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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9월 12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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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4주일 -

 

 

21년 9월 12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주님의 종의 말을 전합니다.

 

 

✠ 오늘 제2독서

 

야고보 사도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9월 1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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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50장 5-9ㄴ절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맡겼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나는 주님을 사랑하네. 애원하는 내 소리 들어 주셨네. 당신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니, 나는 한평생 그분을 부르리라.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 저승의 공포가 나를 덮쳐, 고난과 근심에 사로잡혔네. 나는 주님의 이름 불렀네. “주님, 부디 이 목숨 살려 주소서.”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신 분,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네. 주님은 작은 이들을 지키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당신은 죽음에서 제 목숨을 구하셨나이다. 제 눈에서 눈물을 거두시고,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하셨나이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야고 2장 14-18절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8장 27-35절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단호한 선언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으로 우리의 믿음을 드러냅시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릅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이끄시어 저희가 제 생각대로 살지 않고 그 은총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12일 (일)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12일 (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12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곧이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베드로가 이에 반박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합니까? 그저 어렵고 힘들 때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날마다 은총을 내려 주셔서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으로만 믿고 있지는 않은가요? 하느님의 뜻보다는 이기심이 바탕이 된 사람의 뜻만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도 베드로 사도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기도할 때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우리 마음대로 할 때도 많이 있으니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믿음이 ‘실천’을 통하여 드러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다른 이들을 돕고 믿음과 기도가 실천으로 이어지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에 초대되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깨닫고 고백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리스도적인 사람과 사탄적인 사람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연중 제24주일은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가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이사야서는 하느님 말씀을 거역하지 않는 자,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수난을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수난을 각오하는 자,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수치를 당하지 않는 자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분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귀를 닫지 않고 열어놓는 그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 곧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수락하기 어려울 때 못 들은 척 하는데 그리스도는 귀를 활짝 열고 하느님 말씀과 뜻을 적극 수용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의 수용은 모욕과 수모와 고통의 수용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반감이 들고 반발이나 반박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꼭 이렇게 죽어야 하고 모욕당해야 하고 고통당해야 하는 우울한 거냐고. 즐겁고 유쾌할 수는 없냐고. 

그렇습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행복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모욕도 고통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편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제가 자주 주장하지요. 참행복은 무조건이어야 한다고, 돈이 있어도 행복, 없어도 행복, 웃어도 행복, 울어도 행복, 모욕을 받아도 행복, 칭찬을 들어도 행복해야지 돈과 웃음과 칭찬만 있어야 행복하고 가난과 슬픔과 모욕은 없어야 한다면 그것은 조건이 있는 행복이요 쉽게 무너지는 행복이니 참행복이 아니지요. 

그뿐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칭찬과 즐거움만 있기를 바라는 것은 천상 지향적이지 않고 이 세상에서 받을 상을 다 받는 것이고 그래서 육적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육의 영과 주님의 영의 이끌림 차이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육의 영은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하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습니다. 이와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이 혹독한 단련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멸시받고 수치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한.....사랑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주님의 영으로 수난을 각오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처럼 수치와 모욕을 줘도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습니다. 

당하는 것은 원하지 않을 때 당하는 것이지 스스로 원하면 당하지 않고, 더 나아가 사랑으로 원하면 사랑을 받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적인 사람인데 수난을 거부하는 사랑을 하면 오늘 베드로 사도처럼 사탄적인 사람이 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스승 예수를 사랑하였지만 수난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사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적인 사람과 사탄적인 사람 중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전할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기쁜 소식을 왜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반박합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것이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믿음이 있어도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진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 목숨에 영향이 가지 않는 사람이란 아직 참 복음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들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죽일 마음이 없으므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게 오히려 도와주는 것입니다. 

영화 ‘파운더’(2016)는 밀크셰이크 믹서기를 판매하는 외판원 ‘레이크록’과 맥도날드 형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믹서기 하나 파는 것도 힘든데 어느 한 시골에서 8개나 주문한 것입니다. 도대체 어느 매장이기에 그 많은 믹서기가 필요한지 궁금해졌습니다. 당시 햄버거 하나를 주문하면 30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에서 햄버거를 주문한 레이크록은 자신이 주문한 것이 30초 만에 나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는 맥도널드 형제들이 수십 년간의 비법을 집대성하여 최대한 빨리 햄버거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도록 아무 성과도 없이 믹서기나 팔러 다니던 레이크록은 이 매장을 프랜차이즈로 운영하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맥도널드 형제들에게 자신이 가맹점을 늘리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맥도널드 사장 형제는 자신들이 만드는 음식의 품질과 고유한 시스템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손해 볼 것이 없다고 믿고 그 규정만 지켜준다면 그가 가맹점을 늘리게 만드는 것을 해도 좋다고 허락해 줍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수였습니다. 

레이크록이 가맹점을 늘리다 보니 자신에게 돌아오는 수익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래서 맥도널드 형제들 몰래 부동산 회사를 맥도널드 이름으로 설립합니다. 그는 가게에서 나오는 돈으로 부동산을 매입해 가맹점을 모집하고 그 사람들이 내는 돈으로 또 땅을 사서 가맹점을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값싼 밀크셰이크 파우더로 대체합니다. 그렇게 이윤이 남는 것으로 또 땅을 삽니다. 이 사실을 맥도널드 형제들이 알았을 때는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레이크록은 이미 부동산 재벌이 되어있었고 시골 가게 하나만 달랑 가진 맥도널드 형제들이 재벌과 싸워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목덜미를 잡고 레이크록에게 맥도널드 권리를 싼값이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든 것은 맥도널드 형제들인데 그 맥도널드를 널리 퍼뜨리려던 레이크록이 맥도널드까지 먹어 삼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했다가는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원님 덕에 나팔 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원님을 위해 불던 나팔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볼 때는 원님 없이 혼자 영광을 챙기게 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전하는 것이 이처럼 위험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려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사람들이 나에게 영광을 주더라도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잊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살기 위해 십자가에 나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지 않는 이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가 교회에 불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내세워 당선되어서는 가톨릭 신자의 모습과 전혀 상반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를 이용한 것이 됩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영화 ‘밀양’에서도 전도연은 아들을 납치 살해한 살인범을 용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감히 어떻게 먼저 용서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죽지 않고 하느님과 분리된 사람은 결국엔 교회에 폐를 끼치게 만듭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게 되었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기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에 고민이 너무 많았습니다.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능력 부족 그리고 자질 부족인 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도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싫었습니다. 공동 기도 시간, 미사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또 신부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도 공부하는 것을 너무 싫어했습니다. 철학, 신학, 성경…. 모두 제게 맞지 않는 옷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고생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런 고민으로 힘들어할 때, 여름방학 중에 혼자 산에 갔습니다. 정상까지는 길을 따라 쉽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하산하는데,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싶은 것입니다. 숲속으로 들어가 저의 감각만을 믿으면서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숲을 헤치며 한참을 내려갔지만, 사람도 보이지 않고 길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니 그 힘든 길을 다시 간다는 것 자체가 끔찍했습니다. 또 무작정 내려가다가는 길을 잃어서 금방 어두워져서 난처한 일을 당할 것만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니, 이 물길만 쫓아가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실제로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습니다. 
 
하산할 때 들었던 물소리가 주님의 말씀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주님 말씀만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분명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지 않고, 지금 이렇게 신부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 기도를 싫어하지 않고, 또 공부를 너무 좋아하는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언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반대를 던집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어야 했습니다.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니 주님의 뜻이 보이지 않고,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일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사람의 일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일일까요? 
 
베드로처럼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이 없어야 한다면서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기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짜 자신의 목숨을 구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관찰이 전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해라. 그리고 눈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에서 배워라.

-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하느님은 늘 좋은 시간을 주셨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선생님께서 미술 시간 준비물로 찰흙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저로서는 찰흙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옆 짝궁에게 물어보니,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을 지으며 “흙인데 끈기가 있는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솔직히 찰흙을 문방구에서 살 생각은 전혀 못 했습니다. 흙이란 것은 길거리에 널려 있는데, 이 흙을 돈 주고 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밭의 언저리에 있는 흙의 상태를 보고 ‘찰흙이다’라고 확신했습니다. 손으로 만져보니 끈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저는 직접 채취한 이 흙을 라면 봉지에 넣어갔습니다. 그런데 제 주위의 친구들은 모두 투명 비닐에 쌓인 네모반듯한 찰흙을 꺼내는 것입니다. 겉 비닐에 큼지막하게 ‘찰흙’으로 쓰여있더군요. 
 
친구들이 저를 엄청나게 놀렸습니다. 흙을 사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인데 말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남들은 체험하기 힘든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실수, 실패. 당시는 부끄럽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시간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게 됩니다. 
 
하느님은 늘 좋은 시간을 주셨습니다. 실수, 실패도 제게 좋은 시간입니다. 어떤 시간도 감사한 시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말씀은 실행을 부르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부른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루카 6, 43)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이 가을 묻게된다. 귀를 기울여야 할 주님의 말씀이시다. 말씀의 진리가 실행의 참된 열매가 된다. 날마다 생명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실행하는 삶이 바로 복음의 참된 삶이다. 

복음의 삶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복음의 삶은 좋은 실행의 발자국들로 넘쳐난다. 말씀은 우리에게 열매를 내어주듯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선사한다. 말씀과 함께 이 시간을 견디고 말씀과 함께 이 시련을 통과한다. 

말씀과 실행은 나무와 열매같이 이렇게 함께 이어진다. 말씀으로 시작하고 실행으로 완성된다. 말씀의 실행이란 주님께 바치고 주님께 내어드리는 삶이다. 우리의 삶이 좋은 열매가 되어야한다. 

좋은 나무는 주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실행과 함께 자라난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또한 말씀과 함께 자라난다. 말씀을 품은 삶이 말씀을 실행한다. 말씀은 실행을 부르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부른다. 주님께서 자녀들을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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