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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
21년 9월 2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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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콜로 1장 9-14절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 관한
9
소식을 들은 날부터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 곧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10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
11
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모든 힘을 받아 강해져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 기쁜 마음으로,
12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14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화답송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복음
루카 5장 1-11절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2일 (목)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2일 (목)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2일 (목)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믿음, 희망, 사랑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은 시몬 베드로는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두려움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는 말을 내뱉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뿐 아니라 그의 동생과 동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예수님을 그리워합니까? 얼마나 보고 싶어 합니까?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도 곧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와 같이 자신도 모르는 말을 하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불신을 버리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마르 9,24 참조), 신랑을 맞으러 나간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애덕을 통하여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고(마태 25,4 참조),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들의 믿음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처럼(로마 4,18 참조)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바탕으로 한 희망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가 준비해야 할 자세이며, 신자들이 살아가는 ‘덕’입니다. 언젠가 주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 사도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이렇게 말합시다. “주님, 이 순간을 위하여 제 삶의 등불을 밝히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만족의 방향 틀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 신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 곧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그 지식이 자라기를 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 충만하도록 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오늘 바오로 사도처럼 형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충만하지 못할 때 우리는 늘 욕심부릴 것이고 불만을 달고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끝마다 욕심을 비우라고 서로 얘기합니다. 그만큼 욕심 비우기가 잘 되지 않는다는 표시이고, 비웠다가도 다시 욕심을 부리고 채우기 때문이지요.
충만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이란 결핍을 채우려는 내부 기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만복 곧 배가 부를 때는 식욕이 전혀 없다가 배가 고프면 식욕이 생기고 어떻게든 빈 배를 채우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배가 고프든 다른 무엇의 결핍이든 결핍이 있을 때 욕심과 함께 생기는 것이 불만이고, 이 불만은 그 욕심을 채우든 다른 것으로 대리 만족하든 그때까지 사라지지 않지요.
가장 흔한 대리 만족이 주전부리나 게임과 도박이나 쇼핑인데 그러나 이런 대리 만족으로는 불만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이제와 영원히 가장 완전한 불만 해결은 하느님으로 충만하고, 하느님 은총으로 충만할 때 뿐임을 아는 것이 우리의 지혜입니다.
어제는 우리 수도원에 살다가 나간 형제와 늦게까지 한 잔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산 것이 아닌데도 자주 수도원 사는 꿈을 꾼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수도원 생활을 그리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욕심이 많아서 수도원 떠났다고 후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만족하며 살 것을 그때는 욕심이 많아서 만족치 못하였고 그래서 수도원을 떠났다는 후회인데 그런데 그때는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았다는 걸까요?
말하는 뉘앙스로 보면 형제들과 수도원에 대한 불만이었고 그것은 더 완전한 형제들과 수도원이기를 바란 욕심 때문이었다는 건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 형제의 욕심이 실은 형제들과 수도원에 대한 욕심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을 소유하기까진 그칠 수 없는 욕심이었습니다.
왜냐면 저는 그 형제의 종교적 편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종교적인 방황을 한 것인데 제가 보기에 그 형제는 아오스딩 성인이 하느님을 만나기 전까지 방황했던 것처럼 그렇게 방황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형제 뿐 아니라 우리도 하느님으로 충만하기까지는 이런 저런 것으로 대리 만족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치 못하고 또 다른 만족들을 찾아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만족의 방향을 틀어야 함을, 세상으로 향했던 만족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틀어야 함을 깨닫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설교자의 포인트 : 거기가 정말 물 반, 고기 반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그물을 씻는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 설교를 하시고 다시 그물을 쳐볼 것을 권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물까지 다 씻었고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자존심상 그렇게는 못 하고 자기주장을 펼쳐야 당연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자기 배에서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내용을 들어서인지 그는 순종해봅니다. 그러자 놀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잡혀 깜짝 놀랍니다.
그물을 칠 때는 그저 한 번 속아본다는 마음으로 친 것이 분명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설교가 설득력 있었다는 뜻도 됩니다. 모든 설교자가 지향해야 하는 방향은 ‘일단 한 번’ 해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일을 해보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요? 부모가 “난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너는 한 번 읽어봐!”라고 하면 아이가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라고 할까요? 내가 해보고 확신이 생긴 것만 설득력을 가집니다. 설득하는 사람의 기본은 본인이 먼저 설득당했어야 합니다.
저는 한동안 물을 적게 먹는 것이 좋다는 것에 설득당한 적이 있습니다. 토끼는 풀을 먹으며 그 안에서 수분을 충분히 흡수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물을 마시면 병이 걸려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기는 몸 안에 90%의 수분이 들어있어서 병균에 매우 취약하다고 합니다. 어른은 70%이지만 죽기 직전에는 50%까지 수분이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같은 용적 안에 백혈구와 같은 면역 세포들이 더 많이 활동할 수 있어서 모든 병균을 다 잡아먹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럽 인구의 1/3을 죽인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그냥 관에 넣고 묻은 사람들이 죽고 나서 관속에서 다시 깨어나 관을 긁다 죽은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묘지를 옮길 때 관속에 많은 시체가 손톱이 빠지고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드라큘라’로 여겨 심장에 말뚝을 박는 일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채소를 통해 수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어서 굳이 소화액도 묽게 만드는 물을 마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신학생 때 유학할 때 4년 동안 거의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체중도 줄고 감기와 같은 것도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살 때문에 무릎이 좋지 않은 한 은퇴한 의사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몸이 아프다기에 건식식사를 제안해 드렸습니다. 물을 마시지 말아야 몸에 좋다는 이야기를 자신 있게 말씀드렸고, 그분은 사흘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않아 탈수증으로 구급차에 실려 갔습니다. 후배 의사들은 도대체 어떤 놈이 물을 마시지 말라고 했느냐고 추궁했지만, 그분은 함구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물을 적게 마신 덕분에 나중에 통풍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물을 많이 마셔야 좋다고 확신하지만, 그때는 나의 확신이 의사 선생님까지도 전염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먼저 확신하면 많은 사람을 확신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확신이 물을 마시지 않는 게 좋다는 식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낚시하는 사람이라면 물고기가 많은 곳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이라면 하느님을 만나게 할 수 있는 포인트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아일랜드에 영어를 배우러 갔을 때 고마우신 분들의 초대로 한 가정에서 두 달 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당신들 지인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는데 그분은 낚시에 도사셨습니다. 바닷가에서 낚시를 던지기만 하면 바로바로 커다란 돔들이 걸려 올라왔습니다. 그곳은 전복과 굴, 해초들이 많아서 밀물 때 돔들이 몰려든다는 것입니다. 그냥 던지면 올라오는 포인트였던 것입니다. 그것들을 잡아서 바로 바위 위에서 회를 쳐서 양주를 섞은 기네스맥주와 함께 먹었는데,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우러러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런 포인트를 아시는 설교자셨습니다. 설교는 설교는 하나의 ‘도움의 은총’입니다. 도움의 은총은 생명의 은총을 지향합니다.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생명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설교로 베드로를 설득하고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포인트를 아셨기 때문에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바꾸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은 사람들을 어떤 포인트로 이끌어야 할까요? 그 포인트는 반드시 물 반, 고기 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고 또 다른 복음 전파자가 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추천하는 것은 ‘기도-단식-자선’입니다. ‘마귀-육신-세속’을 이기기 위해 주님께서 추천하는 방식입니다. 자아를 벗어날수록 주님과 만남이 가까워지니 설교자는 일단 한 번 믿어보고 기도-자선-단식을 실천해보도록 유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자선에 대해서는 ‘십일조’를, 절제에 대해서는 ‘단식’을,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는 ‘성체조배’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외도한다는 자매들에게 성체조배를 하루 한 시간씩 하라고 했더니 남편이 돌아오던가 자신이 남편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등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당사자들이 더 큰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단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먼저 간헐적 단식으로 살을 빼니 주위 많은 분이 따라 하고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신이 맑아지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반만 먹으면 두 배로 오래 산다는 책도 있습니다.
십일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신학생 때부터 십일조로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돈이 부족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모든 것이 주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시작입니다.
제 유튜브에 ‘신 소화 데레사’란 분이 자신의 체험을 공유한 것이 있어서 함께 나눕니다.
“신부님 말씀처럼 십일조를 봉헌하니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 같고, 가진 것을 다 팔아 땅속에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사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영적 서적구매나 성경공부, 성지후원 등을 할 때도 그런 것 같고요. ^^)
열등감을 채우려고 아이들 학원, 예쁜 옷, 더 큰 집, 좋은 차, 맛집 인증샷, 여행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땐 십일조를 내가 굳이 내야 하나, 내가 부자도 아닌데 하는 무분별한 상태였고 그땐 시기 질투로 늘 불안했고 화도 났고 성당에 가도 부담스러웠었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봉헌하고부터는 주님께 받은 은혜가 많아 십일조를 낼 수 있는 게 감사하고 건강한 것도 감사하고 아이들이 공부 못하면 어떠냐 건강한 것만도 감사하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아이들도 하느님께서 지혜롭게 잘 자라게 해주실 거란 믿음까지 키워주셨습니다. 제가 이쁜 옷을 하나 사 입어도 십일조를 봉헌하고 나서 사 입으면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게 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말씀으로 할 수 있는 한계는 바로 순종의 문 앞까지 데려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문을 열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손해 봐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옳은지 시험해 보도록 부추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자선-단식에 대해 설교하는 이부터 확신을 지녀야 합니다. 나를 설득하지 못한 것으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저희 고모는 불교를 믿어 종교가 다른 저희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임종 직전에 제가 대세라도 드리려고 했더니 거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을 들여보냈더니 그때는 대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내가 먼저 확신만 가지고 있으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부터 기도-자선-단식을 실천하며 나 자신을 설득시킵시다. 그러면 나중에 그 경험으로 많은 이들을 설득시켜 신앙을 갖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
“신부님, 제 기도만 들어주시면 성지에 큰 봉헌을 하겠습니다.”
갑곶성지를 처음 개발을 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저에게 어떤 분이 와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많이 안 좋았습니다. 자신이 커다란 봉헌을 해야지만 성지가 개발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느님을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능력 부족으로 성지개발을 직접 못 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불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봉헌을 통해서만 성지개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창기에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들어서 이분께서 봉헌을 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봉헌은 없었고 또 그 뒤로 뵐 수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말이지요. 어쩌면 스스로 하느님 영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기에, 자신이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듯이, 이 땅을 사는 우리 역시 겸손한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의 모습으로 엎드려서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들이 그랬듯이,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죄인의 몸으로 거룩하신 분 앞에 있음을 두려워하며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인·성녀들은 주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마귀들은 어떠했습니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루카 4,41)라고 소리만 지릅니다.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래서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되는 대상을 향해 감히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마귀를 향해서는 함구령을 내리시지만, 두려워하며 겸손의 모습을 갖춘 베드로를 향해서는 사람을 낚는 큰 사명을 내려주셨음을 기억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을까요? 혹시 하느님을 내 밑에 두고서 명령을 내리는 하인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두려워하며 겸손한 모습을 갖춘 사람만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도전에 성공하는 비결은 단 하나,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 디어도어 로빈
새로운 삶으로 …
코로나 사태가 생기기 전, 강의가 참 많았습니다. 외부로 나가서 하는 강의도 있고, 성지에서 하는 강의도 있었습니다. 또 신학교, 방송국까지 눈코 뜰 새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의하면서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탈렌트를 더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몇 년 전, 평소 존경하는 분에게서 들었던 말이 기억납니다.
“나이 50이 넘으면 강의하는 것 아냐.”
이 말을 들었을 때가 딱 50세였습니다. 더 이상 강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래도 내가 잘하는 것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서운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묵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것도 없는데, 마치 많은 것을 알고 깨달은 듯 강의를 했었구나. 세상에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강의한답시고 내 공부만 하고 있었구나.’
그 뒤 신학교와 방송국 강의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외부와 성지에서의 강의도 저절로 멈춰진 것입니다. 역시 새로운 삶을 살라는 주님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자기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 11)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벗어나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버려야 길을 제대로 만나게된다. 따르면서 진리를 만나게되고 버리면서 진리를 깨닫게된다. 우리가 갈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따르는 길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새로운 삶의 전환이 간절히 필요한 때이다. 새로운 삶의 전환은 주님과 함께 주고받는 삶으로 우리가 바뀌는 것이다. 하느님을 위한 버림이며 하늘 나라를 위한 따름이다. 버리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버리고 떠나는 삶으로 우리에게 복음이 되셨다. 영원한 생명은 버리고 떠날 때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이다.
새로워지기 위해 버리고 떠나는 새로운 만남이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어리석고 나쁜 삶을 멈추는 것이며 깨끗한 삶으로 다듬어지는 것이다. 이끄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복음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야 할 하느님의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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