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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9월 10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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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

 

 

21년 9월 10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에 예수님을 모독하고 박해하였으나 주님의 자비로 직무를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인도하는 사람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9월 1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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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티모 1장 1-2절, 12-14절

 

나는 전에
그리스도를 모독하였으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1티모 1장 1-2절, 12-14절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과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나 바오로가, 


믿음으로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12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13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은
제 몫의 유산이시옵니다.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주님께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주님.” 주님은 제 몫의 유산, 저의 잔. 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제 몫의 유산이시옵니다.

저를 타이르시는 주님 찬미하오니, 한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깨우나이다.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주님, 당신은 제 몫의 유산이시옵니다.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 주님, 당신은 제 몫의 유산이시옵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6장 39-42절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믿는 이들을 생명의 말씀과 천상 성사로 기르시고 새롭게 하시니 사랑하시는 성자의 크신 은혜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10일 (금)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10일 (금)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10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겸손한 사람과  교만한 사람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 (시편 139[138],1-2.4)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거짓을 말할 수도 교만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위선자는 자기 자신도 모르고 교만하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사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한다면, 분명히 그분께 머물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자신을 올바로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려는 그리스도인은 위선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못나고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하느님께 무한히 열려 있는 삶을 사는 이들을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보십니다. 

위선자와 같은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을 보지 못하기에,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것을 이룬 듯 보일지 모르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진실된 자신을 보고 하느님을 얻지만, 교만한 사람은 거짓된 자신을 보고 하느님을 잃어버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보는 것이 관상이 되지 못하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얼핏 보면 이 말씀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닐까, 특히 뒤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라고 위선자  운운하시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확인해 보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지도자급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제자들을 포함하여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을 듣고 나는 눈이 멀지 않았고 이렇게 잘 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어떤 면에서 이 세상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멀었다는 것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며, 세상 것을 보는 눈이 아니라 천상 것을 보는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먼 것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져야 하는데 돈에 눈이 멀어 사람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그런 눈이 멀음도 있지만, 오늘 여기서 눈이 멀었다는 것은 꼭 집어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함을 말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주장하느냐 하면 이어지는 말씀이 인도에 대한 것, 곧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어떻게 인도하느냐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개념을 명확히 하면 이런 얘기가 되지요. 하느님을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는 사람은 남도 하느님께 인도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때 보는 것은 그저 동태 눈처럼 눈을 뜨고 눈에 들어오는 대로 멍하니 보는 것이 아니라 놓치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고 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그분께 가기 위해 보는 것이며, 그러기에 보는 것과 가는 것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듣기는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들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아무런 실천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보기는 하지만 가지 않는 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하느님께 가고자 하는 열망도 없습니다. 

소가 닭 보듯 보기에 보는 것이 관상이 되지 못하고 보는 것에 아무런 역동성이 없습니다. 눈에 불꽃이 튀지도 않고 잰 발걸음도 없습니다. 

그러니 역으로 하느님을 보는 관상은 매우 고요하고 정적일 것만 같지만 사실은 매우 뜨겁고 동적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맹인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참으로 보물인데 안타깝게도 밭에 묻혀 있어서 영적 맹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밭이란 이 세상이지요. 더 구체적으로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입니다. 이 세상과 이 세상 것들이 얼마나 좋은지 그것에 홀리고 정신이 빠져서 하느님 나라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만일 이렇다면 지혜서 13장의 말씀을 귀여겨들어야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모가 눈먼 인도자가 될 가능성이 큰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먼 인도자’들을 질책하십니다. 눈먼 인도자들이란 자신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들보란 ‘자아’를 뜻합니다. 자아를 보지 못하면서 행동만 잘하려는 사람은 ‘회칠한 무덤’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속은 썩은 시체로 가득한데 겉만 번지르르해서 그 모습을 따르라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남을 심판한다.’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도자는 남을 심판하는 대신 그 사람 안에서 사랑받지 못해 화가 잔뜩 나 있는 자아를 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스승을 따라야 합니다. 스승 없이는 누구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의 첫 번째 스승은 부모입니다. 아이들이 저절로 잘 성장할 것으로 믿거나, 자신을 닮으면 된다고 믿으면 눈먼 인도자입니다. 

부모가 눈먼 인도자라면 자녀들은 부모와 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빨리 올바른 인도자를 만난다면 그런 부모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녀의 스승이 부모에게만 머무른다면 아무래도 완전해지기는 어렵습니다. 

의사 김범석 씨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는 말기 암 환자가 된 한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두 딸의 상반된 자세가 나옵니다. ‘혈연이라는 굴레’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우리에게 스승이라는 굴레가 단지 부모에게만 한정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환자는 식도암으로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호스피스 상담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 환자는 불평만 늘어놓았습니다.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병원 밥이 너무 싱겁다는 둥, 병실 침대에서 냄새가 난다는 둥, 옆 침상 환자가 시끄럽다는 둥 도저히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녀는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 딸이 둘 있기는 한데…. 연락하기 좀 그래요. 다들 바빠서….”

이런 식의 식도암 환자들은 대부분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 수준으로 술을 마셔서 생긴 병일 경우 아내나 자녀에게 좋은 남편, 아버지일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다행히 큰딸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큰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환자는 예상보다 더 나쁜 아버지였습니다. 늘 술을 마셨고 도박으로 돈을 날렸고 술집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가족을 때렸습니다. 어머니는 늘 맞으며 버텼고 딸들과 먹고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벌어온 돈으로 아버지는 다시 술을 마셨고 여자와 놀았고 노름을 했습니다. 이런 일은 끝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두 자매를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참았습니다. 

20년 가까이 지나 딸들이 성인이 된 뒤 어머니가 이혼을 원했을 때, 아버지는 위자료를 요구하며 끝내 이혼해주지 않았습니다. 여동생은 아버지와 의절한 뒤 일찌감치 독립해서 살았고 집안의 어떤 일에도 엮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을 참기만 하는 어머니도, 그런 부모를 감당해내는 언니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큰딸의 몫이었고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큰딸도 새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신혼 때도 찾아와 돈을 요구했고 그래서 사위와 크게 싸운 뒤로는 더는 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인연이 무엇인지 여동생은 장례 때도 절대 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큰딸은 아직 ‘부녀’의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의사 앞에서 한없이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큰딸과 작은딸의 스승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큰딸의 스승은 당연히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를 좋아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싫지만 싫다고 하지 못하고 인연의 굴레에 매여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버지와 같은 남자를 만나 똑같이 참고 살 가능성이 큽니다. 의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심지어 현재 결혼 생활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온 남편은 그녀의 아버지인 환자를 닮아있었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그녀는 그 자체만으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인생은 자꾸 반복되고 있었다.”

물론 작은딸은 의사가 만나보지 못해서 어떻게 사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심스럽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작은딸의 스승은 아버지입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장례도 오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아마 결혼했어도 가정에서 아버지와 같은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았어도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용서를 가르친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승을 찾아 그 스승을 닮아가면서 성장합니다. 자녀를 참 스승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줄 수 없는 부모를 만났다면 그 자녀들은 두 부모 중 하나를 닮을 확률이 높습니다. 원하지 않아도 닮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빨리 자신보다 더 나은 스승을 사랑할 수 있도록 봉헌하는 일입니다. 참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부모가 아이들의 온전한 스승이 되기 어려운 이유는 부모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키울 때는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보다 더 낫게 키우려고 하고 돈 걱정을 하며 그것 때문에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다를까요? 노후 걱정과 자존심 때문에 자녀가 성공하도록 돕고 싶은 마음과 그래서 가난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거지로 사는 것도 좋다는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않는 한 그냥 어쩔 수 없이 세상 걱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 걱정하게 만드는 게 자아입니다. 자아는 들보처럼 나의 눈을 가려 눈먼 인도자가 되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참 인도자로 따라가는 들보를 끼고 사는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스승이 되신 분은 예수님과 성모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눈먼 인도자로서의 우리 한계를 직시하고 겸손하게 자녀들이 부모를 닮게 만들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보다는 더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동창 신부의 가족과 함께 식사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식사 한 끼 대접하겠다고 약속을 했었고, 그날이 바로 그 약속을 지키는 날이었습니다. 같이 갔던 식당은 요즘 강화 내에서 인기 있는 장소였습니다. 예약하지 않으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다른 식당과 달리 주 5일 근무를 철저히 지키는 곳이었습니다. 
 
저도 처음 가는 곳이라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그렇게 인상적이지 못했습니다. 가격 대비 훌륭하다고 말하기 힘든 곳 같았습니다. 그런데 동창 신부의 어머니와 그 여동생은 달랐나 봅니다. 식당 명함도 챙기면서 나중에 다시 와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남자가 보는 관점과 여자가 보는 관점이 확실히 구분되는 식당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올 것 같지 않은데, 다른 사람은 다시 오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내 뜻만 내세워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실제로 이런 판단이 커다란 잘못으로 나아갔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에게는 관대하게, 그러나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내세워서 서로의 간격을 더욱 멀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우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이런 사람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낸 다음,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내라고 합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이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까요? 자기 성찰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남에 대한 비판만 늘어놓는 사람을 좋아할까요? 자기 성찰을 하는 사람은 겸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에 대한 비판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는 너그러움을 간직합니다. 이 너그러움에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커다란 존경과 사랑을 전달합니다.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만큼은 될 수 없을 것이 분명하지만,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속 좁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많은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편견을 재배치해놓고 이것이 새로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 윌리엄 제임스

 

 

행복한 사람

 

몇 년 전 일본에서 실시했던 설문 조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조사는 60대 중반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라는 것이었습니다. 60대 중반이면 인생의 후반부 들어가는 나이대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후반대까지 온 상태에서의 행복을 물어보는 것이었지요. 
 
우선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 일도 없이 세월을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가족들과만 세월을 보내고, 옛날 친구들과 가끔 만나는 여성이었습니다. 
 
반면 행복을 찾아 누리는 사람은 다음 3가지의 경우라고 말합니다. 
 
공부를 시작한 사람, 취미활동을 계속하는 사람,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그들입니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아무 일이라도 하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조사였습니다.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내게 주어진 모든 일, 특히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모든 일이 행복의 열쇠였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장 아름다운 실천은 위선과 부정직을 멈추는 실천이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 42)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가 거의 없다. 들보를 빼내는 고통 없이는 새롭게 볼 수 없는 우리들 신앙인의 삶이다. 신앙인은 겉모습이 아닌 진리의 참된 추구자들이다. 철저한 자기점검과 성찰이 필요한 요즘음이다. 언제나 삶의 중심과 삶의 방향을 일깨워주시는 주님이시다. 상식과 양심에서 다시 시작되는 일상의 변화이다. 

언제나 바른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는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신앙의 정체성을 다시금 되찾아준다. 십자가는 머리와 입이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러기에 거기엔 치유가 있고 눈물이 있다. 위선의 가면을 벗어야 십자가를 통하여 제대로 볼 수 있다. 빼내어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각별한 가을의 선물이다. 스스로 깨우치기를 기다려주시는 벌거벗은 주님이시다. 이제 우리가 위선의 옷을 벗고 참된 사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갈 때이다. 가장 아름다운 실천은 위선과 부정직을 멈추는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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