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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
21년 9월 6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으시고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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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콜로 1장 24-29절, 2장 1-3절
과거의 모든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를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려고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24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5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라고 나에게 주신 직무에 따라,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26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27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 나타난 이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28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29
이를 위하여 나는 내 안에서 힘차게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기운을 받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2,1
사실 여러분과 라오디케이아에 있는 이들, 그리고 내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모든 이들을 위하여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2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과 그들이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모두 얻고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화답송
내 구원,
내 영광 하느님께 있네.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희망이 오리니, 내 영혼아, 그분을 고요히 기다려라.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내 구원, 내 영광 하느님께 있네.
백성아,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이시다. 내 구원, 내 영광 하느님께 있네.
복음
루카 6장 6-11절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믿는 이들을 생명의 말씀과 천상 성사로 기르시고 새롭게 하시니 사랑하시는 성자의 크신 은혜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6일 (월)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6일 (월)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6일 (월)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일,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복음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배웁니다. 많은 이가 예수님께 찾아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하였습니다.
그 수가 오천 명이 넘는 때도 있었고, 길을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몰려들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아이가 봉헌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꺼이 받으시고 당신을 찾아온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요한 6,1-15 참조).
또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 올라가 당신을 바라보는 세관장 자캐오를 찾아내시고, 그와 그의 집안에 구원을 선사하셨습니다. 이에 자캐오는 가난한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하여, 그들을 현실의 어려움에서 구해 줍니다(루카 19,1-10 참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금 내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쉽게 지나쳐 버리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당신을 고발할 구실을 찾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도, 오그라든 손을 가진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 병자는 오그라든 손으로 말미암아 오그라든 마음까지 치유받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삶을 실천할 때, 우리는 진리로 나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음”을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금 이 자리에서 실천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가 채워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수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이 있다는 말씀, 자기가 대신 채우겠다는 말씀은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고난에 정말 부족함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함이 있어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기라도 한다는 뜻입니까?
우리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바오로 사도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남은 고난은 어떤 것입니까?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그리스도에게는 남은 것이 없지만 바오로 사도에게 남은 고난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하는 얘기지만 누가 아플 때 저도 아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파하지도, 대신 아파하지도 않으면서 생각은 그리하는 겁니다. 그래서 같이 아파하거나 대신 아프지 않은 것이 미안합니다.
사랑이 그리 크지 않은 저도 이런 부채감이나 미안함이 있는데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아픔, 공동체의 아픔, 이웃의 아픔에 대한 부채감이 컸을 것이고, 이 고난에 자기가 어떤 식으로든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뿐이라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이 채우려는 것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리스도를 생각지 않고 인간적인 사랑만 하는 사람도 저처럼 이 정도의 사랑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바오로 사도의 생각 안에서 그리스도는 한 번의 수난으로 당신의 수난은 끝났다고, 당신이 하실 것은 이제 더 이상 없다고 하실 분이 아니지요.
어머니의 사랑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지요. 어머니의 사랑은 출산할 때 한 번 겪는 고통으로 그치지 않고, 눈을 감는다고 그치지 않으며 자녀들이 고통을 겪는 한 고통은 계속되지요. 어머니에게 자식으로 인한 고통이 멈추면 사랑도 멈추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인간 고통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끝나지 않고 그래서 계속될 것인데 그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바오로가 채워야 할 남은 고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계속되는 수난과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수난이 바로 교회의 일꾼인 바오로 사도의 남은 수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남겨진 그리스도의 수난, 그래서 내가 채워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수난은 무엇인지 무겁게 성찰하며 교회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게 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율법이 있는데 “예수님이라면?”은 왜 또 필요한가?
오늘 복음도 율법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법만을 지키려는 이들과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대결합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이를 안식일 회당 안에서 고쳐주십니다. 안식일 법으로는 일해서는 안 되는데,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일이기 때문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는 그것이 죄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 머리 안에는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만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간단한 물음에도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일’은 무조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빠진 오류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오히려 자아만 더 커지게 할 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내 뜻과 반대되는 주님의 뜻입니다.
의사 김범석 씨는 이런 환자도 접해보았습니다. 폐암 말기 환자였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이혼했고 자식도 없었습니다. 동거인이 있었지만 법적으로는 부인이 아니었고 환자의 병세가 깊어지자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한마디로 보호자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한동안 혼자 병원에 다니며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암이 진행되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화장실도 혼자 가기 어려워 간병인을 두어야 했고 병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호스피스 상담을 하며 남동생이 한 명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4~5년 전쯤 동생이 사업을 한다며 2억을 꿔갔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돈을 갚지 못했고 그 뒤로 서먹해져 연락도 끊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분하고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호스피스 팀의 노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동생에게 연락이 닿았고 형의 소식을 모르던 동생은 어느 날 형을 찾아왔습니다. 그 환자를 찾아온 사람은 동생이 처음이었습니다. 놀란 표정으로 문 앞에 서서 형님을 불렀습니다.
“형님….”
의사는 형제간의 상봉을 위해 뒤로 약간 물러섰습니다. 동생은 형에게 다가갔습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피골이 상접한 형의 몰골을 보며 동생은 말을 하지 못하고 눈시울만 붉혔습니다. 형제는 서로 그렇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2억 원이라는 돈과 원망과 세월이 할퀴고 간 두 사람 사이의 틈은 생각보다 깊어 보였습니다.
한참 뒤, 환자가 동생에게 할 말이 있는지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숨이 차서 목소리를 크게 낼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동생이 형의 얼굴 쪽으로 허리를 숙였습니다. 형은 동생에게 있는 힘을 대해 말했습니다.
“너… 내 돈… 2억… 갚아라….”
병실에서 두 형제의 화해를 기대하고 있던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훈훈해지던 병실의 공기가 얼어붙었습니다. 그는 다시 천천히 말했습니다.
“내 돈… 2억… 갚으라고….”
동생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은 이미 말라버렸고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동생은 더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환자도 동생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동생은 간병인을 보내주었고 그 비용은 본인이 부담했습니다. 며칠 후 환자는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 갚으라는 말이 환자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습니다.
[출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김범석, 흐름출판]
이 이야기를 들으니 임언기 신부님의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냉담하던 어떤 간암 말기 암 환자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권했지만, 그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는 신부님 등 뒤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 죄 없어.”
누구에게 죄가 없는 것일까요? 자기 자신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율법을 잘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 율법을 지켰을까요? 자기 자신을 위해 지킨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율법’일까요, ‘뜻’일까요? 율법은 나의 자아를 죽여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율법을 자기를 키우고 교만하기 만드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그런 부류입니다. 물론 위 예화의 환자도 그렇습니다.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 것은 율법입니다. 자신은 피해자일 뿐 죄가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있으니 빌린 돈을 갚으라 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의 뜻’도 그럴까요?
‘지금 주님의 뜻’이란 ‘예수님이라면 지금 어떤 마음이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셨을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은 ‘주님의 기도’에 다 들어있습니다. 만약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렇게 기도를 단 한 번만 할 수 있었다면 율법주의자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아 숭배교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주님의 뜻’을 매 순간 찾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뜻’이 바라 ‘나 자신’이기 때문에, ‘예수님 뜻’을 따른다는 말은 나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가 된다.’라는 뜻입니다.
예배 도중 찬양대가 마지막 찬송을 부르려는 순간 한 남루한 복장의 사내가 예배당에 들어섰습니다. 사내는 곧바로 통로를 걸어 강단 앞에 선 후 떨리는 목소리를 말했습니다.
“저는 몇 달 전에는 활자를 뽑아 조판하는 인쇄공이었습니다. 새로운 인쇄기가 도입되자 직장을 잃고 며칠 동안 거리를 헤맸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배웠겠지요. 그러나 저를 위로해준 사람은 목사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방금 찬송 ‘주와 함께 가려 하네’를 부르셨지요. 과연 그 의무가 무엇인가요?”
사내는 말을 마치자 곧 실신했고 며칠 후 목사의 집에서 이런 말을 하며 운명했습니다.
“예수님이셨어도 당신처럼 하셨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맥스웰 목사의 설교도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미사여구도 예화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묻지 않고는 어떠한 결정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합시다. 우리도 한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쓰이게 된 책이 찰스 셸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In His Step)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윤리 주의자가 됩니다. 하느님은 윤리 주의자를 구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를 찾고 계십니다. 윤리는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본성은 유일하게 ‘뜻’으로만 변화됩니다. 뜻을 바꾸면 본성이 바뀝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유일한 참 자녀인 그리스도의 뜻으로 나의 뜻을 바꾸지 않는 이상 자아 숭배교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뜻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 단순한 질문을 할 때만 인성의 문을 닫고 신성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불편함의 시대
지금 이 시대를 ‘불편함의 시대’라고 말하는 어떤 학자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보면서 많은 정보를 획득하지만, 이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데 익숙합니다. 그 이유가 스스로 그 내용을 불편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더욱 더 불편할수록 더 잘 아는 사람이고 더욱더 남을 잘 비판할수록(깎아내릴수록) 똑똑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입니다.
남을 비판하는(부정적으로) 사람은 사실 제대로 아는 것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집단의 목소리에 이끌려서 아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지요.
세상은 더 나은 곳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좋은 곳이 되어야 하며, 더 나은 곳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가 외부에서만 이루어질까요? 나 자신의 변화에서부터 세상의 변화는 시작됩니다. 부정적인 변화를 통해서는 긍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는 맞고 상대는 틀렸다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비판은 변화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 버립니다. 따라서 이제 어떤 경우에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함께 변화하는 우리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부정적인 생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자체를 부정적인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하느님의 큰 사랑을 당연히 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못된 사람이고, 그저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예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는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쳐 준다면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라서 절대로 하느님 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안식일 법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랑이 안식일 법보다 먼저였습니다. 당시에는 병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었지요. 따라서 병의 치유는 죄가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느님은 죄를 깨끗하게 사라지게 하는 사랑 그 자체임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치유는 안식일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부정적이고 악의적인 해석 모두를 꾸짖고 있습니다. 이 꾸짖음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사랑을 기억하면서, 사랑의 삶을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행동을 통해 우리는 가장 최고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생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인생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3/4이 죽어 있는 상태다.
- 버트런드 러셀
도파민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불리며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주어지는 보상 호르몬이 바로 도파민입니다. 이 도파민이 부족하면 우울증, 하지 불안증, 파킨슨병을 앓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파민 생성을 위한 노력만 하면 될까요? 도파민이 과다하면 중독문제가 일어납니다. 도파민은 자극적인 활동에서 더 많이 분비되는데, 이로 인해 더 자극적인 행동을 찾는다는 것이지요. 도박, 마약, 쇼핑 중독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도파민 과다로 집중력 저하, 과잉행동 등이 나옵니다.
도파민도 슬로우푸드 같은 도파민과 패스트푸드 같은 도파민이 있습니다. 슬로우푸드 같은 도파민은 행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만족감이 늦게 오는 지연 보상이란 특징이 있습니다. ‘고생 끝에 즐거운 일이 있다’라는 의미에서 고진감래형 도파민이라고도 불립니다. 산 정상에 오르기, 오랜 시간의 연습 등을 통해 나오는 것으로 좋은 도파민입니다.
패스트푸드형 도파민은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바로 공급받는 도파민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약입니다.
어떤 도파민을 수용해야 할까요? 슬로우푸드형 도파민을 수용해야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인생의 모든 문제는 오그라든 마음에서 시작된다.
"손을 뻗어라."(루카 6, 10)
가혹한 이시간 속에서도 손을 뻗으면 우리의 손을 잡아주실 주님이 계신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우리들 만남이다. 살면서 삶의 교훈을 얻게된다. 오그라든 마음을 펴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복음은 오그라든 삶에서 손을 뻗는 삶으로 우리가 바뀌는 것이다. 손을 뻗는 삶이란 자신을 사랑하는 용기있는 삶을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다. 손을 뻗는 내면의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오그라든 마음에서 시작된다. 자기감정과 요구사항을 표현할 때 오그라든 관계는 회복될 수 있다. 손을 뻗어 자신을 돌보고 만남을 돌보아야 할 우리들 시간이다.
손을 뻗으니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우리가 있다. 손을 뻗는 기쁨이 삶의 기쁨이다.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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