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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21년 9월 13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4세기 중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터키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독실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극기 생활을 하던 그는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사제품을 받고 주로 설교자로 활동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악습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지어 황제나 황후에게도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했습니다. 그 때문에 성인은 유배 생활을 하다가 407년 무렵에 선종했습니다.
탁월한 설교로 ‘금구’(金口: 황금의 입)라고도 불리는 그는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말을 들으시고 믿음에 감탄하시며 그의 병든 노예를 고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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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1티모 2장 1-8절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그대여,
1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3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4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5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6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제때에 드러난 증거입니다.
7
나는 이 증거의 선포자와 사도로,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과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할 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8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화답송
간청하는 내 소리 들으셨으니
주님은 찬미받으시리라.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당신 지성소로 두 손을 들어 올릴 때, 간청하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간청하는 내 소리 들으셨으니 주님은 찬미받으시리라.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내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 간청하는 내 소리 들으셨으니 주님은 찬미받으시리라.
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소서. 그들의 목자 되어 영원히 이끄소서. 간청하는 내 소리 들으셨으니 주님은 찬미받으시리라.
복음
루카 7장 1-10절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2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3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4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6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7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8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9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0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복된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를 기리며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하느님 사랑 안에서 저희가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며 진리를 충실히 증언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13일 (월)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13일 (월)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13일 (월)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믿음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로마 백인대장의 이 겸손한 고백은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바치는 기도입니다.
천주교 신자에게 영성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셨고, 미사를 통하여 날마다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성사를 통하여 우리와 일치하시고, 우리가 당신 안에 함께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늘 주님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백인대장의 확신에 찬 말은 예수님께는 믿음에 대한 감탄으로, 그리고 그 종에게는 치유의 은총으로 다가갑니다.
세상의 수많은 방해와 불신 속에서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우리의 눈은 한계가 있어 실지로 많은 것을 볼 수 없고, 우리의 뇌는 기억하고 있는 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왜곡하고 조작하기도 한다고 뇌과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본 것, 우리가 경험한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백인대장이 보여 준 믿음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스스로 삶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원의 시간, 신비 안으로 초대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도로 돌리기
요즘 제가 영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 <기도로 돌리기>입니다.
우리는 신선처럼 이슬만 먹고 살 수 없고, 티브 프로그램에 많이 나오는 자연인처럼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고 도사처럼 동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 비비며 살다보니 자주 판단하고, 비판하고, 욕하며 살고, 특히 정치가들에 대해서 더 많이 판단하고, 비판하고, 욕하며 사는데 그때마다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제가 괴롭고, 수도자라는 자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이 한심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화가 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고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면에서 괴롭기도 하지만 기도하지 않고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것 특히 욕하는 것은 그들을 초월치 못하고 그들과 같은 수준에서 뒹구는 것이기에 그런 제가 한심하고 그런 저에 대해 화가 나는 겁니다.
그러니 판단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 비판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 더욱이 욕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내가 기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같은 수준의 한심하고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거지요.
그러므로 기도로 돌리기를 하는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위한 것, 곧 기도하고 사랑하는 내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는데 마음에 와 닿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기도하는 나는 그들과 같이 똥구덩에서 뒹굴지 않아 품위 있고, 인간적으로만 상대하지 않고 하느님께로 향하니 신심 깊으며, 욕하고 화를 내지 않으니 마음이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렇게 <기도로 돌리기>를 하기로 했지만 아직은 열 번에 한두 번밖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나에 실망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이런 나에 겸손하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저의 전 삶이 의식화와 성사화가 될 것입니다.
한 술에 배부르려는 또 다른 욕심쟁이가 아닌 삶의 의식화와 성사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겸손한 노력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 다잡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믿음이 있으면 법칙을 찾아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로마의 백인 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보통 칭찬하시는 게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도대체 백인 대장이 이런 칭찬을 받을만한 일을 한 게 무엇일까요? 그는 예수님이 굳이 자기 집에 오시지 않아도 종을 치유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은 딸을 살렸던 회당장 야이로는 딸일 살리려면 자신의 집으로 꼭 오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도 큰 믿음이지만 성경을 공부한 적도 없는 이방인이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것은 왜일까요?
그는 세상의 법칙을 묵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도 하나의 권위입니다. 인간보다 높은 권위를 지닌 힘입니다. 자신도 로마 장교로서 자기 밑에 있는 군사에게 시키면 군사들이 알아서 다 하는 것처럼, 하늘의 권위를 지닌 분도 굳이 당신이 다 하지 않아도 그 능력을 실행해줄 천사와 같은 이들이 있을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굳이 예수님을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평생 공부한 사람보다 더 잘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법칙’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법칙이 있습니다. 법칙은 시공을 초월해 예외 없이 옳고 반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법칙보다 낮은 것이 ‘론’입니다. 예를 들면 ‘진화론’입니다. ‘론’은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증명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증명된다면 ‘진화 법칙’이 될 것입니다. 법칙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자연계 내에서 스스로 진화 발전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질서와 에너지를 잃는다.’라는 열역학 제2 법칙처럼 증명이 되고 누구에게나 수긍이 갑니다.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법칙은 하나의 믿음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이기 때문에 증명할 수 없습니다. 단지 열역학 제2 법칙에 따라 모레가 뭉쳐 스마트폰이 된다는 식의 진화론보다는 스마트폰이 사막에 떨어져 있다면 진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창조론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론’이 ‘법칙’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론’보다 하위개념이 있는데 ‘설’입니다. 설은 이론도 없고 그냥 개인의 주장입니다. 이 세상에서 ‘설’에 빠지는 이들은 자기 자신만 믿는 ‘자아 숭배교’라 할 수 있고, ‘론’을 따르는 이들은 인간을 숭배하는 ‘인본주의교’라 할 수 있으며, ‘법칙’을 따르는 이들은 그 법칙으로 세상을 창조한 분을 믿는 ‘신앙인’이 됩니다.
만약 여기저기서 ‘같은 모양의 돈’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분명 그 돈을 개인들이 만들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한국은행과 같은 곳이 있어서 같은 모양으로 그 돈을 찍어냈을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 명이 디자인해서 그 돈이 그렇게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명의 선수가 일제히 짜 맞춰진 ‘싱크로나이즈’를 한다면 분명 어떤 누구가 그것을 구성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우연의 일치로 그런 것들이 맞을 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모두 적용되는 법칙이 있다면 그 법칙을 만든 분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감독이 여러 명이면 분명 다른 모양의 공연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백인 대장은 ‘법칙’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서든 모든 힘의 서열이 있는 곳이면 상관이 명령하면 밑에 사람이 그 명령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권능을 지닌 그리스도도 그럴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보다 크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세상은 그 믿음이 있는 이들이 성공하는 곳입니다. 많은 영화배우가 있지만 오랜 시간 탑으로 군림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처음엔 잘하는 것 같다가 중도에 넘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유퀴즈 온 더 블록’에 황정민 배우가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누적 관객만 1억 명이나 되는 꾸준한 노력파 배우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가 생각해도 연기가 점점 느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만큼 많이 노력하는 배우입니다.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직접 그런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노트 한 권을 채우지 않으면 연기를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국제시장에서 노인을 연기하기 위해 파고다 공원에서 어르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인터뷰도 하며 그분들의 말투를 배웠다고 합니다. 노숙자를 연기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노숙자로 변장하여 그들과 일주일 동안 살아보기도 했습니다. 곡성에서 무당을 연기한 장면인 무당이 봐도 소름 돋는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데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만큼 자신의 연기를 보는 사람들이 몰입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찾아보니 개신교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관리하고 노력한다면 그의 연기 인생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한 법칙이 진리이신 성자이시고 사용한 노력이 은총이신 성령이십니다. 자동차를 만들 때 만드는 사람이 아버지이고 설계도가 아드님이며 피와 땀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만들어진 자동차가 운행되는 법칙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대로 살면 인간은 온전히 창조된 법칙대로 살기 때문에 고장 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이 계신다면 이 세상도 법칙대로 움직입니다. 그 법칙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잘 살아나가겠지만, 그것 자체가 창조주를 믿는 믿음이 됩니다. 헛된 개인적인 생각이나 증명될 수 없는 이론들을 따르지 맙시다. 시공을 초월하는 명확한 법칙이 있음을 믿읍시다. 그 법칙을 찾아내면 주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증가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보이지 않는 말씀 한 마디
어느 신부가 미사를 하는데 곁에서 복사를 서던 소년이 실수로 포도주와 물이 담겨 있는 주수병을 떨어뜨려 산산조각을 냈습니다. 그 순간, 이 신부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성당에서 나가! 그리고 다시는 복사 서지 마!”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성당을 나갔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다른 성당에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괜찮아. 나도 어렸을 적에 복사 서다가 그런 일이 있었어. 너는 이미 잘하고 있단다.”라고 따뜻한 말을 해주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소년은 그 후 성당에 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커서는 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로, 그는 37년간 독재자로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탄압했던 주인공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주교 ‘풀턴 쉰’이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의 힘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용기와 힘을 주는 말이 아닌, 순간의 내 기분을 푸는 말에 멈춰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기분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변화를 위한 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말하는데 늘 조심해야 한다고 옛 성인들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말이었을까요? 죽이는 말이 아닌 살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말씀 한마디로 백인대장의 노예를 깨끗하게 치유해주셔서 죽음에서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는 복음의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일관된 모습이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치유될 것이라 믿는다는 것이 쉬웠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직접 보고 직접 들어야 또 직접 만져봐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이지요. 그런데 보이지 않은 말씀 한마디에 믿음을 둔다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믿음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분명히 치유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굳이 힘들여 오실 필요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의심 없이 믿을 때, 주님의 커다란 은총과 사랑은 우리 곁에서 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말이 가진 힘이란 죽은 이를 무덤에서 불러낼 수 있고, 산 자를 땅에 묻을 수도 있다. 소인을 거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거인을 완전히 망가뜨려 없애 버릴 수도 있다.
- 하인리히 하이네
하느님의 힘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호가호위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린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호랑이가 사냥해서 여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여우가 스스로 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 자신이 왕이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여우는 자기 뒤를 쫓아오면 모든 동물이 자신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어떠했을까요? 모든 동물은 여우 뒤의 호랑이를 보고 두려워 도망쳤습니다. 호랑이는 이렇게 도망치는 동물들을 보면서 ‘여우가 진짜 왕인가 보다.’라면서 여우를 풀어줍니다.
이 우화를 읽으면서, 우리 뒤에 계시는 하느님을 떠올려봅니다. 하느님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잘 나서 그런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이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것은 하느님을 따라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지, 스스로 잘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종교지도자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주님도 겸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듯이, 우리 역시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살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을 살리는 믿음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루카 7,7)
믿음은 끝없이 주님을 향해 있다. 믿음은 우리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한다. 간절함이 믿음이다. 우리 마음을 깨어나게 하는 믿음이다. 백인대장과 노예를 소중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사람의 믿음이다.
믿음 안에 우리가 있다. 힘들고 아픈 현실은 믿음을 딛고 다시 일어서게 된다. 믿음은 사랑을 위해 살아야 할 우리의 삶이다. 믿음과 삶은 말씀과 치유로 깊어간다. 믿음은 삶을 뒷받침하는 삶의 힘이다.
믿음의 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 모두를 변화시킨다. 투명한 믿음 겸손한 믿음을 백인대장의 믿음에서 만나게된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님을 가리키는 믿음이 된다. 다시 간절해지는 믿음이다. 아픔을 치유하는 믿음이다. 사람을 살리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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