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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9월 27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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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

 

 

21년 9월 27일 (월)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1581년 프랑스 랑드 지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600년에 사제품을 받았고, 1617년에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이때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자선 단체인 사랑의 동지회, 전교회,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쳐 봉사했습니다.

1660년에 선종한 빈첸시오 사제는 1737년에 시성되었습니다.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은 그를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이가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사랑의 딸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즈카르야 예언자는 만군의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해 내시리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9월 27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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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즈카 8장 1-8절

 

내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해 내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온에 커다란 열정을, 격렬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시온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리라. 예루살렘은 ‘진실한 도성’이라고, 만군의 주님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리라.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이가 많아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든 남녀 노인들이 다시 예루살렘 광장마다 앉아 쉬리라. 


도성의 광장마다 뛰노는 소년 소녀들로 가득 차리라.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그때에 이것이 이 백성의 남은 자들 눈에 신기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내 눈에까지 신기하게 보이겠느냐? 만군의 주님의 말이다.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가 내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해 내리라. 


나는 그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게 하리라. 그러면 진실과 정의 안에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리이다.

 

민족들이 주님 이름을, 세상 모든 임금이 당신 영광을 경외하리이다.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어, 헐벗은 이들의 기도를 굽어 들어주시고, 그들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리라.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리이다.

오는 세대를 위하여 글로 남기리니, 새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리라. 주님이 드높은 성소에서 내려다보시고,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니, 포로의 신음을 들으시고, 죽음에 붙여진 이들을 풀어 주시리라.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리이다.

“당신 종들의 자손은 편안히 살아가고, 그 후손은 당신 앞에 굳게 서 있으리이다.” 주님이 시온에서 당신 이름을, 예루살렘에서 당신 찬양을 전하시리라. 그때에 백성들과 나라들이, 주님을 섬기러 모여들리라.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리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9장 46-50절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천상 성사로 힘을 얻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복된 빈첸시오의 모범과 전구로 도움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성자를 본받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27일 (월)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27일 (월)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27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누가 우리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냐?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머물며 성장하게 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우리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냐?’ 하고 논쟁을 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속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놓으시고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많은 일을 해내거나,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신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묵묵히 자신을 내어 주며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순진하고 단순하며  작고 연약하기에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이처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과 우리 자신이 살아갈 힘을 얻고자 하느님의 보호를 청하는 순수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5 참조).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처럼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의 모범을 따른다면 우리는 진실과 정의 안에서 하느님의 참백성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적 밴댕이 속알딱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일부 겹칩니다. 어제는 제자들의 독점 시도를 가지고 나누기를 하였기에 오늘은 어린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큰 사람에 대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찌 큰 사람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이어서 하신 말씀 "내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이를 받아들이되 그저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슨 의미이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과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제 생각에 무엇을 하든 주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답게 하는 것인데 주님의 정신을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정신은 어떤 것입니까? 

복음의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주님은 모든 것의 기준과 중심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의 기준과 중심이 어른이고, 어른들이 하는 데 '애들은 가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어린이처럼 힘없는 사람이 쉽게 무시되고 배제되고, 하느님마저도 무시하고 배제하며 힘있는 사람들 마음대로입니다. 

그렇습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 힘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고, 하느님마저 무시하고 배제하여 오직 자기뿐입니다. 

그래서 남을 생각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을 속 좁은 사람이라고 하고 그런 마음을 밴댕이 속알딱지 같다고 하는데 영적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세상을 품는 것보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품을 수 있는 품이 큰 것이고 하느님 나라를 품을 수 없다면 그것이 영적 밴댕이 속알딱지지요. 

그렇기에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린이처럼 힘없고 약할지라도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으니 그것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품을 수 없다면 영적 밴댕이 속알딱지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해한다는 말은 “나랑 똑같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시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누가 서로 큰 사람이냐로 싸우고 있었는데, 사실 작은 사람이 작은 사람을 더 잘 받아들임으로 더 큰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계십니다. 어째서 겸손한 사람이 포용력이 좋을까요? 

그 이유는 서로 커지려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사람을 받아들일 때 자신에게 유용한지 먼저 보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런 욕심이 없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이미 부모를 가지고 있기에 모든 이를 친구로 맞아들입니다. 

만약 제가 유튜브 조회수에 관심이 많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렇게 좋은 내용을 올리는데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이 보지 않지? 참 이해가 안 되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이 없다면 어찌 될까요? 지금 구독하고 꾸준히 봐 주시는 분들에게 더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안 보는 사람들은 ‘다 그들만의 이유가 있겠지!’라고 여기게 됩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내 욕심 때문에 나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삶에 만족하여 크게 바라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만족하여 ‘왜 우리 부모는 이러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고 다른 친구들과 부모님을 비교하게 되면서는 ‘왜 우리 부모는 다른 부모와 같지 않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욕심이 생기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해가 되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사라져 내 안에 여유가 생겨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해지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태어난 지 20일 만에 부모에게 버려진 한 아이가 있습니다. ‘키릴’이라는 이름의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4살 된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는 여섯 차례나 입양이 거부된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오른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지고 입양도 거부된 것입니다. 

그런데 캐나다의 한 부부가 고아원에 한쪽 팔이 없는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꼭 그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라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의문은 키릴이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풀릴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거주하는 레즐리와 더그 페이시라는 이름의 부부는 더그의 아버지와 함께 키릴을 마중하러 공항에 나왔습니다.키릴은 오른쪽 팔꿈치 아랫부분이 없어 반소매 밑으로 팔 끝부분이 삐죽이 나온 채로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낯선 공항에 어리둥절한 채 나간 키릴에게 다가온 것은 한 할아버지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입양 부모 더그의 아버지인 크리스였습니다. 크리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환한 미소로 키릴을 반겼습니다. 키릴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과 똑같이 오른팔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오른팔을 보여줬어요. 그냥 쭉 내밀었죠. 키릴은 흠칫 놀라더니 곧 그의 오른팔을 뻗어 내 오른팔을 만졌어요.”라며 크리스는 감격스러웠던 그 순간을 설명했습니다. 또 “키릴은 할아버지의 오른팔을 처음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어요.”라고 더그는 설명합니다.

오른팔이 없는 공통점을 가진 키릴과 크리스는 금세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들은 서로를 볼 때마다 짤따랗게 남은 오른팔 끝부분으로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3년 전부터 입양 준비를 한 이들 캐나다 부부는 한 고아원에 오른팔이 없는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들의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같은 처지인 이 아이를 입양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한쪽 팔이 없는 장애 때문에 다른 부부에게 여섯 차례나 입양이 거부됐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이 아이의 장애가 우선순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키릴은 캐나다로 입양되어 부모가 생겼을 뿐 아니라, 자신의 롤모델인 할아버지도 갖게 되었습다. 크리스는 한쪽 팔이 없다는 장애를 극복하고 사업가로 성공했으며, 장애인 올림픽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더그는 말합니다. 

“처음 아버지에게 키릴의 사진을 보여줬을 때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나랑 똑같구나.’라고 말씀하셨어요.” 

더그는 덧붙입니다.

“아버지는 목표를 설정하면 무엇이든 해내는 분이지요. 아버지는 키릴에게 완벽한 롤모델이 될 거에요.” 

키릴은 현재 캐나다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난 이렇게 목욕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처음 봤어요.” 

엄마 레즐리의 말입니다. 

“고아원에는 총 12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단 2명이었죠. 키릴은 이곳에 오기 전까지 한반도 목욕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해요.” 

키릴은 엄마 손을 잡고 장 보러 가는 극히 작은 일에도 즐거워한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출처: ‘팔 없는 아이 입양 고집한 부부, 왜?’, 김혜경 기자, 뉴시스, 2015. 11. 2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랑 똑같구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 지으시고, 우리의 모든 처지를 겪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은 작아지고 가난해지고 초라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러한 겸손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셨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은 그 사람과 같은 처지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말썽부려도 이해합니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아지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작아지면 감사하지 욕망에 불타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장 작아진 사람은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됩니다. 

온유하고 겸손해집시다. 그래야만 작은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들을 받아들여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도 만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하십니까?

 

몇 년 전, 백령도에서 선물 하나를 제게 보내줬습니다. 백령도 홍어가 유명하다면서 보내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손질되어서 곧바로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또 삭힌 홍어도 아니었습니다. 생물 홍어 한 마리가 통짜로 온 것입니다. 손질된 홍어만 먹어봤지, 직접 손질을 해야한다고 하니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겨우 손질해서 직원들과 함께 먹을 수 있었지만, 그 뒤 다시는 이런 선물이 오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야 인터넷 안에 들어가면 모든 요리 레시피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어떠했을까요? 줘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겠다 싶습니다. 즉, 알아야 잘 먹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도 알아야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받았어도 받은 줄 몰라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큰 시련을 주셨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하십니까? 줘도 못 받아 먹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느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즉, 어린이를 받아들여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고 하십니다. 
 
지금이야 어린이를 마치 집안의 최고 어른처럼 모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한 약자였습니다. 아직 미성숙의 단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무시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여야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어린이와 같이 사회 안에서 소외당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주님의 이름을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도 막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 역시 함께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뜻이 마치 주님의 뜻인 것처럼 이웃을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은 모두를 포용하는 사랑이라는 것, 특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습이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고, 이로써 주님께 더 큰 사랑과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는 ‘항상 더 많이’의 경제에서 ‘이제 충분하다’의 경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 아르투어 리히

 

 

빠른 속도, 느린 속도... 모두 상대적입니다.

 

처음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동창 신부의 차를 처음으로 운전하게 되었습니다. 운전학원이 아닌 장소에서는 단 한 번도 운전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척 긴장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동창 신부에게 운전하면서 계속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 너무 빨리 가는 것 아냐?” 
 
차의 속도계도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당시의 저였습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과속하고 있는 것처럼 차의 속도가 빠르다고 느꼈던 것이지요. 동창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40km야. 조금 더 속도 내도 돼.” 
 
이렇게 ‘빠르다, 느리다’라는 기준 자체는 상대적입니다. 
 
언젠가 어떤 신부의 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 속도를 내지 않고 가는 앞차를 향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렇게 느리게 갈 것이면 차선을 바꿔줘야지. 뒤의 차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잖아? 왜 배려를 하지 않는 거지?” 
 
앞차의 운전자가 초보자라 나름 최고 속도를 내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긴장하고 떨려서 어쩔 줄 몰라 할지도 모릅니다. 
 
배려는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남의 배려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죄에서 벗어나는 길

 

"막지 마라."(마르 9, 39) 

아무도 말하여 주지 않던 말씀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신다. 죄가 있기에 용서가 있고 죄가 있기에 회개가 있다. 끊어내야 할 것이 참 많은 우리들 삶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다만 죄를 잘라내라고 말씀하신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은총과 결단의 새로운 삶이다. 막을 수 없는 결단과 실천의 변화된 삶이 우리들 복음이다. 잘라 내고 빼어 던져 버리는 결단과 실천의 삶이 회개이다. 진리에 눈을 뜨는 회개이다. 

막을 수 없는 진리의 힘찬 결심이 시작되었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들 삶이다. 진리를 만나는 은총은 우리 삶에서 시작한다. 참된 진리는 구원을 얻게한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기쁘게 걸어가신다.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울 수 없고 잘라내지 않고서는 나갈 수 없다. 버려야 할 것은 악습이며 맞이해야 할 것은 우리의 주님이다. 주님의 사랑은 막을 수 없으며 참된 믿음은 회개를 미루지 않는다. 구원을 막을 수 없다. 구원의 기쁜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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