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5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5.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0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2021년 10월 5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요나 예언자가 전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 말씀을 듣는 것 한 가지뿐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5일 (화)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요나 3장 1-10절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셨다.

 


주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주님,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애원하는 제 소리에, 당신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0장 38-42절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자라나 마침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5일 (화)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10월 5일 (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5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예수님을 주체로 모시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르타가 많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시중드느라 이리저리 분주하였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자매의 이러한 상반된 모습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마르타의 모습은 주도적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오고, 나서서 갖가지 시중을 들며 그분을 극진히 모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어떠하였습니까? 마리아는 이 장면에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목적어로 삼고 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어로 삼고 있습니다. 

복음은 두 자매의 뒷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장면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마르타는 ‘나는 예수님을 우리 집에 모셨어!’라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어!’라고 전혀 다르게 반응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둘 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전하지만, 마르타는 자신이 주체가 되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체로 모시는 것이지요.

문득 미사 참례 뒤에 우리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생각이 미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을 들려주시고, 당신 몸을 내어 주셨어.”라고 하는지, 아니면 “오늘 나는 미사에 다녀왔어.”라고 하는지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나 자신’을 첫자리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미사에 참석하고, 성당에서 활동하는 모든 것의 첫째 이유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도 예수님 말씀을 듣는 것을 그 무엇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을 못마땅해하는 마르타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에 잠겨서

 

중요한 손님인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이하여 다들 바쁘고, 언니 마르타는 전체를 지휘하느라 더 분주한데 마리아만 얄밉게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에겐 마리아만 얄미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마리아를 그대로 내버려주시는 주님, 자기의 수고를 몰라주시는 주님도 얄밉습니다. 

그래서 얄미운 짓 멈추고 일을 거들게 하라고, 자기의 수고를 알아달라고 볼멘소리를 하는데 주님께서는 마리아도 당신도 잘못이 없다시며 한 술 더 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마르타는 나쁜 몫을 택한 것입니까?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면 궂은 일을 맡은 것이니 마르타가 나쁜 몫을 택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인간적인 기준에서 좋은 몫과 나쁜 몫을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적인 기준, 그것도 이기주의적인 기준에서는 보통 나의 '좋고 싫음'이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되어 객관적이어야 할 '좋고 나쁨'이 나의 주관적인 '좋고 싫음'에 좌우됩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것이 꼭 내게 좋은 것입니까? 어린이의 경우 좋아하는 사탕이 이빨을 썩게하듯 내가 좋아하는 것이 꼭 그리고 다 내게 유익한 것은 아니고, 그래서 많은 경우, 좋아하는 것이 오히려 나쁜 것이지요.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리고 하느님 보시기에는 더더욱 나쁜 것, 악을 우리 인간이 좋아하고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내가 좋아하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고, 오늘 주님께서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는 것도 이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좋은 몫이고, 내 악한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 좋은 몫입니다. 

그러니 주님 말씀을 듣고, 주님 사랑에 머물고 잠기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니 좋은 몫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리아뿐 아니라 마르타도 뺏기지 말아야 할 몫이고 그 누구도 누구에 의해 뺏기지 말아야 할 것이니 주님께서는 마리아편만 든 것이 아니고 모두 그러해야 한다고 하신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에 머물고 잠기는 그 좋은 몫을 뺏기지 말아야 하고, 주님의 사랑에 머물지 않고 일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주님의 사랑에 잠기지 않고 질투에 빠지는 일도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사랑에 잠기지 않고, 이웃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 빠지곤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시작하고서는 하느님은 빠지고 인간적인 경쟁만 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쉽지 않지만 일을 하되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기도를 통해 ‘걱정’을 없애고 싶은가, ‘불안’을 없애고 싶은가?

 

오늘 복음은 마르타가 마리아를 질투하는 내용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봉사하려고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의 모델이고 마리아는 기도만 하려는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기도’와, ‘염려’ 혹은 ‘걱정’을 대비시키십니다. 당신에게 붙어있으며 기도하는 사람은 염려와 걱정을 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고, 반대로 말하면 기도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염려와 걱정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예수님을 위해 하는 일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떤 이익 때문에 예수님께 붙어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불안은 믿음으로 극복되고 염려는 깨달음으로 극복됩니다. 아이가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불안 때문입니다. 그 불안은 엄마 품에 안기면 사라집니다. 

불안은 ‘존재적인 것’입니다. 불안이 해결되려면 ‘내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러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불안은 자신을 만들어주시고 죽은 뒤까지도 책임져 줄 창조자 외에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불안을 잊기 위해 하는 행동이 ‘염려와 걱정’입니다. 염려와 걱정은 방향이 명확합니다. 공부하지 않은 아이는 시험이 걱정됩니다. 결과가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수를 못 받아도 부모님이 괜찮다고 안아주실 것을 확신하면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미래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걱정과 근심, 염려는 존재적 불안만 해결되면 같이 사라집니다. 

아이는 부모를 확실히 믿습니다. 자신이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해도 부모가 자신에게 주는 눈빛으로도 부모가 자신을 낳고 보호해 줄 것을 믿습니다. 그런 것도 해주지 못할 것이면 자신을 낳았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누가 바로 파도에 사라질 모래 위에다 성을 짓는 노력을 하겠습니까? 나를 태어나게 했다면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기만 한다면 불안이 사라집니다. 불안이 사라지면 걱정도 없어집니다. 시험을 못 봐도 부모님은 나를 안아주시고 여전히 사랑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패신저스’(2016)는 미래에 우주선에서 시스템 오류로 90년 먼저 동면에서 깨어난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다시 동면으로 들어갈 수 없는 그 남자 주인공은 1년 동안 우주선 안에 있던 모든 재미있는 것들을 다 해봅니다. 심지어 대화를 나눌 로봇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자살을 선택하려 합니다. 

그러던 중 동면하고 있던 한 여자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그녀의 모든 정보와 그녀가 쓴 책 등을 다 읽고는 그녀에게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녀를 깨워버리면 그녀가 평생 자신과 둘만 살게 되어버리는 것에 분개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더라도 우주선 안에는 둘이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깨웁니다. 물론 시스템 오류로 그렇게 된 것으로 속입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여자는 그 남자가 혼자 외로워 자신을 깨운 것을 알게 되고 분개합니다. 그리고 그 남자와 마주치지 않고 혼자 우주선 구석에서 살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너무 외롭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걱정입니다. 

여기서 여자의 선택은 하나뿐입니다. 그냥 혼자 외로이 분개하며 늙어 죽던가 아니면 자신을 깨운 남자의 사랑을 믿던가... 행복하게 할 자신이 없었다면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깨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자는 함께 지내며 남자가 자기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랑을 확인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자신을 깨워냈다면 그 우주선 안에는 자신이 도달하여 누릴 것보다 훨씬 좋은 것들이 많기 때문일 것임을 짐작합니다. 

여자는 남자를 믿고 살아보기로 합니다. 우주선을 자신들이 도착할 곳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둘은 수십 년 동안 우주선을 지구처럼 아름다운 식물들로 꾸미며 최초의 아담과 하와처럼 살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깨어나게 하신 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우리를 깨웠다면 이 세상에서 걱정 근심하며 두려움 속에 살기를 원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준비가 갖춰져 있어서 우리를 깨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불안해하지 말고 우리를 깨운 그분을 믿고 사랑하며 살면 됩니다. 그러면 걱정도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걱정은 불안의 하위 개념입니다. 불안하니까 여러 가지 염려가 생기는 것입니다. 

불안은 ‘염려와 걱정’을 낳습니다. 마르타는 염려와 걱정을 해결하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고 마리아는 불안을 해결하려 예수님의 품 안에 머물려는 사람입니다. 누가 현명하고 무엇이 꼭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걱정은 하나가 해결되면 다른 것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불안함이 그리스도의 존재로 해결되면 더는 걱정도 생기지 않습니다. 누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입니까? 

우리는 왜 걱정할까요? 불안함을 잊기 위해서입니다. 왜 생겨났는지 모르기에 그 불안함을 잊으려 걱정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말은 ‘내 힘으로’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염려하고 걱정해서 이만큼이나 산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까요? 몸도 버리고 마음도 버리고 나쁜 일을 불러들입니다.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욥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두려워 떨던 것이 나에게 닥치고 무서워하던 것이 나에게 들이쳐 나는 편치 않고 쉬지도 못하며 안식을 누리지도 못하고 혼란하기만 하구나.”(욥기 3,25-26)

그렇다면 걱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이 있을까요?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불안의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불안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잠을 자기 두려운 아이들은 부모의 품 안에서는 쌔근쌔근 잘도 잡니다. 불안하지 않으니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르타보다 마리아를 닮읍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다 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기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창조자이시고 우리는 그분 품에 있음을 믿으면 됩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낳으려고 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면 하느님만 믿으면 됩니다. 

그 믿는 과정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걱정은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으로 해결되겠지만, 불안은 예수님의 존재와 그 믿음만으로 해결됩니다. 그리고 불안이 사라지면 걱정도 사라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톨스토이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톨스토이는 이렇게 인상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첫째는 지금 여기, 둘째는 옆에 있는 사람, 셋째는 그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랑의 실천을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특별한 날에만 또 특별한 사람에게만 하는 사랑이 아닌, 지금 여기 가까이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당장 실천하는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실천은 주님께서도 제일 강조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실천을 통해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사랑의 실천을 좀처럼 실천하지 못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나의 것을 채우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또 ‘나중에’라는 말로 뒤로 미룰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은 지금 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또 사랑은 내게 잘해준 사람에게 나도 보답 차원에서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시중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가 언니인 마르타를 돕기는커녕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답답하겠지요. 예수님께 더 잘 대접하기 위해서는 일손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할 텐데, 예수님 옆에서 빈둥대는 마리아가 어떻게 예쁘게 보이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마리아가 가장 좋은 몫을 선택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가장 귀한 일은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현세의 어떤 일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처럼 그 말씀을 듣는 ‘경청’의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마르타는 올바른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녀 역시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예수님에게 잘해주는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둘 다 바른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틀렸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행하고 있을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휴식은 게으름도 멈춤도 아니다. 일만 알고 휴식을 모르는 사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쉴 줄만 알고 일할 줄 모르는 사람은 모터 없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아무 쓸모 없다.

- 헨리포드

 

 

내 삶의 상쾌함은 어디에 있을까?

 

지난 7월. 매일 아침 “오늘은 올여름 가장 더운 날입니다.”라는 알람이 스마트폰으로 들어오더군요. 매일 어제보다 더운 날씨였습니다. 밖에 나가면 너무 더워서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였지요. 그래서 주로 사제관 안에서만 생활했습니다. 시원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으면서 말이지요. 
 
한참을 시원한 에어컨을 맞으면서 책을 보고 있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습니다. 시원하니 상쾌함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두통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너무 실내에만 있었던 것 같아서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역시 너무 더웠습니다. 피부가 타는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잠시 쉬려고 나무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이 안에서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솔솔 부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한여름 에어컨 앞에 있는 사람은 상쾌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무더위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은 잠시 몸을 기댈 수 있는 나무 그늘에도 시원함과 상쾌함을 느낍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무조건 거부하고 피할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이 상쾌함을 느낄 수 있는 고마운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루카 10, 42)

 

필요한 한가지는 주님과의 참된 만남뿐이다. 만남의 진가는 마음의 진가로 드러난다. 뒤엉킨 마음에서 좋은 몫을 선택하는 방식은 먼저 주님께 우리 마음을 두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우리자신을 주님께 두는 것이다. 주님께 마음을 두어야 주님 안에 머무를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머무르는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이란 주님과의 이야기가 깊어가는 것이다. 이야기가 깊어간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이 깊어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가 작아지지 않고서는 제대로 들을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을 머물러 듣는 것이 마음을 살리는 가장 큰 일이다. 마음과 마음의 일치가 주님의 눈물어린 현존이다. 마음에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마음을 살리는 말씀을 먼저 듣는 오늘이다. 마리아는 그 시간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