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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9월 7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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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

 

 

21년 9월 7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밤새워 기도하시고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 열둘을 뽑으시고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9월 7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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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콜로 2장 6-15절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10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11 
여러분은 또한 그분 안에서 육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15 
권세와 권력들의 무장을 해제하여 그들을 공공연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이끌고 개선 행진을 하셨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네.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나날이 당신을 찬미하고,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네.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6장 12-19절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믿는 이들을 생명의 말씀과 천상 성사로 기르시고 새롭게 하시니 사랑하시는 성자의 크신 은혜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7일 (화)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7일 (화)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7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하여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

 

예수님께서는 자주 혼자 기도하셨는데, 특히 중요한 일을 앞두시고는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신 뒤 열두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된 사람들이지만, 우리 눈에는 제자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부족해 보이지만, 그들은 부족하기에 겸손하고, 죄를 용서받은 이들이기에 충실하고 거룩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대화이며, 성령과 함께 머무르시는 시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하여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나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를 위하여 시간을 내야 합니다. 또한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도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고, 주님을 찾고, 주님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청하는 것을 주시고, 찾는 것을 얻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면 은총으로 당신을 열어 주십니다(마태 7,7-8 참조).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라고 말합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실천하며 믿음을 굳게 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감사와 기쁨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헐떡이는 나는 아닌지

 

오늘 콜로새서는 주님 안에서 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 안에서 사는 삶'으로 주제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주님 안에서 살라고 하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주님 안에서 살지 않아도 되겠지만 주님으로 받아들인 한 주님 안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인데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요. 

말로는 주님이라고 하면서 사는 것은 주님과 무관하게 살거나 프란치스코가 그래서 추궁받았듯이 다른 것들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면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 사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바오로 사도는 우선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살라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살기는 하는데 늘 불평불만이거나 원망하며 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살면 주님께 불충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불행한 것이고,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야 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날 위해서지요.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는 것은 그릇으로 치면 물이 차고 넘치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대만족인 것이고 그러기에 이렇게 사는 것이 참행복이요, 요즘말로 하면 찐-행복이며, 이런 사람이라야 참으로 찐-사람이지요. 

사실 넘치게 행복한 사람에게서만 감사가 나오는 법이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여러분은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또한 그분 안에서 육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아 사는 거라는 뜻인데 그리스도의 할례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할례란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바오로 사도는 또한 얘기합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여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할례는 포경수술에 불과하고, 이런 포경수술은 건강이나 청결의 의미 외에는 다른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세례의 의미도 머리에 물을 뿌리거나 물속에 잠기는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지요. 

이것은 물고기로 치면 물 밖에서 살지 않고 물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특히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연명하는 것이고 생기와 활기 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꾸역꾸역 사는 것이겠지요? 물 밖의 고기처럼 헐떡이며 사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 관계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이유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산에서 밤새 기도하시고 내려오셔서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밤새 아버지께서 교회의 열두 주춧돌로 누구를 원하시는지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당신 뜻대로 사도들을 정하시지 않고 아버지 뜻을 물으셨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아버지 때문에’ 만들어진 관계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내가 제자들을 뽑으면 내 의지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 의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 아버지가 뽑아주셨으면 아버지 때문에 그 사랑이 식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그만큼 헤어지며 삽니다. 그 이유는 그 관계가 하느님이 맺어주신 것인지 밤새 기도할 수 있는 자세가 안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관대로 관계를 맺고 자기 주관대로 관계를 정리합니다. 혹은 상황이 불안할 때 쉽게 상황 탓을 하며 헤어집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그 고리가 너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관계의 고리를 ‘아버지의 뜻’에 두신 것입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1차 세계 대전과 볼셰비키 공산 혁명의 배경하에 쓰였습니다. 내용이 정치적이고 상징적이어서 혁명 후 핍박을 받기도 하였지만, 오늘은 그런 상징은 배제하고 줄거리만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유리 지바고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부유한 친척 집안에서 키워집니다. 그리고 소꿉친구인 그 집안의 딸 토냐와 결혼을 약속합니다. 지바고는 모스크바 의대를 나와 의사이고 시인으로서 전도유망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온 토냐와 결혼하여 파티를 즐기는 삶을 살던 도중 운명의 여인 라라와 만나게 됩니다. 
라라는 어머니의 정부와 같았던 꼬마로프에게 추행을 당합니다. 그녀는 핍박받는 민중이 대변인으로 혁명에 가담이라도 하듯 자신을 그동안 괴롭혀 왔던 로마노프에게 총을 쏩니다.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어서 지바고가 치료해주고 사건은 마무리됩니다. 첫눈에 반하기는 했지만, 토냐와 약혼한 사이였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짧은 만남은 끝이 납니다. 

라라도 애인이 있었는데 구소련을 지지하는 파샤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라라와 결혼하였지만, 꼬마로프에게 그런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에게 온 것을 알고는 군입대를 하여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합니다. 라라는 자신의 남편을 찾기 위해 간호사로 전쟁에 참여하는데 이때 군의관으로 참전 중인 지바고와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파샤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라라와 지바고는 사랑에 빠집니다. 라라는 평민 출신으로 귀족의 딸인 파샤가 줄 수 없는 무언가를 지바고에게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둘은 헤어져 모스크바로 돌아옵니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부유층인 지바고는 숙청 대상자 명단에 올라있었습니다. 그가 발표한 감성적인 시들 때문이었습니다. 지바고는 모스크바를 떠나 아내와 함께 우랄 지방의 오지 바르키노에 은둔합니다. 그곳에서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 도서관에서 책을 찾으러 간 지바고는 또 운명처럼 그곳에서 사서로 일하는 라라를 만납니다. 그 넓은 러시아에서, 그것도 시골 은둔지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라라의 집에서 둘은 또다시 만납니다. 

하지만 아내가 임신하자 그의 생각은 바뀝니다. 프랑스로 가족과 함께 망명하려고 결심하고 헤어지자는 말을 하러 라라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의사가 필요했던 빨치산에게 납치되어 강제로 근무하며 오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샤는 지바고가 자신을 떠난 줄 알고 아이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합니다. 가까스로 탈출하여 바르키노로 돌아온 지바고는 유일하게 라라를 만나게 됩니다. 라라는 지바고가 떠난 뒤에도 계속 편지를 쓰며 지바고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두 연인은 다시 만나 또 행복한 삶을 삽니다. 

그러던 중 꼬마로프가 찾아옵니다. 예전에 라라가 총을 쏜 인물입니다. 그는 라라를 잊지 못하고 거짓말을 합니다. 사실 파샤는 공산당원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했기 때문에 지금 라라도 위험한 상태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바고는 어쩔 수 없이 라라의 안전을 위해 그녀를 원수와 같은 꼬마로프스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뒤 파샤가 라라를 찾아왔고 그녀가 꼬마로프와 떠나버린 것을 알고는 자살합니다. 

지바고는 공산당 간부가 된 이복형의 도움으로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 마리나라는 여자를 만나 아이도 낳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생을 너무 한 탓인지 라라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쫓아가다가 죽고 맙니다. 

오랜 시간 뒤 유리 지바고의 이복형은 우연히 수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한 젊은 여성이 자기 이복동생 지바고의 딸임을 알아봅니다. 이것이 장군과 그의 조카인 타냐의 대화입니다. 장군이 묻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됐느냐?”

타냐가 주저하며 울먹거리다가 겨우 대답합니다.

“사실은 불길 속에서 아버지가 내 손을 놔 버렸어요.”

장군은 잠깐 숨을 고른 후에 대답합니다.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꼬마로프스키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너의 친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다. 진짜 아버지라면 불길 속에서도 자녀의 손을 놓지 않는 법이다. 아버지란 존재란 그런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손을 놓지 않는 분이 아버지다.”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의 손을 끝까지 잡고 계셨던 이유는 당신이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맺어주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하나같이 상황이 자신의 사랑을 이어준다고 믿었습니다. 꼬마로프스키는 그 상황에 거짓말까지 사용하며 라라를 차지합니다. 닥터 지바고는 운명 같은 만남이 하늘의 뜻처럼 생각했지만 꼬마로프의 거짓말에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 때문에 프랑스로 떠난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더는 찾지 않습니다. 라라의 남편 파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랑보다 자신이 지닌 이념에 충실했습니다. 토냐도 남편 유리 지바고가 자신을 떠나버렸다고 생각하고 남편을 떠나버립니다. 

정말 인간 중심적인 사랑은 인간의 욕망에 너무 쉽게 흔들리고 그런 욕망 안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게 되고 또 자신들도 그런 욕망에 끌린 사랑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관계를 위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밤새워 기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쉽게 만나고 쉽게 떠나고 아이들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성장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밤새워 성체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의지가 생깁니다. 

따라서 더 사랑하기 위해서 내 없는 의지를 짜낼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사랑하는지 생각하고 그 누구를 하느님으로 두어야 합니다. 부모 때문에 사랑하는 형제들은 아무래도 부모가 다 돌아가시면 그 인연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바로 손을 놓아버립니다.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살아계신 한, 그리고 자신이 하느님을 믿는 한 그 관계를 쉽게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만남이 참 하느님 뜻인지 여쭤보기 위해 밤새워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어쩌면 이것이 끝나지 않는 참사랑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의 충실함으로 과거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해

 

성인이 되어서도 남의 눈치만 보면서 힘들게 사는 자신이 너무 싫었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로이트의 책을 통해, 특히 유아기를 비롯한 과거가 현재 자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을 통해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려졌습니다. 
 
어머니에게 자주 맞은 기억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을 맞으며 대성통곡하며 우는 아이의 모습이, 맞지 않기 위해 눈치 보는 아이의 모습이, 함부로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했던 아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지금의 자기 모습이 어머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찾아가 화를 냈습니다. 왜 나를 때렸냐고, 왜 나를 학대했냐고 따졌습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아주 힘든 상태였습니다. 일과 양육을 도맡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의 행동을 그냥 놔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들을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폭언을 들으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실 과거의 기억은 종종 조작됩니다. 이 형제님처럼 사랑의 행동은 지워지고 폭력의 무자비함만 기억될 수도 있습니다. 
 
종종 과거에 의해 나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금의 내가 과거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것이 틀렸기에 현재가 고통스러운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우리는 이 선택을 보면서 배신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왜 뽑았을까를 생각합니다. 배신할 것을 미리 알고서 뽑으신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필요한 제자들이었고, 그들을 뽑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 선택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산에 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까지 하십니다. 
 
이 과거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주님의 뜻에서 멀어진 유다 이스카리옷의 잘못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역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연연하는 삶이 아닌, 지금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으로 지금에 문제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아닌, 지금의 충실함으로 과거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택을 잘못된 선택인 것처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지금 모습 때문입니다. 주님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위대한 일을 위해서 대단한 도전이 필요하지 않다. 단지 순간순간의 작은 도전이 모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간다.

- 모션 코치

 

 

미래를 향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희망

 

한 회사 사장님이 신입사원들을 모아 놓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왜 현실에 안주하려고만 합니까?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를 보십시오. 모두 자기 집 차고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사장님의 긴 훈화가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에 한 신입사원이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차고라고? 우리 집에는 차고 없는데?” 
 
이 말을 듣고 다른 동료는 “차고는 무슨, 차도 없는데…. 아 맞다. 집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장님은 희망을 품으라며 과거의 이야기를 했지만, 현실은 과거를 아는 것만으로 희망을 품기 힘듭니다. 사실 희망은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또 남의 삶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미래를 향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희망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기도로 더욱 깊어진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 12) 

기도로 아침을 맞이한다. 기도는 새날처럼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이다. 기도로 다시 돌아가는 사랑의 시간이다. 기도가 사랑의 첫마음이다. 기도가 아름다운 것은 기도 자체의 거짓없는 진실함이다. 

어려운 상황에서의 최상의 방법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이다. 기도의 자세가 삶을 대하는 삶의 참된 자세이다. 기도의 의미가 삶의 의미로 이어진다. 예수님의 삶은 기도의 삶이었다. 

기도는 삶의 모든 시작과 모든 마무리로 드러난다. 예수님의 기도 안에 예수님의 간절한 삶이 있다. 예수님의 삶은 기도의 삶이셨다.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삶을 다시 깨운다. 하느님과의 일치로 우리를 깨운다. 

기도로 사도(使徒)들을 뽑으신다. 기도로 닮아가는 우리들 관계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기도로 더욱 깊어진다. 기도는 내적교감이며 변하지 않는 사랑이다. 사랑은 진실한 기도로 간절하게 이어진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게 하는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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