’가 깨지는 것입니다. 로맨스 소설을 보며 결혼을 환상적으로 여길 때, 그때 사랑을 안다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현실은 그와 반대입니다. 실상은 사랑은 로맨스가 깨질 때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로맨스는 상대를 이용하여 내 행복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랑은 그 로맨스가 죽을 때 상대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성부라면 아내는 성자와 같고 둘을 이어주는 힘이 사랑의 성령입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부부관계가 끝까지 가야 하는 이유는 삼위일체의 실현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사랑하셔서 내어주는 당신들의 피와 생명이 ‘성령’입니다. 쌍방의 이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실현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둘만 있다면 분열이요 그냥 둘입니다. 

사랑은 나를 죽여야 해서 항상 셋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 번째 것을 만들기 위해 둘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서로를 죽이는 이 혼인 생활을 견뎌내지 못하면 하느님 삼위일체를 닮지 못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사랑이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 자녀도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삼위일체 혼인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제되지 않은 황금 원석입니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어서 이대로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정제되려면 용광로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순금으로 태어납니다. 

용광로는 고통입니다. 내 안에서 내가 빠져나가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 용광로가 혼인입니다. 불순한 원석끼리 만나서 황금이 되겠다는 게 로맨스입니다. 그건 환상일 뿐입니다. 이 환상이 깨져야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데 그 환상이 깨지는 장소가 가정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 사실은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어렸을 때 어른들은 제게 이런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너 사실은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실제로 동네에 개천이 있었고, 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이 다리를 지날 때마다 다리 밑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워왔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믿게 된 것은 제 위의 형·누나와 다른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형, 누나들은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잘하는 것이 많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리 밑에서 정말로 주워 왔나 봐’라는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한 번은 어떤 행려자가 놀고 있는 저를 빤히 보더니, “너 나랑 같이 살래?”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때 저 역시 이분을 유심히 바라봤습니다. 혹시 저를 다리 밑에 버린 진짜 아버지가 아닐까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진짜로 쫓아갈 생각도 했었습니다. 
 
다른 점만을 생각하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커가면서 제 고향이 다리 밑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제 형제들 얼굴이 다 똑같습니다. 눈꼬리가 처진 것, 주름 많은 것 등등 같은 점이 너무 많습니다. 같은 점을 보지 못하면 함께 할 수 없지만, 같은 점을 생각하면 함께 할 이유가 너무 많아집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모세의 계명에 대해 다시 물으시고, 바리사이들은 이혼을 허락하는 성경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즉,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의 말은 바리사이들이 신명 24,1.3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혼인을 제정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혼을 허락하는 성경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이혼의 허락은 상대의 ‘추한 것’이 드러날 때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추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며,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자기와 다른 것을 ‘추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를 이루는 같은 점을 먼저 생각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어린이를 축복해달라는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언짢게 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내를 버리는 모습이나, 어린이를 쫓는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차이점을 찾으며 갈라내는 모습은 ‘하나’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십니다. 그만큼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를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십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누가 내 삶을 만들어 줄 것인가. 오로지 내가 한층 한층 쌓아갈 뿐이다.

- 법정

 

 

상대방이 원하는 것만을 팔 수 있다.

 

교구청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한 번은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어떤 분이 면담하고 싶다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분께서는 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자신이 가지고 온 스타킹을 사달라고 합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사제에게 스타킹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음은 그분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신부에게 스타킹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사모님께 선물로 드리면 되잖아요.” 
 
“신부는 결혼하지 않아서 아내가 없습니다.” 
 
“성직자가 어려운 사람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건 팔러 오신 것입니까? 도움을 청하러 오신 것입니까? 물건 팔러 오셨으면 저는 필요 없으니 안 살 거고, 도움을 원하시면 사회복지회로 가시길 바랍니다.” 
 
이분은 욕을 하면서 나가셨습니다. 특별히 문제가 있는 분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무조건 자신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거절되자 그렇게 화를 냈던 것입니다. 
 
장사 잘하는 사람은 소비자의 욕구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소비자의 욕구는 전혀 헤아리지 않으면서 사지 않는다고 화내는 사람이 장사를 잘할 수 없음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헤아리고 있을까요? 당연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해주셔야 한다면서 화를 내고 있지는 않나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마르 10, 8)

 

결혼 행진곡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게된다. 온갖 종류의 결혼 생활이 펼쳐진다. 둘이 하나되는 혼인은 사고 파는 거래가 결코 아니다. 인격의 결합이며 혹독한 존중의 배움이다. 아픔 없는 성장은 없다. 고통 없이 혼인은 깊어질 수 없다. 

하느님과 함께 걸어온 여정이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기대어 살아가는 혼인의 여정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은 하나이다. 받아들이는 사랑이며 덮어주는 사랑이다. 약함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약함과 약속 사이에 혼인이 있다. 서약은 하나이다. 맺어주신 하느님을 향한다. 사랑은 서약이다. 혼인은 안전지대가 아니라 혼인을 유지하고 혼인을 성장시키려는 기도와 소통이 있을 뿐이다. 

결혼은 의지이며 동의이며 생활이다. 생활을 향하여 생활을 통하여 나아가고 있는 혼인의 여정이다. 혼인의 건너편에는 가장 아름다운 성숙이 기다리고 있다. 맺어주신 하느님께서 끝까지 도와주시는 혼인의 은총이다. 

사연 많은 모든 혼인을 위하여 기도드린다.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