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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
21년 9월 14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Feast of the Exaltation of the Holy Cross)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했습니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이 축일이 고정되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불평하는 백성에게 불 뱀을 보내 벌하시지만, 구리 뱀을 만들게 하시어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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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민수 21장 4ㄴ-9절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4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화답송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내 백성아, 나의 가르침을 들어라. 내 입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가 입을 열어 격언을, 예로부터 내려오는 금언을 말하리라.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죽이시던 그때서야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다시 돌아와, 하느님이 그들의 바위이심을 기억하였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그 입으로 그분을 속이고, 혀로는 그분께 거짓말을 하였네. 그분께 마음을 굳건히 두지 않고, 그분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네.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그분은 자비로우시어,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멸망시키지 않으셨네. 당신 분노를 거듭 돌이키시고, 결코 진노를 터뜨리지 않으셨네.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복음
요한 3장 13-17절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생명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저희가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14일 (화)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14일 (화)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14일 (화)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명백한 표시이며 증거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필리 2,8)
예수님의 죽음은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며’, 그분을 드높임은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요한 12,28 참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골고타 언덕은 믿는 이들에게 무지막지한 형벌의 장소가 아닌,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수고와 수난을 받아들이신 성자의 사랑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이 사랑의 장소는 구약에서 하느님과 모세를 믿지 않음으로 죄를 지어 죽음에 다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생명을 얻었듯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용서하시고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시는, 조건 없는 사랑과 생명을 주시는 곳입니다.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마르 10,45)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1코린 1,30).
이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명백한 표시이며 증거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도할 때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사제들은 십자 성호로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 주고, 신자들은 십자 성호로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을 되돌려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의 삶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희생과 사랑을 통한 영광이며,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의 표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죽음이 생명이 되려면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야지만 진짜 죽음이다. 이것은 실패란 실패로 끝날 때 진짜 실패인 것과 같다.
뒤집어 얘기하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실패를 바탕으로 성공을 거두면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실패를 바탕삼아 재기하면 처음 실패는 작은 실패지만 재기를 포기하면 그것이 큰 실패이고 진짜 실패다.
사랑도 실패한다면 사랑을 포기할 때 진짜 실패이기에 내 사랑이 상대에게 거부되는 실패는 작은 실패이고, 내가 사랑을 포기한 그 실패가 진짜 실패요 큰 실패이며,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사랑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축일의 감사가는 이렇게 노래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 나무에서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은 생명이 이 죽음에서 솟아나고 패배에서 승리하기 위함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십자가는 참혹한 사형의 틀이었고 그래서 예수님 전의 죄수들은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죄로 인생을 끝내지 않도록, 그리고 죽음으로 삶이 끝나지 않도록 죽음에서 생명이 솟아나는 이 구원의 신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므로 십자가의 신비는 구원의 신비이고 사랑의 신비입니다. 구원을 위한 사랑의 형틀이 아니라면 십자가는 사형틀일 뿐이고 그래서 저주받을 것이지 현양받을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구원과 사랑의 신비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으니 이제 우리가 주님과 세상에게 보여야 할 것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며 그리고 매일 미사 때마다 이 신앙의 신비를 기념하고 이 신앙을 고백하는데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하면 우리는 세 가지로 답합니다.
-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받으소서.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영광드리기 위해서, 주님의 죽음을 전하고 부활을 선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이 이 신앙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실현이고, 재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신앙의 신비의 실현이고, 재현입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늘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하시는데 믿는 사람이 주님 구원이 내게 들어오도록 문을 개방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믿을 때 주님 구원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이 신앙의 신비가 실현이 되고 재현되며,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를 통해서 증거가 되고 중계가 되지요.
죽음에서 참삶이 시작된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오늘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진정 기쁘고 의미있게 지낼 수 있음을 다시금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십자가의 거울 효과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상징적 비유가 오늘 독서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를 따르다가 불평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뱀을 보내어 물어 죽이게 하셨습니다. 뱀이 곧 불평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려 살려달라고 청하자, 하느님은 모세에게 장대에 구리뱀을 매달도록 하시고 그것을 보는 이마다 치유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뱀에 물린 이들을 위해 매단 짐승은 뱀이었습니다. 만약 다른 동물이 매달렸다면 어땠을까요? 전갈을 매달았으면 어떨까요? 양이나 소를 매달면 어떨까요? 그것이 분명 죗값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원인은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고 자기가 지은 죄만을 씻으려 할 것입니다. 죄의 원인이 씻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뱀이 죽지 않으면 죄를 지어도 죄인 줄도 모릅니다. 뱀이 모든 죄를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뱀이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죄는 죄를 짓게 만드는 자기가 뱀임을 볼 때 비로소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뱀이 되기를 원치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어느 신문에서 전과자들의 간담회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절도 전과자들은 자신의 경험담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때 멈칫하게 하거나 절도를 포기하고 나오게 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한 명의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주인이 코를 골고 자면 도둑질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코 고는 소리에 맞추어 한 발짝씩 떼어 놓으면 행진곡에 맞추어 입장하듯이 들킬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이 너무 고요하면 그냥 포기하고 나오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난 도둑질하러 들어갔을 때, 그 집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들이 가지런하면 긴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흐트러져 있으면 내 집같이 마음 놓고 들어갑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거든요.”
어떤 전과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도둑질하다가 뛰쳐나온 적이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칼을 빼 들었죠. 근데 그 괴한도 칼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괴한이 저라는 것을. 그날은 도둑질할 수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거울’입니다. 카지노에는 거울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죄에 빠져있을 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자아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본 모습이 드러나게 만드는 거울입니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순결했던 주인공은 ‘창녀’라고 써진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해 그 글자를 지웁니다. 하지만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악해지기로 했을 때는 거울을 당당히 바라봅니다. 자기의 모습이 뱀이어도 상관없다고 할 때 죄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거울을 비추어주심으로 자아의 참모습을 보여주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저희 어머니도 고아로 남의 집에서 일만 죽도록 하고 매도 죽도록 맞으며 자라서 다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불평하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때 바다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촌으로 가시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나병 환자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냐?”
예수님은 당신이 안 해줘서가 아니라 자아가 불평 자체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다시 살 힘을 얻으셨습니다. 모든 죄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보지 못하면 죄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십자가를 보며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지은 죄들을 보속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속하는 것입니다. 내 죗값은 두 배나 네 배로 갚아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죗값이 아니라 ‘나’를 보속하셨습니다. 나가 곧 죄이고 나가 죽기 전까지는 죄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애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내가 죽는다면 비로소 자동적으로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뱀의 모습으로 우리 자아의 거울이 되어주셔야 했을까요? 다른 사람이면 안 됐을까요? 안 됩니다. 뱀만 죽이면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만 자아가 죽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초기에 사목할 때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가출 청소년들을 데려다 키웠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이었고 전과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엔 박 목사를 칼로 찌르려고 했는데 “조금 있다 찌르고 내 말 좀 들어봐라!”라며 복음을 전해 거둬들인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너무 없어, 라면 하나를 끓여 7~8명이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고픔을 못 이겨 도둑질하였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이유는 그들이 도둑질하고 온 돈을 십일조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발각이 되었을 때는 목사님이 직접 가서 아이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싹싹 빌었습니다. 어떤 때는 술에 취한 주인에게 매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목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때뿐이었고 배고프면 또 도둑질하러 갔습니다.
그날도 주인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나오는데 아이들은 심각하지 않은 듯 자기들끼리 웃고 농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 되겠다 싶어 박 목사는 교회에서 한 아이를 세워놓고 쇠파이프 막대기로 힘껏 때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막대기를 들려주며 “너희들이 나를 10대씩 때려라. 대신 9대 때렸다가 마지막 1대라도 살살 때리면 다시 때리게 할 테니 힘껏 때려라.”라고 말했습니다. 두 아이에게 20대를 맞았는데 박 목사는 너무 아파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너무 아파요. 더 못 맞겠어요.”
박 목사는 세 번째 아이가 죄송하다며 때린 매에 허리 밑 꼬리뼈를 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매를 맞았고 그렇게 80대를 맞았습니다. 박 목사는 그 일로 거의 한 달 동안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허리가 안 좋아 항상 뜨거운 팩을 붙이고 다녀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되지 않던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더는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박 목사가 아이들에게 “왜 나를 때리고 나서 너희들이 변화되었느냐?”라고 물으니, “세상이 다 가짜인 줄 알았는데 매를 맞고 뒹구는 목사님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자기들 때문에 허리가 부러진 한 목사를 본 것입니다. 자기가 맞아야 할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목사님에게서 본 것입니다. 박 목사를 통해 자기 자아만 본 것이 아니라 그 목사가 자신들과 하나가 되며 자신들도 그 목사만큼이나 대단한 존재였음을 본 것입니다. 만약 박 목사가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이 사랑하는 강아지를 죽이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죄는 볼 수 있지만, 죄가 가리고 있는 그들의 본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그냥 강아지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죽인다면 어떨까요?
‘내가 그리스도인데 지금 뱀과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죄에서 해방해 주기 위해서는 그 거울 뒷면에 “넌 본래 그렇게 살 존재가 아니었어!”라는 말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울을 보며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원리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내 죄를 대신해서 보속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 봐야 또 죄를 짓습니다. 존엄한 존재였다가 처참하게 깨진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 뱀이 나의 하느님과 같은 존귀한 모습을 잃어버리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던 이유입니다. 나는 본래 하느님의 자녀였는데 내 안의 뱀이 나를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버렸음을.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의 필수품이 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마스크’입니다. 저의 경우 이 마스크 쓰는 것을 아주 싫어했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 이전에 황사가 심해서 사람들이 마스크를 쓸 때도 전혀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답답해서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이 터진 이후에는 무조건 써야 했습니다. 미사 때에도, 강의할 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저로서는 너무 힘든 시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스크 쓰는 것에 이렇게 단점만 있을까요? 코로나를 예방한다는 가장 큰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도 새로운 경험을 이 마스크를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바로 ‘젊어 보인다’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솔직히 어렸을 때부터 늙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입 주위에 있는 팔자주름이 나이 들어 보이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스크로 입 주위의 늙어 보이는 주름을 가려주니 젊어 보인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릅니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기쁨도 가져다줍니다.
삶의 불편함과 힘듦을 제공하지만, 우리에게 주는 이득이 훨씬 많아서 사람들은 마스크를 착용합니다. 불편하고 힘들다고 마스크 착용하는 것을 거부하면,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이 감염될 확률이 높아지고 또 이로 인해 남에게 감염시킬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 마스크가 어쩌면 십자가와 비슷하다고 생각해봅니다. 마스크 착용이 불편하고 힘들어도 꼭 필요한 것처럼, 십자가 역시 고통과 시련을 가져다줘도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맞이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들어 올려지신 주님을 봐야 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린 뱀을 본 사람만 살아남았던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믿고 함께 한 사람만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담겨 있는 십자가이고, 때로는 절망과 좌절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 백신이 필요한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십자가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믿음으로 극복 가능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은 잘못을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오늘은 어제보다 더 현명해졌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알렉산더 포프
어리광부리기
저는 6남매 중 막내입니다. 그러다 보니 막내 대접을 받으며 커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신학교에 들어갔고, 신자들은 제게 ‘학사님’이란 호칭과 함께 존댓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렸을 때나 어리광을 부렸지, 신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지금 신부로 살면서까지 어른 행세만 한 것 같습니다.
이 점이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다른 막내는 커서도 어리광을 부리며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린다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특히 이제 어리광을 부릴 대상이 없어졌기에 더 큰 후회로 남게 됩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해됩니다.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순수한 마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를 들어 높이는 것은 십자가뿐이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요한 3,14)
십자가의 색채는 하늘을 닮아 있다. 십자가를 삶에서 자를 수 없다. 십자가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올려드린 우리 사랑만 남는다. 십자가를 모르면 삶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삶이 바로 십자가이다.
사랑이 시작된 곳에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 현양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시는 변함없으신 사랑이시다. 삶과 삶 사이에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가 삶이다. 십자가는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다.
삶을 완성하는 은총의 이름은 바로 십자가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 높여진다. 십자가가 또 다른 십자가를 위해 기도한다. 십자가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십자가에 구원의 길이 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사람의 아들이 가르쳐주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다. 하느님의 사랑만 남는다. 우리의 삶이란 십자가역(驛)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사랑의 여정이다. 십자가에서는 모두가 주연(主演)이다. 우리를 들어 높이는 것은 십자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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