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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9월 4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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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

 

 

21년 9월 4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뎌 내며, 우리가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9월 4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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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콜로 1장 21-23절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 없게 해 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21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22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23 
다만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6장 1-5절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4일 (토)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4일 (토)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4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바리사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사도 22,3; 26,5 참조). 그러나 다마스쿠스 사건을 체험한 뒤(사도 9,1-19 참조) 그는 자신이 받은 모든 종교적 특권과 윤리적 노력이 하찮다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다만 옛것이기에 버린 것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을 자신들의 위선으로 왜곡하여 하느님께 가는 구원의 길을 막았고 그들의 행동은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 ‘물질적인 것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하느님 계명의 본질적인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갈라 1,12)이기에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통하여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어겼다며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참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도 중요하고, 그 정신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우리’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몸소 오시어 구원하시고자 한 대상인, 바로 우리 ‘사람’인 것입니다. 

혹시 사람보다 일을, 돈을, 명예를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의 어떤 것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지는 않나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곧 사라져 버릴 것에 믿음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고 그분께서 만드신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안식일에 해야 할 것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내던 제자들이 밀을 뜯어 먹어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과 관련하여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라고 따지는 것이 발단이 되어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으로 매듭짓는 내용입니다. 

이 복음은 참으로 수없이 읽은 것인데 이번에는 안식에 해서는 안 되는 일만 있는가? 하는 생각에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모세오경에서 안식일과 관련한 규정들을 모두 조사해봤는데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부분이고 율법에서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은 39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하라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한 마디로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니 거룩히 지내라는 것인데 몇 가지 인상적인 규정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안식일은 나 주님이 너희를 성별하는 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나와 너희 사이에 대대로 세운 표징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다. 이날에 일을 하는 자는 누구나 제 백성 가운데에서 잘려나갈 것이다." 

이 말씀을 제가 이해한대로 풀이하면 안식일은 거룩한 날인데 왜 이날을 마련했냐 하면 이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성별하기 위해서이고, 그래서 이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자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만 이날에 일하는 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돼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경우 주일을 어떻게 지내는지 보면 진성 그리스도교 신자인지 무늬만 그리스도교 신자인지 대충 알 수 있지요. 

우리 신자들 중 상당수가 주일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사람도 주일 미사 빠지지 않는 정도이며 대부분은 거룩한 날이라기보다는 쉬는 날이거나 노는 날입니다. 쉬는데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없이 쉬거나 노는 거지요. 

안식일에 해야 할 것을 얘기하는 것 중에 특이한 것은 다음 말씀입니다. 

"이날은 너희에게 안식일, 곧 안식의 날이다. 너희는 고행을 해야 한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안식의 날인데 고행을 해야 한다니. 

그런데 이 말씀은 레위기 16장 속죄일과 관련한 규정으로서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러 오면서 아무렇게 와서는 안 되고, 몸과 맘을 깨끗이 씻고, 죄를 씻기 위한 제물도 바쳐야 함을 얘기하면서 고행도 해야 한다는 맥락입니다. 

제 생각에 공심재 또는 공복재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요즘은 영성체 전 적어도 한 시간 아무것도 먹지 않지만, 옛날에는 영성체 전 하루를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요. 

거룩한 주님을 모시기 위해 다른 무엇도 먹지 않는 것인데, 안식일도 먹고 노는 날이 아니고 거룩한 날이니 욕망을 절제하라는 뜻일 겁니다. 

또 다른 말씀은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의 성소를 경외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안식일 규정과 성소 규정을 떼어서 이 말씀을 이해해도 되지만 저는 오늘, 안식일에 성소를 경외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각자의 집에서 또는 혼자 거룩히 지킬 수도 있지만 주일을 성당에서 함께 전례를 하며 지내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겁니다. 

그리고 요즘처럼 함께 주일 미사를 봉헌할 수 없을 때 집에 가만히 있지  않고 성소를 방문하여 성체 조배나 말씀의 전례를 하며 지낼 수도 있겠지요. 

어쨌거나 저는 오늘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거룩하신 하느님과 성소 안에서 주님 사랑 안에 잠기는 날이 되고,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웃도 사랑하는 날이 되어야 함을 묵상해 봤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인의 세 부류 : 바리사이 - 율법학자 - 제자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어제 복음은 단식에 대한 원칙주의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되는 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 법에 관해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남의 밭에서 밀이삭을 훔쳐 먹은 당신의 제자들을 두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말은 크게 두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겠는데,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주인이시기에 율법을 지배하는 분이시지, 그것에 매이는 분이 아니라는 것과 율법을 그 주인을 위해 지킨다면 그것이 바로 참다운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대치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세 부류 모두 율법에 충실해지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율법을 지켜 안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당신 제자들뿐이라고 하십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먼저 바리사이는 율법적인 ‘행위’에 집중하는 이들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율법의 행위가 자신이라고 여기는 이들입니다.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면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집중합니다. 이들은 ‘위선자’라 불립니다. 

그다음 율법학자는 ‘원칙주의자’입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꼭 해야 하는 의무만 철저히 수행하면 된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율법 조항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독선적일 수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율법에 어긋나는 삶을 살지 않지만, 자신처럼 살지 않는 타인을 심판합니다. 물론 바리사이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참다운 율법의 정신을 잃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뜻에 집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하고 허락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볼 때 이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라 예측 불가입니다. 심지어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 마음의 안식을 누리는 이들입니다. 

이제 소설 하나를 소개시켜 드릴 텐데 누가 바리사이고 누가 율법학자이며 누가 주님의 제자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아버지의 강요로 돈도 많고 나이도 많은 의사 칠링워드와 결혼합니다. 헤스터는 남편의 권유로 영국을 떠나 먼저 미국 보스턴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합니다. 곧 뒤따라오겠다던 남편이 세월이 꽤 흘러도 오지 않자 그 마을의 인기 있는 목사인 딤스데일과 불륜을 맺고 딸 펄을 낳습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가 아기를 낳자 동네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에 붉은 ‘A’를 새기고 3시간 동안 교수대 위에서 딸을 안고 만인의 구경거리가 되게 합니다. ‘A’는 ‘간통’을 의미하는 ‘Adultery’의 약자입니다. 그 마을에 사는 동안 그녀는 항상 가슴에 붉은 ‘A’를 붙이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절대 자기 불륜의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A’를 ‘Able’(능력 있는)로 읽을 정도로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돈을 벌어가며 딸 펄을 잘 키웁니다. 

그러던 중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드가 도착합니다. 아무도 칠링워드가 헤스터의 남편인 줄 모릅니다. 칠링워드는 헤스터의 불륜을 파헤쳐 결국엔 그 상대가 존경받는 딤스데일임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그를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기 전까지 그는 그 괴롭힘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딤스데일은 속이 썩어들어갑니다. 

7년이 지난 뒤 헤스터는 딤스데일에게 함께 도망치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딤스데일은 이미 죄책감에 속이 문드러져서 육신까지도 망가졌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딤스데일은 헤스터가 섰던 그 교수대에 올라 설교를 마치고는 자신이 헤스터의 내연남이었음을 밝히고 죽습니다. 그의 옷 속에도 붉은 ‘A’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바리사이는 누구일까요? 바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솔직할 수 없었던 딤스데일 목사입니다. 율법을 어겼지만, 그 책임을 사람들만 모르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소설에서는 설교 중에 간간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더 겸손하게 보이게 만들어 인기를 더 얻게 됩니다. 남이 볼 수 있는 행위에만 치중하는 이는 절대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딤스데일이 마지막에 자신의 죄를 사람들 앞에 고백하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는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게 하려고 주홍글씨를 헤스터만 달고 살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바리사이는 솔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율법학자는 누구일까요? 헤스터의 남편인 칠링워드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딤스데일의 불륜관계를 알아채고는 목사를 계속 괴롭힙니다. 그래서 그가 죄책감으로 쓰러지게 만듭니다. 

그는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봐 줄 수 없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가 정의를 실현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아내와 딤스데일을 용서하고 다시 잘 살아나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헤스터일 수 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딸을 잘 키워야 했기에 그녀는 죄인이라는 명패를 가슴에 달고 열심히 일하여 현 상황에서의 최선을 찾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지금 이 상황에서의 최선은 남에게 잘 보이는 것이고 원칙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황에 발 빠르게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합니다. 헤스터와 같이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참 주님의 종입니다. 

성당에서도 이런 세 부류의 신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신부님이 볼 때만 열심히 봉사하는 척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행동이 달라지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느 부류에 속할까요? 당연히 바리사이입니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반면 누가 보든 말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융통성이 없습니다. 자신처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함으로써 자신이 타인들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율법학자입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본인이 죄인으로 찍힐 것을 알면서도 바로 그 순간 해야 할 일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율법이고 뭐고 없습니다. 율법의 주인은 하느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몸 – 이성 –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몸에 집중하는 사람은 바리사이입니다. 사람은 몸이 다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시선에 집중하는 삶을 삽니다. 

이성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믿습니다. 이들이 율법주의자입니다. 율법을 신봉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행위입니다.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뜻’에 집중합니다. 뜻은 행위의 의도와 목적에 해당합니다. 그 행위가 누구의 뜻,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집중합니다. 아무리 선한 행위를 했더라도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일 때 그런 행위는 하느님께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를 당신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공부를 참 잘하고 왔을 때,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를 했다고 하거나, 그냥 자기만족을 위해 공부했다고 하면 아버지 마음은 어떨까요? 기껏 먹여주고 키워주었더니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한다면 계속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별로 안 생길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보답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할 때 자녀가 사랑스럽습니다. 

바리사이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과 같고,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율법학자요 원칙주의자이며, 아버지를 위해 공부한 아이는 주님의 종이요 제자입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누구도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굳이 판단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이 세 기준으로 하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안식일의 주인

 

갑곶성지에 살다 보면 ‘죽음’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지 안에 봉안당이 있어서, 거의 매일 안치되는 고인을 위한 안치 예식을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더 가까이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언젠가 죽을 것이 확실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에 늘 불안한 미래로 바라보는 우리입니다. 
 
우선 이 세상 안에서 나의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많이 남든, 얼마 남지 않든 이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해 불안함을 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만 계속해서 생각하면 오늘이란 하루가 공허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허한 오늘을 만들지 않으려면 미래를 오늘과 철저하게 분리해야 합니다. 
 
미래는 행복으로 가득 찬, 희망의 미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미래가 없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살기 위해서는 지금을 잘 살아야 합니다. 부정적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주저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으로 미래를 바라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 몇 사람과의 안식일 논쟁은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안식일 논쟁의 첫 번째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향해 적대적이지 않았을 때 벌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어서 안식일 법을 위반했다고 보는 것은 억지가 아니라, 당시에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편협된 사고를 하면서 안식일을 만드신 하느님을 속 좁으신 분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너무나 존경하는 다윗 왕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다윗 왕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서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었습니다. 
 
율법에 분명하게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다윗을 사랑했던 하느님은 이를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도 이런 그의 행동을 참성자요 예언자로 행동했기 때문에, 옳고 바르며 칭송받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물며 성자이신 예수님은 어떨까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계속해서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희망을 두어야 하는 미래, 또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미래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그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포하십니다. 즉, 종이 주인의 말을 철저하게 듣고 따르듯이, 주님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희망찬 미래가 펼쳐집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은 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몰입에서 온다.

- 토드 벅홀츠

 

 

기다려줘서 고마워.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이때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대부분 “미안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은 이 사과가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지난 약속에도 늦은 것이 기억나면서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이 효과적이고 기다린 사람에게 기쁨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다음의 말이 최고의 정답이라고 합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감사의 표시입니다. 이 감사의 말을 들은 사람은 자신이 상대에게 했던 공헌감을 느끼면서, 먼저 나와 기다린 것이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감사의 인사는 그냥 인사치레가 아닙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며, 상대의 말과 행동에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도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존중하기에 또 주님의 일에 큰 의미가 있기에 당연히 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기쁨이 안식일의 진정한 기쁨이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카 6, 5) 

사람의 아들은 사람을 살리신다. 삶의 문제는 놓쳐버린 정체성의 문제이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랑의 존재이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에 수 많은 안식일의 율법조항이 마구 생겨난다. 

사랑을 모르는 것은 사람을 모르는 것이다. 가장 바른 길은 생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길이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참된 진리이다. 참된 사랑만이 참된 열매를 맺는다. 

안식일을 치유하시는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신다. 안식일은 구원을 향해 언제나 열려있어야 한다. 건강한 안식일의 삶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사랑이 핵심이다. 사람의 기쁨이 안식일의 진정한 기쁨이다. 사람의 아들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랑의 시간이다. 안식일은 나자신과 이웃에게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은 규정과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의 주인이신 주님이시다. 사랑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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