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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
21년 9월 9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답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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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콜로 3장 12-17절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화답송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거룩한 성소에서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웅대한 창공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위대한 일 이루시니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지없이 크시오니 주님을 찬양하여라.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뿔 나팔 불며 주님을 찬양하여라. 수금과 비파 타며 주님을 찬양하여라. 손북 치고 춤추며 주님을 찬양하여라. 거문고 뜯고 피리 불며 주님을 찬양하여라.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바라 소리 낭랑하게 주님을 찬양하여라. 바라 소리 우렁차게 주님을 찬양하여라.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복음
루카 6장 27-38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믿는 이들을 생명의 말씀과 천상 성사로 기르시고 새롭게 하시니 사랑하시는 성자의 크신 은혜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9일 (목)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9일 (목)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9일 (목)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사랑을 입어라.
우리는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자주 잊고 삽니다. 또한 지극히 단순하게 나만의 하느님이 되어 주십사 청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우리는 모두 하나이고 한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고통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많은 것을 앗아간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실천하기에 너무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실은 하느님의 끝없는 자비의 표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루카 6,36 참조).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원수를 미워해서 생기는 더 큰 고통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거저 의롭게 되었으며(로마 3,24 참조), 신앙의 신비를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사랑함으로써 나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소명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선으로 악을 이겨 하느님 사랑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도 체하지 않도록
오늘 콜로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덟 번이나 '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입으십시오.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을 입으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이 여러 가지 권고를 들으며 얼마나 간절하면 이렇게 여러 번 바오로 사도가 권고를 할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사도의 이 간절함에 비해 너무 많은 권고를 한꺼번에 쏟아부음으로 인해 우리 귀에는 오히려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거나 흘려 들을 수도 있지요.
배고프다고 또는 너무 맛 있다고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목구멍이 막히고 사용한 휴지를 한꺼번에 많이 버리면 변기가 막히듯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는 소리도 한꺼번에 다 쏟아부으면 하나도 먹히지 않거나 잔소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잔소리를 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말을 한 것인데 너무 많으면 그 크고 중요한 당부가 작은 것이 되고 잔소리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내 말을 꼭 듣게 하고프면 중요한 것 한두 가지만 얘기해야 되지요.
같은 이유로 이 많은 권고중에 한두 가지를 추려서 듣는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들어야 할까요?
사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는 다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우며 그래서 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이지만, 그래도 추려야 한다면 '하느님께 감사'와 '이웃에게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에 대해서는 그저께 이미 했기에 오늘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권고에 집중코자 하는데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권고하면서 이렇게 얘기를 전개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이 말은 사랑의 겉옷 안에 속옷도 입으라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겉옷이 있어도 속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되듯 사랑이라는 겉옷도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같은 속옷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겠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성급하게 사랑이라는 겉옷만 입고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 누가 도움을 청한다고 급하게 겉옷만 걸치고 나가면 찬 바람이 옷 속으로 들어와 이내 다시 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듯이 우리의 사랑도 속옷들을 입지 않고 덤벼들다가는 이내 그만두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는 우리가 입어야 할 속옷들인데 이 속옷들 중에서 겸손이라는 속옷은 꼭 입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겸손이 제게 제일 부족했고, 그래서 사랑 실패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이 체하더라고요. 앞서 너무 사랑하기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권고를 하면 막히고 잔소리가 된다고 말씀드렸듯이 겸손하게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도 체하는 것이지요.
겸손하지 않으면 내 사랑만 믿고,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지 않고 막 사랑을 퍼붓는데 그럴 때 그 사랑은 사랑 폭력이 되거나 사랑 오남용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 하듯 사랑도 꼭꼭 씹어 체하지 않도록 상대가 먹는 것을 보며 줘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흐르는 물엔 녹조가 끼지 않는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주제입니다. 원수까지 용서하라고 하시며 결국엔 달라는 대로 다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물질적인 내어줌이 미운 사람까지 용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집착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 흘려보낼 줄 아는 사람은 용서도 쉽습니다. 어차피 흘러갈 것이기에 잃어도 많이 고통스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그 사람을 용서하려고 하는 데서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아프게 한 것을 내려놓는 데서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엔 녹조가 끼지 않습니다. 흐르게 하지 않았기에 미움이 끼게 된 것입니다.
‘존 캘러핸’(1951-2010)은 세상을 풍자하는 만화를 그리는 인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인생은 세상을 비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아일랜드의 정통 가톨릭에서는 혼외로 태어난 아기를 키우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존의 어머니는 그를 버렸고 그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라 한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에서도 그는 그들을 가족이라 여길 수 없었습니다. 양부모가 친자녀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비꼬는 사람이 되었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덱스터라는 친구와 술을 진탕 먹고 덱스터가 운전하는 차를 함께 타고 집으로 오던 중이었습니다. 덱스터는 신호등이 출구인 줄 알고 시속 140km로 들이받았고 덱스터는 가벼운 찰과상, 존은 전신 마비가 됩니다. 당연히 덱스터도 미안하고 두려운 나머지 존을 찾아오지는 못합니다.
재활 중에도 존은 여전히 술을 마십니다. 자신을 막 대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이런 상황이 되게 만든 엄마가 생각날 때도, 졸음운전으로 자기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도망간 덱스터를 생각할 때도, 자기를 물건처럼 다루는 간병인을 볼 때도 술을 찾습니다.
그러던 때 운명처럼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믿어주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처음엔 병원 자원봉사자로 만났지만, 나중엔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고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아누는 비행기 승무원입니다. 아누는 존에게 믿음을 줍니다. 존은 아누를 잃지 않기 위해 금주 단체에 가입합니다.
그 금주 단체를 이끄는 사람은 도니라는 인물입니다. 둘은 친구가 되어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누구나 다 그렇듯이 존도 자신이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처지를 말합니다. 어렸을 때 버려졌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고, 자기를 이렇게 만든 놈은 나타나지도 않고 등등.
그러나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의 말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듣습니다. 그는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합니다.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라고. 도니는 에이즈 환자로 죽을 날이 머지않았고 어떤 사람은 말기 암 환자이며 또 어떤 사람은 그보다 더 어려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술을 끊기 위해서는 이전의 삶을 흘려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방법이 ‘용서’입니다. 존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니는 말합니다. 그걸 할 수 없다면 당신이 죽는다고. 존은 살기 위해 용서를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쌀쌀맞게 대한 사람들, 자기를 키워준 양부모, 그리고 죄책감에 삶이 망가져 있는 덱스터까지. 다 자기 잘못으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하고 오히려 용서를 청합니다. 어머니를 찾을 수 없자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놓고 어머니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어머니를 창녀라 부른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자기 자신까지 용서합니다.
그는 그림을 다시 시작합니다. 처음엔 신문에 실린 풍자만화를 보고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쇄도합니다. 만약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또 술을 마셨다면 그의 인생은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흘려보내는 것을 배웠습니다. 흐르는 물에는 녹조가 끼지 않습니다. 그는 그런 모든 상황을 잘 받아들이며 발전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 앞에서 연설하는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영화 ‘돈 워리’(2019)의 내용입니다. 영화이지만 실화이고, 그냥 한 사람의 인생 여정 극복기가 아닌 많은 말을 하는 영화입니다. 과거를 놓지 못하고 있으면 미움이 끼게 되고 그러면 삶이 망가집니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사람을 사랑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누군가 새로운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내가 흘려보내지 못해 잔뜩 끼어버린 녹조를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용서하기 위해 용서가 된 것이 아니라 알코올을 끊으려다 용서까지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미움은 알코올과 맥락을 같이 했습니다. 용서 먼저 하려고 하면 막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코올을 끊는 것이 용서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알코올을 끊게 했지만, 그 용서는 알코올을 끊으려고 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용서 이야기를 하시며 달라는 대로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지금 내가 집착하는 것을 놓아버리면, 곧 술을 끊으려고 노력하면 용서까지 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흘려보내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시작도 못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돈을 좋아해서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다 사라질 것이라 여기고 가난한 사람을 돕다 보면 돈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그러면 그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이 덜 미워집니다.
세상 집착을 먼저 흘려보냅시다. 이는 마치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그 흐르는 강물에는 과거의 상처나 미움이 머물러 있으려고 해도 내 집착과 함께 흘러갑니다. 흐르는 물에는 녹조가 끼지 않습니다. 용서보다 집착에서 먼저 벗어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미국은 인종차별이 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그 차별이 더 대단했습니다. 심지어 성당도 백인이 다니는 성당, 흑인이 성당으로 따로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흑인 아주머니가 시내 근교에 있는 결혼식장에 갔다가 근처의 성당에 들어가 주일미사에 참석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당은 백인이 다니는 성당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인 신자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머니, 이곳은 백인들을 위한 전용 성당입니다. 빨리 나가주시기를 바랍니다.”
쫓겨난 이 흑인 아주머니는 너무나 서러웠습니다. 주님께서도 차별한다는 생각에 펑펑 울었지요. 바로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아, 나도 안 가는 그 성당에는 왜 가서 그런 꼴을 당하느냐? 앞으로 다시는 그런 성당에 가지 마라.”
차별하는 사랑이 있는 곳에 과연 하느님이 계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차별을 하시겠다면 2,000년 전 그렇게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신 그분의 말씀은 “사랑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는 동안에도 당신을 중상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황금률이 크게 와 닿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루카 6,31)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복하려는 마음을 잠재우고, 이웃에게 자비를 어떻게 베풀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보복하는 마음, 차별하는 마음, 사랑 없는 마음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과 함께하겠다고 기도하시는 분은 무엇보다 먼저 나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실 수 있는 마음일까요? 하느님께서 계실 수 없는 마음일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삶의 의미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고, 삶의 목적은 그 재능으로 누군가의 삶이 더 나아지게 돕는 것이다.
- 파블로 피카소
판단은 그만
치매 시어머니를 모시며 간호했던 며느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남도 아니었는데도 다른 가족의 부탁과 권유로 시어머니를 모셨다고 합니다. 치매 환자인 어머니와 함께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남들에게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모셨습니다.
시간이 지나 갑자기 시어머니께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조금 더 최선을 다해 모시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형님 부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호했으면 훨씬 더 잘 모셨을 텐데….”
10년 넘게 어머니를 모시는 동안 가끔 와서 어머니와 대화 좀 나누다가 돌아간 것 외에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는데도 이런 말을 하니 너무 서운했습니다.
자신은 옳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으로는 분쟁이 절대 끝나지 않습니다. 형님 부부의 말도 잘못이지만, 또 자신 역시 형님 부부에 대해 틀렸다고 생각한 것 역시 잘못입니다.
판단 자체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자체를 인정할 수 있을 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의 판단 역시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이 판단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미움은 미움으로 증오는 증오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 38)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이다. 감사의 맑은 가을이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는 소중한 사람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너를 용서하는 것이 나를 용서하는 것이다. 마음의 되질은 서로가 같다. 미움은 미움으로 증오는 증오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마음을 달래어주시는 주님이시다. 마음을 아는 것이 삶을 아는 것이다. 더 소중한 것은 마음의 실천 사랑과 용서이다.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요즈음이다.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서 우리 마음은 되살아난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주님의 마음 용서가 있다. 몸과 마음의 의지처가 되어주시는 주님이시다.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은 주님의 마음뿐이다.
마음을 새롭게 빚어내시는 주님께 단죄와 판단의 되질을 내려놓는다. 사랑과 존중 용서와 감사를 다시 배운다. 외롭고도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있다. 마음의 실천이 용서의 가을이며 사랑의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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