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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
21년 9월 22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에즈라는 주 하느님께서 종살이하는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우게 해 주셨다며 기도를 드립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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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에즈 9장 5-9절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저녁 제사 때에, 나 에즈라는
5
단식을 그치고 일어나서, 의복과 겉옷은 찢어진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 주 나의 하느님께
6
말씀드렸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
7
저희 조상 때부터 이날까지 저희는 큰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죄악 때문에 오늘 이처럼, 임금들과 사제들과 더불어 저희가 여러 나라 임금들과 칼에 넘겨지고, 포로살이와 약탈과 부끄러운 일을 당하도록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8
그러나 이제 잠깐이나마 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하여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눈을 비추시고, 종살이하는 저희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셨습니다.
9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페르시아 임금들 앞에서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우고 그 폐허를 일으키도록 해 주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해 주셨습니다.”
화답송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벌을 내리시지만, 자비를 베푸시고, 깊은 저승으로 내리기도 하시지만, 무서운 파멸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그분 손에서 벗어날 자 아무도 없으리라.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너희를 민족들 사이로 흩으셨지만, 바로 거기에서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셨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앞에서 그분을 높이 받들어라. 그분은 우리 주님, 우리 아버지, 영원하신 우리 하느님이시다.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이제 너희에게 베푸신 것을 보고, 소리 높여 그분을 찬양하여라. 의로우신 주님을 찬미하고, 영원하신 임금님을 높이 받들어라.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나는 이 유배의 땅에서 그분을 찬양하고, 죄 많은 민족에게 그분의 권능과 위엄을 드러내리라.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 죄인들아, 돌아와 그분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여라. 그분이 너희를 받아들이시어, 자비를 베푸시지 않겠느냐?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복음
루카 9장 1-6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3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성체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니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삶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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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9월 22일 (수)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필요없는 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열두 제자에게 주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하고 당부하십니다.
가까운 곳으로 잠깐 여행을 갈 때도 짐이 많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이고 휴대폰 충전기, 화장품 등등 …….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져갔다가 꺼내지도 않고 도로 가져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준비성이 투철한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철저하게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생각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여정은 우리의 여행과는 분명히 다르고, 세상 것에 애착을 보이면 이룰 수 없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하느님의 은총만을 의지하라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필요 없는 짐일 뿐입니다. 결코 제자들이 잘나서 예수님께 뽑혔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 주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오로지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힘은 주님을 따라 살아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이웃과 나눔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후회와 참회 사이에서 나는?
오늘 독서는 에즈라기이고 복음은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에즈라 예언자는 단식을 마치고 나서 제사를 드리러 하느님 앞에 나와 먼저 참회를 하고 이어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찬미합니다.
그런데 독서와 복음을 읽고 난 뒤 어리석게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에즈라처럼 단식과 참회를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복음의 제자들처럼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좋을까?
우리는 둘 다 살아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참 어리석지요. 그런데도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요즘 제가 종종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10대에서 20대까지는 반성과 참회를 많이 했는데 이때 저는 거의 매일 반성과 참회가 주조인 일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반성과 참회는 상당히 자기 비하적이었습니다.
이런 제가 30대를 지나 40대와 50대가 되자 반성과 참회는 현저히 줄고, 피정 지도니 강의니 북한 선교와 해외 선교와 같은 복음 선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일기는 가끔가다 쓰는 정도였지요.
그러다 지금은 그마저도 아예 쓰지 않고 있으며 대신 영적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매일 복음 나누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부족하지요.
그런데 세상을 복음화하려면 먼저 자기 복음화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회개와 참회 없이 어떻게 자기 복음화를 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도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며 하신 말씀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거였잖아요?
그러니 가까이 와 있는 하느님 나라에 나도 들어가고 너도 들거가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믿어야 하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 복음이 아닌 사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참행복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것부터 깨닫고, 뉘우치고, 돌아서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저는 에즈라의 참회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회개悔改를 위해 꼭 참회懺悔를 해야 하나? 후회後悔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왠지 참회하기 싫었던 것이고 그래서 참회가 아닌 후회 정도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한 것인데 참회와 후회가 어떤 차이가 있기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요?
제 생각에 참회와 후회, 둘 다 과거 자신의 삶이나 행위가 잘못 되었음을 인정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까지는 같지만 그런데 후회는 후회로 끝나고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 데 비해 참회는 진정한 뉘우침이고 그래서 반드시 회개로 이어지지요.
그리고 둘 사이의 또 다른 차이점은 관계성 여부입니다. 후회는 혼자서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참회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뉘우침이며 그래서 죄 의식을 반드시 동반하고 그 앞에서 참회를 합니다.
그런데 이 참회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칠 수가 있고, 하느님과의 관계까지 가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야를 죽인 다윗이 우리야 가족 앞에서 참회할 수 있는데 다윗은 굳이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고 하느님 앞에서 참회를 합니다.
아무튼, 후회는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고, 부정적인 감정일 뿐 진정한 뉘우침이 아니기에 회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참회는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 사랑을 부수고 깬 것이 너무도 마음 아파 그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래서 회개로 이어집니다.
이런 후회와 참회 사이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기를 이긴 사람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산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병을 고치는 권한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재물에도 집착하지 말고 애정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집착이 영적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줍니다. 따라서 루카 복음의 이 말대로 하면 병을 고치는 능력과 복음을 전하는 능력은 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능력이 부족한 상태로 말로만 복음을 전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보다 사람의 존재를 먼저 믿으려 합니다. 진실한 사람에게서 진실한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여자 임금이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당나라의 측천무후입니다. 측천무후는 훌륭한 남자를 늘 곁에 두고 국정에 관한 의견을 듣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주위의 눈총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좋은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당대에 덕망 높기로 유명한 두 스님을 궁궐로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한 스님은 당시 국사(國師)로 있던 ‘충국사’였고 또 한 스님은 ‘신수’(神秀) 대사였습니다. 여왕과 함께 있으려면 조금이라도 여색을 탐해서는 아니 되었기에 측천무후는 두 스님 중 여색에 초연한 스님을 고르려는 것이었습니다.
“스님들도 때로는 여자 생각이 나십니까?”
측천무후가 두 스님을 떠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충국사는 “우리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라고 단호해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신수 대사는 “몸뚱이가 있는 한 그런 생각이 없을 수 없겠지만 다만 방심치 않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두 번째 테스트에 들어갔습니다. 두 스님을 큰 목욕탕으로 안내하여 목욕을 시킨 다음 아름다운 궁녀를 시켜 두 스님의 때를 닦아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래놓고 자신은 목욕탕 꼭대기에 앉아 두 스님을 몰래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절대로 여색에 동하지 않는다던 충국사는 몹시 흥분해 어쩔 줄 몰라 했고 신수 대사는 여여(如如)하여 조금도 달라짐이 없었습니다. 측천무후는 “물에 들어가니 길고 짧음을 알겠더라(入水見長).”라는 시를 짓고 이후 신수 대사를 곁에 두고 늘 국정을 논하였습니다.
[출처: ‘이 책을 읽으면 유능해지고 부자가 됩니다’, 유튜브 채널, ‘북올림’]
사람이 믿을 수 없다면 말은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리고 성덕의 길고 짧음은 실제 그런 상황에 다다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사람은 자신과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싸워본 적이 있다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이길 수 없음을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재물을 아예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재물이 있으면 그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며, 이집 저집으로 거처를 옮기지 말라는 말도 역시 더 좋은 거처나 사람을 찾기 위해 신경을 분산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믿지 못할 사람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이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나의 말도 믿게 됩니다.
영국이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때는 엘리자베스 1세 시기라고 합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눈치 보며 살아야 했던 영국을 무려 40년 동안 세계 최강국으로 만든 여군주가 엘리자베스입니다. 그녀는 특히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인이 영어를 배워야 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주는 백성의 신임을 얻어야 하거나, 정략결혼 등을 통해 적을 만들지 말아야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이전의 대부분 왕은 정략결혼을 통해 세상과의 타협을 추구하였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로 재혼을 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을 등졌습니다. 심지어 재혼을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인 앤 볼린을 참수하였고, 6번의 결혼 동안 또 다른 아내도 참수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 세 번째 아내에게 아들을 얻었기에 이것도 핑계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로부터 딸로도 인정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 사람과 나누었던 편지가 있었고 마지막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고도 합니다. 그녀는 결혼하는 대신 독신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짐은 국가와 결혼했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당시 무적함대를 무찌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백성을 하나로 집결할 힘이었습니다. 수적 우세에도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군인들을 보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을 승리로 이끈 엘리자베스 여왕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그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꼭 종교 안에서만 자신을 절제하는 이가 성령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디에나 해당하는 예외가 없는 규칙입니다. 육을 살리려면 영은 죽고 영이 살면 육이 죽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진정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끊어야 하는 것을 끊습니다. 영과 육은 반대입니다. 그러니 육을 끊는 작업을 죽을 때까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믿게 될 것이고 나를 믿게 되면 내가 전하는 복음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다음 하는 말들은 허공의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삶
저는 스포츠 경기를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몸으로 직접 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체력도 안 되고 또 여건도 되지 않아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응원하는 팀이 생겼습니다.
며칠 전에도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여유 있게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실수가 계속 터져 나오면서 역전되어 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냥 신경질적으로 텔레비전 전원을 껐습니다.
원래 어떤 경기든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길 수도 있고 반대로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졌다고 해서 신경질을 내는 것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나의 욕심대로 흘러가야 한다는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불평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을 내려놓으면 삶 자체를 즐길 수가 있습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면 세상의 눈으로는 어렵고 힘든 삶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서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히 그렇게 해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주님의 말씀은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글쎄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합니다.
조그마한 유혹에도 금방 흔들리는 제자들이 아닙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처음으로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러 나가니까 부족함 없이 챙겨줘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서 주신 권한만을 간직할 것을 명하십니다.
세상의 관점이 담겨 있는 자기 뜻을 내려놓고 대신 주님의 뜻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주님께서 주시는 권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든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줄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전교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얼마나 많은 청원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까? 그런데 정작 가장 필요한 주님의 뜻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은 청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청하면서, 점차 주님을 내 삶에서 제외합니다.
만족의 삶이 아닌, 불평불만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이 아닌, 어렵고 힘든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만족의 삶은 주님의 뜻을 품을 수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존경이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개인임을 아는 능력이다.
- 에리히 프롬
일상 안에서의 감사
저는 오랫동안 비염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이 비염으로 인해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마스크까지 써야 하니 미칠 지경이었지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만 뻥 뚫리면 정말로 행복할 텐데….’
이렇게 코가 꽉 막힌 날은 1년 중에 며칠 되지 않기에 위와 같은 생각을 자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코가 막혔을 때 비로소 코의 뚫림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일상 안에 행복한 일이 전혀 없을까요? 아닙니다. 행복해서 감사할 일이 너무 많은데 이를 보지 않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전신 마비로 유일하게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어서 눈의 깜빡거림으로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을 쓴 장 도미니코 보비는 말합니다.
“끊임없이 입속에 과다하게 고이다 못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정상적으로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기분일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침을 삼키는 것도 행복의 이유가 됩니다.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 가장 행복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행보다는 행복의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아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회복시켜 살게하시는 하느님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루카 9,6)
새로운 날이다. 돌보시는 주님께 드리지 못할 것은 없다. 사람과 함께 하시는 복음의 주님이시다. 우리가 아프면 예수님께서도 아프시다. 끝이 없으신 지극한 사랑이다. 못난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고쳐주신다.
묶이고 갇힌 우리들 삶을 복음으로 활짝 열어주신다. 치유없이 우리는 성장하지 않는다. 한계와 결핍이 주님의 치유를 만나는 은총이 된다. 주님의 치유는 사랑이다. 참된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올바른 삶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사람들을 돌보시는 복음이다. 고통을 치유하는 복음을 우리는 오늘도 만난다. 복음은 새로운 차원의 하느님 사랑을 만나게한다.
회복시켜 살게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복음 앞에 우리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연약함을 봉헌하는 새로운 날이다. 온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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