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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9월 23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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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21년 9월 23일 (목)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진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받았습니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습니다.

 

 

✠ 오늘 제1독서

 

하까이 예언자는 주님의 집을 지으라는 만군의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 오늘 복음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9월 23일 (목)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하까 1장 1-8절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리라.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충실한 이들의 모임에서 찬양 노래 불러라.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모시고 기뻐하고, 시온의 아들들은 임금님을 모시고 즐거워하여라.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춤추며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 손북 치고 비파 타며 찬미 노래 드려라.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은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그분께 충실한 모든 이에게 영광이어라.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9장 7-9절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비오를 기리며 받아 모신 천상 음식으로 저희가 힘을 얻어 믿음을 온전히 간직하며 구원의 길을 충실히 걷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23일 (목)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23일 (목)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23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왜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현대인의 많은 질병 가운데 하나가 신경 정신 의학에서 말하는 불안 장애나 공황 장애, 강박 장애 등 불안과 스트레스 관련 질환이라는 연구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 이웃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또는 내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일 수도 있습니다.

외부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요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함께 나누고 이해하며 사랑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유독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충돌이 많다면, 스스로 성찰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성숙시킬 수 있습니다. 이기주의자나 배려 없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처럼 “하느님도 당신을 사랑하시는데, 왜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까?”라는 물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는 헤로데를 만납니다. 일찍이 요한을 죽인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헤로데는 자기 자신도 요한도 몰랐기에 예수님도 어떤 분이신지 모릅니다. 하느님과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에 두려움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헤로데와 같이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아 자신을 사랑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열린 존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의 집의 파괴자들

 

오늘 독서는 하까이서입니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 상태인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집을 다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나무라는 것이 오늘 얘기인데 프란치스칸인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특히 지난 9월 1일부터 프란치스코 축일인 10월 4일까지 교황님이 제정하신 "창조의 시기(Season of Creation)"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가 받은 소명은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허물어진 주님의 집이 무엇이냐 그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처음에는 그야말로 허물어진 성당들이었지요. 

그러나 프란치스코에게 허물어진 주님의 집은 고작 성당건물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이고, 더 나아가 가톨릭 신자나 그리스도교 신자뿐 아니라 이슬람 신자나 무신론자까지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거라고 깨달음이 확장되었지요. 

그런데 깨달음의 확장과 주님의 집의 확장은 이제 인류를 넘어섭니다. 프란치스코의 형제애는 지구뿐 아니라 우주 끝까지 가고, 인류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갑니다. 

프란치스코는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사명을 받을 때 "가서"라는 말은 지나치고 "나의 집을 고쳐라."는 말만 중시했는데 깨달음이 확장되면서, 주님의 집을 고치되 "가서" 고치라는 말씀으로 알아 듣게 되었고, 그래서 형제애는 우주까지 그리고 피조물에게까지 가게 되었으며 주님의 집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함께 이루는 것이 되었지요. 

그래서 교황 프란치스코도 우리가 사는 지구를 <공동의 집>이라고 하고, 이 공동의 집을 우리가 함께 잘 가꾸어야 한다고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찬미받으소서>는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 <Laudato Si>에서 가져온 거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공동의 집을 보살피기는커녕 오히려 마구 파괴하고, 프란치스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에 대해 별 의식이 없이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하까이서처럼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그런데 우리도 그리고 프란치스칸들도 다른 환경 파괴자들처럼 공동의 집을 파괴한다는 말에 '내가 언제 그랬냐?'고 발끈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분들은 더 그러실 겁니다. 

이해합니다. 그래서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지구를 살리지 않으면 파괴하는 것이고, 그런 적극적인 의식 없으면 파괴하는 것이며, 깨달음과 의식이 프란치스코처럼 모든 피조물에게 가지 않으면 파괴하는 것이고, 소비를 지금보다 현격하게 줄이지 않으면 저를 포함하여 모두 파괴자들이라고 저는 오늘 말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세례자 요한은 죽이면서 예수님은 만나려는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복음을 전할 때 임금을 회개시키면 그 나라 전체가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보려는 헤로데는 무시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먼저 세례자 요한을 죽임으로써 당신의 초대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일까요? 세례자 요한을 죽이며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교회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만나겠다는 이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세례자 요한입니다. 

예를 들면 나주 율리아는 교회는 거부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만나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죽이는 이들을 절대 만나주지 않으십니다. 

혹은 냉담자들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면서 힘들 때면 왜 자신들도 신앙인인데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출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머물지 않으면서 당신이 주시는 은총을 기대하는 이들을 만족시키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들을 둔 40대 남편이 희귀암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은 암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저기 전이된 암은 그 뿌리가 깊어서 면역항암제를 투여해도 줄어들지 않았고 방사선 치료로도 더 커지기만 했습니다. 

1년 동안 미국에서 연수하던 김범석 교수가 9월에 돌아온다는 말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의사가 큰 등산 가방을 메고 뛰어오면서 “방법이 있어요! 방법이!”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사진으로만 본 얼굴이었는데도 꿈에서는 너무 생생했습니다. 

1년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보고 더는 희망이 없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미국에서 보고받던 것보다 훨씬 안 좋은 상태였습니다. 항암제도 말을 듣지 않고 방사선 치료도 무용지물인 상태에서 더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만 오래전부터 눈 빠지게 기다렸다는 가족의 기대를 갑자기 무너뜨리기 뭐해서 항암제는 계속 투여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고 외부로 드러난 암 덩어리의 크기를 매일 스마트폰으로 찍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커지는 것을 보며 그들도 마음을 접을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며 나름대로는 모진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3주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 환자를 보고 의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이므로 의사로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습니다. 

“참 기적 같은 일이네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암이 반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암은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환자의 아내는 의사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기다렸던 선생님께서 군더더기 없이 말씀해주신 첫 회진 덕분에 이렇게 감사의 편지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날 ‘모진 말’을 하셨다고 했는데 아니었어요. 온 가족이 엉뚱한 기도로 새는 힘을 모아 더 격려하고 기도하며 단단해졌어요.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의도를 그때도 지금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 꿈에 나타나서 외치신 ‘방법’이 정말이었다는 게 저희 가족의 생각입니다.”

특별한 처방도 한 것이 없고 이전에 해오던 치료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가족의 믿음이 큰 역할을 했을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의사도 그 가족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형식적으로나마 치료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구구절절 쓴 편지 곳곳에서 남편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새삼 이들을 죽음의 나락에서 건져낸 것은 의사의 처방이 아니라 면역항암제가 아니라 그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암 투병은 환자도 가족도 모두 지치는 일입니다.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이 이어져가다 보면 그나마 남아있던 사랑도 남루해지기 쉽고 희망도 쉽게 잃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긴 투병의 모든 끝이 상처만 가득한 폐허로 남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니 희망 없는 속에서도 그 사랑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암 덩어리가 줄어든 것만큼이나 기적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왜 그 가족의 믿음을 직접 들어주시지 않고 1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운 의사를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그리고 별다른 처방도 아닌 그동안 맞아왔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던 면역항암제 처방을 내리는 의사에게 순종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그 의사를 통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믿음은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나의 사랑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보이지 않는 분을 믿는 것은 거짓입니다. 따라서 더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파견자인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당신을 보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를 믿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눈에 보이는 교회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교회는 곧 세례자 요한과 같습니다. 교회를 무시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현시대에 헤로데와 같이 헛되게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김용태 마태오 신부는 성 김대건 신부 4대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순교자 집안의 후손답게 살 수 없는 처지였고, 당연히 형들이 모두 사제가 되다 보니 자신도 신학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제품을 받기 직전에 자신은 김대건 신부님처럼 순교할 자신이 없어서 사제직을 포기할까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성체조배를 하며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는 사제품을 받아들입니다. 빛과 성령으로 둘러싸이는 그 체험은 마치 기적과도 같이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힘을 주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한 믿음은 항상 보이는 파견된 자에 대한 믿음으로만 증명됩니다. 그 파견된 교회 안에 머무르다 보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파견된 것에 대한 믿음은 파견하신 분에 대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보이는 것을 무시하면 보이지 않는 것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눈에 보이지 않는 삶.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외부 식당에 가는 것이 꺼려집니다. 그래서 신부 모임이 있으면 사제관에서 고기를 구워 먹거나 몇 가지 요리를 직접 해서 함께 먹곤 합니다. 
 
얼마 전에도 신부 몇 명이 갑곶성지를 찾아왔고, 이 신부들을 위해 양고기 요리를 했습니다. 신부들의 만족도는 아주 높았고, 너무 맛있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맛있는 양고기를 어디에서 샀어?” 
 
좋은 양고기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실 굽기 전에 미리 해놓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핏물을 제거하고 고기 손질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올리브기름과 소금 그리고 마늘 다진 것을 올려놓아 밑간한 뒤에 랩에 싸서 냉장고에 5시간 정도 숙성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 뒤에 만족도 높은 양고기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신부들은 이런 전 단계가 있는지를 전혀 모릅니다. 단순히 고기 상태만으로 이런 양고기 요리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전 단계 없이는 만족도를 높일 수도 없고 맛을 제대로 낼 수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면서 결과만을 말하는 우리의 모습을 삶 안에서 종종 발견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해 지금을 잘 사는 것이 아닐까요? 
 
헤로데 영주가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디아의 춤 값으로 아무런 죄가 없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내어 준 커다란 죄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 했던 이유는 눈에 보이는 체면 때문이었습니다. 체면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헤로디아가 춤추는 것을 보고서 사람들 앞에서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헤로디아는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고, 자신의 체면 때문에 그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많은 사람 앞에서 했던 약속을 스스로 철회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유한한 사람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체면은 그 순간에 손상된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하느님과의 관계가 손상된다면 다시 이를 회복하기란 너무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것을 바라보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황하며 두려워하는 헤로데 영주의 삶이 아닌,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모두를 믿지 말고 가치 있는 이를 믿어라. 모두를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고, 가치 있는 이를 신뢰하는 것은 분별력의 표시이다.

- 데모크리토스

 

 

물고기도 우울증에 걸릴까?

 

책을 읽다가 ‘물고기도 우울증에 걸릴까?’라는 내용의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하기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호르몬 검사, 과학적 연구와 행동 관찰로 물고기 우울증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우울증과는 다르지만,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활기가 떨어지고 수조 상부에서 지내던 어종이 수조 바닥 쪽에서만 돌아다니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학자들은 물고기도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짐작한답니다. 
 
자극이 없을 때 이런 증상을 보였습니다. 사람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자극이 있을 때 우리는 활기차게 생활하게 됩니다. 이 자극은 나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도 있지만, 정반대로 부정적 감정으로 가져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극 역시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 없는 삶을 원하십니까? 이런 삶은 주님께서도 원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극이 없으면 정신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도 나를 위해, 즉 나의 성장과 건강을 위해 필요합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는 새로운 시작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복음은 참된 만남이다.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끌림과 울림 사이에 깊어가는 가을이 있다. 존재와 존재의 참된 만남이 참으로 중요한 우리들 관계이다. 복음은 참된 만남이다. 헛소문은 빠르게 사그라들지만 참된 만남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된다. 

참된 만남이 삶의 참된 본질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바로 기적이다. 주님은 사람 사이에서 언제나 함께 살아계신다. 만남은 열림이 되고 관계는 행복이 된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변화이다. 이와같이 변화는 삶의 전환이며 삶의 회개이다. 오상의 비오 사제는 자신의 고유한 길을 뜨겁게 걸어간다.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이 변화된 생활에 있음을 가르쳐준다. 

성찰과 성장은 생활의 변화로 드러난다. 비오 사제를 통해 수도자의 소명 신앙인의 소명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소문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붙잡고 사는 복음의 생활이다. 

주님과 함께 생활하는 우리들이다. 복음과 생활은 부활과 십자가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만남이 선물이면 생활은 만남의 사랑이다. 이제 우리가 사랑할 때이다. 생활에서 복음은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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