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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
21년 9월 18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킬 것을 권고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뜻을 풀이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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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티모 6장 13-16절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사랑하는 그대여,
13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대에게 지시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15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16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화답송
환호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라.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환호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라.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환호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라.
감사하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하며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 찬미하여라. 환호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라.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환호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라.
복음
루카 8장 4-15절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그때에
4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6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9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1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12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3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이끄시어 저희가 제 생각대로 살지 않고 그 은총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18일 (토)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18일 (토)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18일 (토)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신비’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자체이시며, 당신 스스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신 분이시고, 그 신비를 몸소 지니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예수님께 달렸으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길에 떨어진 경우처럼,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가 버려 올바로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위에 떨어진 말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짧은 인생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상황과 마주하며 울고 웃고, 때로는 낙담하고, 때로는 희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좋은 토양을 가지고자 마음의 밭을 잘 가꾼다면,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간직하고 신앙의 항구함을 간직하는 방법을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과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 장애의 중증 정도는?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고 외치셨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비유를 듣고 오늘은 "외치셨다."는 말씀이 유독 마음에 꽂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외치셨을까요? 외치지 않으면 못 듣기에 그러셨을까요? 못 듣는 것입니까? 안 듣는 것입니까?
어법상 못 듣는 것은 능력 부족인 것이고 안 듣는 것은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안 듣는 것 그러니까 의지 부족이거나 의지 없음이기에 안 듣는 것이 더 문제겠습니다.
물리적으로 얘기하면 못 듣는 것은 귀에 장애가 있는 것이고, 안 듣는 것은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는 것이니 안 듣는 것이 더 문제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외치시며 들으라는 것은 당신의 말씀이고,ㅈ하느님의 말씀이니 영적인 귀가 있으면 들으라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귀는 멀쩡이 뚤려있지만, 영적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영적 장애를 고치고 당신 말씀을 들으라고 외치시는 것인데 그렇다면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영적인 장애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오늘 주님께서 예로 드신 세 가지인데 그중 첫 번째가 장애가 제일 심한 불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씨가 길에 떨어진 것을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풀이하십니다.
믿지 못함은 영적인 장애 중에서 제일 중증의 장애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교만과 제일 관련이 클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하느님도 안중에 없기에 하느님 말씀을 무시하고 길바닥에 내다 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의 성경 책을 내다 태워버리는 것처럼.
두 번째 영적 장애는 믿기는 하지만 시련에 믿음이 흔들리는 경우입니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두 번째 장애는 불신은 아니지만 약신弱信입니다. 약신이란 물론 제가 만들어낸 말인데 약한 믿음이고, 약한 믿음은 시련에 약한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되는, 하느님을 믿겠다고 세례를 받긴 했는데 집안에 우환이 닥치거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점쟁이한테 갔더니 예수를 믿어서 그렇다는ㅈ말을 들으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그런 믿음입니다.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순교와 배교로 갈리게 되는데 박해 곧 시련은 이렇게 순교와 배교로 갈리게 하지요.
그렇기에 하느님께서는 종종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시는데 시련의 때에 우리는 이 시련의 의미를 영적으로 깨닫고 이 시련을 오히려 영적 건강과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영적 장애는 가시덤불 속의 믿음인데 제 생각에 욕심 때문에 그리된 것이고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풀이하십니다.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식 걱정과 같은 것은 사랑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욕심이 많을 때 걱정이 많은 법이고, 쾌락도 육적인 욕구와 만족을 채우려는 것이니 우리는 오늘 수없이 걱정하며 믿는 나는 아닌지 성찰하고, 욕심에서 비롯된 걱정들을 가난으로 비워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고, 더 넓게는 내 영적 장애의 중증 정도는 어느 정도인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신앙인과 제자의 차이: 믿으려는 사람과 알려는 사람의 차이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차별대우하시는데, 군중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해석’해 주십니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단 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비유는 항상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일종의 ‘법칙’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밭에 보물이 묻혀 있다면 그 밭을 사기 위해 모든 재산을 판다는 것이라든지,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끌어낼 비유는 어떤 효과를 줄까요? 그런 법칙을 만든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만듭니다. 집단 카드섹션 하는 것을 보면 그 안에 어떤 법칙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그 법칙을 만든 사람이 있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설’(說)을 믿는 사람과 ‘론’(論)을 믿는 사람, 그리고 ‘법’(法)을 믿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설을 믿는 사람은 어떤 개인의 주장을 믿는 것이고, 론을 믿는 사람은 어떤 집단의 이론을 믿는 것이며, 법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지식이고 믿음입니다.
그러나 ‘법칙’만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끕니다. 따라서 ‘비유’는 이런 법칙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을 유일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말씀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먼저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계심을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이치나 법칙은 더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이미 주님이 계심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 이치를 통해 ‘왜?’를 묻습니다. 왜 그런 이치를 깨닫게 하셨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처럼 그 이치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존재를 드러내시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법칙을 통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잘 만들어진 카드섹션만 보며 그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감독한 사람의 의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유를 통해 그 비유를 만든 이를 ‘알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따로 비유 말씀을 설명해주신 이유는 당신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짧은 애니메이션 단편영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제목은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2008)입니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주인공인 여자는 도시에서 가장 싼 집을 구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의 집은 도시의 철거 작업으로 거대한 크레인에 의해 공중으로 들러져 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철거 회사의 파업으로 철거가 중단되어 결국 그녀는 그 공중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바람만 불어도 위태위태한 공중에 들어 올려진 그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고양이로 변해버린 전 남자친구입니다. 사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도시는 온통 고양이들의 세상입니다. 그나마 자신을 찾아오는 유일한 사람인 전 남자친구를 위해 매번 파이를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파이를 먹으면 생선을 구워주는 여자를 생각하고 떠납니다. 또 파이가 먹고 싶으면 다시 찾아옵니다. 여자는 이 관계에서 결국 고양이 남자에게 잡아먹힌다는 내용입니다.
이게 무슨 내용일까요? 달동네로 이사 온 한 여인은 도시에 살지만 도시 사람들과 동화되지 못하는 동떨어진 삶을 삽니다. 도시 사람들은 고양이로 보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줄 때만 다가오지만 언제 할퀴고 달아날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보입니다. 그나마 자신을 찾아오는 유일한 전 남자친구도 욕망에 사로잡힌 고양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남자친구에게 먹히고 맙니다. 자신도 이젠 도시의 고양이들 일부가 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과 벗어난 존엄성 있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돈과 성욕, 힘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도시에 살면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도 그런 고양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매우 공감이 가는 애니메이션이니 한 번 보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씨네몽땅’에서 이 영화를 논평했습니다. 제목이 ‘욕망의 도시에서 가장 싼 집에 사는 여자가 겪게 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이 작품의 감독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결국, 이 작품은 감독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이 작품은 박지연 감독이 혼자 서울에 정착한 지 7년이 되었던 2008년 제작한 애니메이션입니다. 서울에 살게 된 뒤 도시에 관한 특별한 정서를 갖게 된 감독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내면세계를 이미지화해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냥 박지연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작품을 박지연 감독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단순히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서 박지연 감독을 더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듣는 그리스도의 비유는 제가 하는 강론과 같습니다. 이 묵상들을 들으시는 분들은 비유를 먼저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결국, 묵상들은 제가 저에게 하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 묵상이 좋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부님은 참 솔직해서 좋아요.”
저는 제가 솔직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묵상을 보시는 분들은 묵상을 통해 저를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시는 것이겠지만 결국 당신 자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상할 때 그리스도를 조금 더 알게 되는 것까지 가지 않는다면 아직 군중의 수준에 머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그러나 요한복음은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아는 것’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넘어서서 아는 수준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몸뚱이입니다. 몸만큼 머리를 아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들이어야 그분께서 더 깊은 묵상을 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더 드러내 보이시고 하느님을 더 이해하는 만큼 세상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더 깊은 묵상을 하고 싶으신 분들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여겨 먼저 매사에 그분의 몸이 되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당신에 대해 다 알려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 더 가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체중계에 올라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 몸무게 숫자의 앞자리가 바뀌기 직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큼은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하루 2만 보 이상을 걷고, 무거운 덤벨과 바벨을 들면서 근육운동도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운동했어도 체중의 변화가 별로 없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폭식을 하면 앞자리가 휙 바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예 ‘단식’을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몸이 좋아졌는데?”라고 말씀하십니다. 체중을 크게 줄이지는 못했지만, 몸이 좋아졌다는 말에 다시 힘을 얻어 계속해서 운동합니다.
지금의 몸을 갖는데 거의 6개월이 걸렸습니다. 6개월 꾸준히 하니 조금 티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몸의 근육을 단련하는 것도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마음의 근육은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와 묵상, 미사, 사랑의 실천 등을 통해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습니다. 마음의 근육이 단련되어야 그 크신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좋은 씨를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씨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를, 길,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으로 표현합니다. 아무리 좋은 씨라 할지라도 길이나 바위, 가시덤불에 뿌려지면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은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 농부는 거름을 주고 땅속에 묻혀 있는 자갈도 골라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으로 변화시킬 우리의 노력은 무엇입니까? 앞서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기도와 묵상, 미사, 사랑의 실천 등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것으로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세상의 돈이나 지위에 연연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백 배의 열매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신앙인이라면 모두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진정한 구원의 큰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선물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켜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용기란 두려움에 대한 저항이고, 두려움의 정복이다.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다.
- 마크 트웨인
어떤 삶을 사는가?
사람은 일반적으로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1. ‘모든 사람이 나에게 빚을 졌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부모의 책임을 강조하고, 하느님께도 당연히 자신에게 다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요구만 하는 사람입니다.
2.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자신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줄 모르고, 또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외면합니다.
3. ‘내가 받은 만큼만 베푼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계산적인 사람으로 소위 ‘빚지고 못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받은 것을 알고 또 받은 만큼 베풀려고 노력합니다.
4.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지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늘 감사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속하는 것 같습니까? 4번 유형이 너무 소극적이 아닐까도 싶지만, 감사의 이유를 찾는 사람이 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지금을 기쁘게 산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4번 유형의 모습이 적극적으로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루카 8,15)
말씀 없이 땅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말씀이 곧 주님이시다. 좋은 땅은 인내를 가르치고 열매는 인내를 먹으며 자라난다. 말씀 안에서 우리 마음을 숨길 곳이 없다. 말씀은 모든 곳에 있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것이지 말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씀은 마음에 늘 목마르다. 우리 마음이란 말씀에 머물러야 할 말씀의 마음이다. 이렇듯 말씀과 결합되어야 할 삶이다.
먼저 우리 마음에서 가장 좋은 말씀을 자라나게 해야 한다. 주님 말씀이 우리 삶을 떠받치고 있다. 말씀이 있어 아름다운 마음이다. 말씀과 마음은 통해야 한다. 우리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말씀이시다.
마음을 빼앗긴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갈 때이다. 따뜻한 마음은 가을 햇살보다 더 귀하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말씀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말씀의 인내로써 말씀의 열매를 맺어야 할 우리들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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