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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9월 26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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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6주일 -

 

 

21년 9월 26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에게 있는 영을 덜어 내시어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십니다.

 

 

✠ 오늘 제2독서

 

야고보 사도는 부자들에게,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으니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울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 이는 당신을 지지하는 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9월 26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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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민수 11장 25-29절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그 무렵 

25 
주님께서 구름 속에서 내려오시어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시어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다. 그 영이 그들에게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예언하였다. 그러나 다시는 예언하지 않았다. 

26 
그때에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그런데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 천막으로 나가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도 영이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진영에서 예언하였다.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고 모세에게 알렸다. 

28 
그러자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29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네.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네.

당신의 종도 이 가르침 익히리니, 이를 지키면 큰 상급 받으리이다. 저도 모르는 허물 누가 아오리까? 숨겨진 저의 잘못 씻어 주소서.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네.

오만한 자에게서 당신 종을 지켜 주소서. 제 위에 군림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러면 제가 흠 없이 살며, 크나큰 죄악에서 깨끗해지리이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야고 5장 1-6절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습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9장 38-43절, 45절, 47-48절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고 사치와 쾌락을 추구하며 가난한 이들의 몫을 가로채는 부자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천상 신비로 저희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며 그 수난에 참여하고 그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26일 (일)

 

 

팔로티회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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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26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반복되는 죄의 굴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의 한 부분이 죄를 짓게 하면 그 부분을 잘라 던져 버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알아듣고 죄를 지은 육신을 잘라 낸다면, 우리는 정화되고 자꾸 반복되는 죄를 짓지 않게 될까요? 아닙니다. 의식과 생각이 바뀌지 않고서는 반복되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나약함 때문에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가슴 위에 돌덩이를 하나 올려놓은 듯이 답답하고 힘들며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를 믿고, 주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탁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러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성사, 특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에 자주 참여하며 우리의 영혼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용서받은 죄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깨끗하게 치유받은 나병 환자(마르 1,40-42 참조), 시력을 되찾은 바르티매오(마르 10,46-52 참조), 죽음에서 되살아난 라자로(요한 11,1-44 참조)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풍성합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더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자비는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35면 참조).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자비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점점 죄에서 멀어지고, 우리의 나약함 안에서 우리의 강함이신 하느님의 도우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의 독점, 가장 나쁜 소유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제자들의 독점 시도입니다. 민수기에서 여호수아는 모세를 추종하지 않은 원로 둘이 모세와 일흔 원로에게 내렸던 같은 영을 받아 예언을 하자 그들이 예언을 못하게 해야 한다고 모세에게 요구합니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복음에서도 요한은 주님의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자 막으려 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모세와 주님의 대응은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아니, 내버려두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고 모세의 경우는 좀 더 적극적으로 모든 백성에게도 영이 내리면 좋겠다고 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주님의 영을 독점하기 위해다른 사람에게 영이  내리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는 것입니까? 영이 나의 것이나 또 누구의 것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영은 주님의 것이기에 영이 내리고 안 내리고는 주님께 달린 것인데 주님이 아닌 누가 어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인데 우리 인간은 종종 주님의 사랑/은총과 심지어 주님의 영까지 나에게는 주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독점욕은 소유욕 중에서도 가장 나쁜 소유욕이고 시기나 경쟁과도 관련이 있으니 이웃 사랑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니 하느님 사랑이 아닙니다. 

우선 영에 대한 독점욕은 소유욕 중에서 가장 나쁜 소유욕입다. 좋은 물건을 나만 가지려는 것도 나쁜 소유욕이고,부모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것도 나쁜 소유욕인데 주님의 영을 독점하려는 것이니 정말 나쁜 소유욕이지요.


다음으로 영의 독점은 시기심이나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니 남의 불행에 기댄 나의 행복이며,사랑이 눈꼽만큼도 없고 미움뿐이기에 결국 자신도 불행합니다. 

끝으로 영의 독점은 자기 욕심이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니 결국 하느님께 대한 감사도 사랑도 영광 드림도 없고 그래서 불행합니다. 

주님의 영이나 영의 은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요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것이니 이 하느님의 소유권을 인간이 침범할 수도 없고 그리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우리 인간이 해야할 것은 그 모든 은사를 공짜로 주심에 감사와 영광과 사랑으로 돌려드리는 것뿐이고 그때 인간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와 마찬가지로 받은 은사로 하느님께 영광과 사랑을 돌려드릴 때 시기와 경쟁은커녕 같이 기뻐할 것이며 그때 인간은 같이 행복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권고 8번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도가 말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친절해야 하는데, 뱀에게까지 친절해야 하는가?

 

오늘 복음은 이렇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어떤 사람을 고발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가 아니었는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에 제자들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제자들의 기대와 같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 이는 오히려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며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약간 뜬금없어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그 흐름을 보면 친절엔 보상이 반드시 따른다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굴지 말고 친절하면 그 보상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지만 하나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비바람이 치던 날 밤, 필라델피아에 온 한 노부부가 하룻밤을 머물고자 허름한 호텔을 찾아들었습니다. 도시의 축제 때문에 그 호텔에도 빈방이 없었습니다. 이때 종업원이 노부부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객실을 모두 다 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늦은 시간에 다른 숙소를 찾기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밤 한 시에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거리로 선생님 부부를 내보낼 수는 없군요. 그러니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라도 쉬었다 가시면 어떨까요?”

노부부는 너무나 고맙게 생각하며 그 종업원의 방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방값을 내면서 노부부의 남편이 종업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호텔주인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그런 호텔 하나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종업원은 농담으로 여기고 빙긋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인 1876년, 그 종업원은 비바람 치던 날 밤에 만났던 노부부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초청장과 함께 뉴욕 왕복 기차표가 동봉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뉴욕을 찾아갔고, 그를 초청한 노신사는 뉴욕 5번가 34거리로 가서 하늘 높이 솟아있는 새 빌딩 하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건물은 무려 1,900개의 객실을 갖춘 거대한 호텔이었습니다. 노인은 그 종업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자네에게 운영해보라고 지어 주는 호텔일세.”

단 한 번의 친절로 3층짜리 허름한 호텔 야간 종업원이었던 그가 이제 1,900개의 객실을 갖춘 뉴욕 한복판 호텔 지배인이 된 것입니다. 그에게 은혜를 갚은 노인은 ‘존 제이콥 아스터’라는 월토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경영자였습니다. 그 종업원의 이름은 ‘조지 C 볼트’입니다. 그는 원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첫 총지배인이 되었고 나중에 ‘호텔왕’으로 불렸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친절을 베풀기 위해 자기 방을 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친절은 분명 자기에게는 불친절입니다. 자기에게 친절하면 남에게 친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친절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도 이웃입니다. 자기가 방에서 편안히 쉬면서 손님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아주 가혹하여지라고 하십니다.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자르고 발이 그러면 발을 자르며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에게 친절한 것은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어쩌면 이는 당신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너무 온화하므로 남들에게 차갑게 대하는 것이라는 질책도 될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는 봄바람처럼 자신에게는 찬 서리처럼.’과 같이 이와 연관된 세상에 떠도는 말이 많습니다. 자신에게 모질수록 타인에게 관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타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에게는 관대한 것입니다. 너무 관대하여 죄를 짓게 되고 그러면 그 죄책감을 무마하기 위해 타인을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절을 베풀어도 그 대상이 보답할 줄 모른다면 어떨까요? 그 친절의 대상이 존 제이콥 아스터였기 때문에 호텔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만약 강도였으면 더 많은 것을 빼앗겼을 수도 있습니다. 친절을 베풀어도 무조건 그 보답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자칫 호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는 그 내용이 명확히는 떠오르지 않아도 금자씨가 13년 동안 감옥에서 친절을 베풀어 그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복수를 도와준다는 것쯤은 기억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절을 베푸는 동안은 금자씨 자신에게는 가혹한 감옥생활이었습니다. 자신이 편하면서 친절을 베풀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반면 금자씨에게 복수를 당하는 백선생은 누구에게도 불친절했기에 자신을 도와줄 친구가 없었습니다. 물 한 잔도 줘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친절은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친절을 베풀어야 끝이 좋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친절할 것인지, 이웃에게 친절하기 위해 나에게 불친절해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기 복수를 위해 의도적으로 한 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수의 맛은 짜릿하지만 결국, 금자씨를 도와준 인물들은 살인자의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친절을 베풀면 사탄과 한패가 됩니다. 해적선에서 친절을 베푼다고 그것이 선행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절대 친절을 베풀어서는 안 되는 게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자아(ego)입니다. 예수님은 타인에게는 관대하지만, 자신에게는 혹독하여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나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되어야만 친절이 가능한 이유는 나도 하나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나에게 그 친절을 다 베풀면 이웃에게 물 한 컵 줄 힘도 사라집니다. 

내가 친절을 베푸는 자아는 영원한 뱀입니다. 뱀이 나에게 어떤 보상을 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자아를 뱀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적당합니다. 해적선에서의 친절은 그냥 해적질의 일부일 뿐입니다. 자아에게 친절하여 베푸는 친절은 받으면 안 됩니다. 나를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뱀에 친절하기 위해 베푸는 선악과를 먹어 공범이 되었습니다. 

죄를 이길 줄 모르는 사람은 자아와 사탄의 유혹에 친절한 사람입니다. 자아는 자기가 받은 친절을 더 큰 갈증으로 되돌려 줍니다. 어리석은 친절은 우리를 죄와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사실 이웃도 자아가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 한 컵의 친절을 베풀 때도, 나를 위해서거나 이웃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드리는 친절만이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과 이웃도 뱀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친절을 투자합시다. 예수님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친절을 온전한 친절로 되돌려 주시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죄짓는 자의 친절을 받거나 그에게 친절하면 그것은 서로의 죄를 무겁게 할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삶에 적당히는 없다.

 

스파게티를 좋아해서 가끔 직접 해 먹습니다. 주로 혼자 해 먹는 것이기에 1인분만 하면 되는데, 사실 그 양 조절이 쉽지 않더군요. 스파게티면 봉지 뒤쪽에 1인분을 알려 주는 동그라미에 맞추면 1인분이라고 하는데 그 양을 보면 너무 적어 보입니다. 실제로 약간 부족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줌 더 넣어서 삶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산더미처럼 불어난 면의 양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적당히 1인분’은 제게 너무 조절하기 힘든 양입니다. 
 
‘적당히’라는 말의 모호함으로 일상 안에서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적당히’입니다. 그러나 ‘적당히’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냥 부족하거나 반대로 많은 것이 더 편합니다. ‘적당히’가 정답처럼 생각되면 ‘대충’하게 될 뿐입니다. 
 
삶에 적당히는 없습니다. 주님의 일도 '적당히'가 안 됩니다. 늘 최선을 다해야 할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적당히 대충해서 따르는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적당히'가 아닌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따르라고 하십니다.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시지요. 손이 죄짓게 하면 그 손을 잘라 버리라고 합니다. 또 발이 죄짓게 하면 역시 잘라 버리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눈이 죄짓게 하면 그것을 빼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적당히’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까? '적당히'가 아닌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삶도 ‘적당히’에서 멈추고 맙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같은 편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도 주님의 뜻을 따른다면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막으려고 했던 제자들의 뜻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함께 사랑의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가야 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사랑의 길을 어떻게 실천하면서 걸어가고 있었을까요? 적당히, 대충이라는 모호한 말이 아닌, 최선을 다하는 확실한 우리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은 사람을 치료한다. 사랑을 받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 칼 메닝거

 

 

훈수는 그만!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옆에서 훈수를 두면 당사자의 기분은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특히 상대편의 훈수를 둬서 불리한 상황이 되면, 내 편이 없는 것 같아서 더 기분이 안 좋습니다. 
 
바둑이나 장기만이 아닙니다. 음식 먹을 때도 훈수 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소고기를 구울 때 땀만 나면 뒤집은 뒤 바로 먹어야 한다는 사람, 돼지고기는 땀이 나기 전에 뒤집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사람, 샤브샤브 먹을 때 야채는 숨만 죽으면 바로 먹어야 한다는 사람, 생선회를 고추장 찍어 먹는다고 먹을 줄 모른다고 면박을 주는 사람 등등…. 
 
음식에 대한 훈수도 이렇게 많습니다. 그런데 음식에만 그럴까요? 남의 삶에 대한 훈수 역시 차고 넘치는 것 같습니다. 남의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물론 상대방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데서 감사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간섭으로는 관계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존경을 받는 사람은 훈수를 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좋은 삶을 직접 살아서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훈수쟁이가 되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울 수 없고 잘라내지 않고서는 나갈 수 없다.

 

"막지 마라." (마르 9, 39) 

아무도 말하여 주지 않던 말씀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신다. 죄가 있기에 용서가 있고 죄가 있기에 회개가 있다. 끊어내야 할 것이 참 많은 우리들 삶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다만 죄를 잘라내라고 말씀하신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은총과 결단의 새로운 삶이다. 막을 수 없는 결단과 실천의 변화된 삶이 우리들 복음이다. 

잘라 내고 빼어 던져 버리는 결단과 실천의 삶이 회개이다. 진리에 눈을 뜨는 회개이다. 막을 수 없는 진리의 힘찬 결심이 시작되었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들 삶이다. 진리를 만나는 은총은 우리 삶에서 시작한다. 

참된 진리는 구원을 얻게한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기쁘게 걸어가신다.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울 수 없고 잘라내지 않고서는 나갈 수 없다. 버려야 할 것은 악습이며 맞이해야 할 것은 우리의 주님이다. 

주님의 사랑은 막을 수 없으며 참된 믿음은 회개를 미루지 않는다. 구원을 막을 수 없다. 구원의 기쁜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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