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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8월 30일 (월)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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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

 

 

21년 8월 30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죽은 이들이 살아나고 산 이들이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여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8월 3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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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테살 4장 13-18절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16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17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세상을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세상을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모든 신들보다 경외로운 분이시네. 민족들의 신들은 모두 헛것이어도, 주님은 하늘을 지으셨네. 세상을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은 소리쳐라. 들과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기뻐 뛰고, 숲속의 나무들도 모두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진리로 다스리신다. 세상을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4장 16-30절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8월 30일 (월)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8월 30일 (월)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8월 30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세례로 성령을 받은 우리가 해야할 일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의 모습을 길게 소개한 뒤에, 세례와 광야에서의 유혹, 그리고 갈릴래아의 전교 이야기로 예수님의 공생활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여러 회당에서 전교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주로 나자렛과 카파르나움을 중심으로 하여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에서 비옥한 곡창지대이지만, 그곳 사람들은 대부분 소작인이어서 부자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고 상종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수도가 아닌 이방인의 땅, 아픈 이들의 땅인 갈릴래아로 가시어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 특이한 것은 ‘성령’에 대한 강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습니다”(루카 3,21-22).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시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시어”(4,1) 유혹을 이기시고, 그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어”(4,14)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4,18; 참조: 이사 61,1)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예수님께서는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가 되시어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이, 빚 때문에 투옥되거나 잡혀서 유배 당한 이,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둠 속에 있는 눈먼 이, 사회적으로 짓밟히고 억압받고 소외된 약한 이들, 고통에 울부짖는 이들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들과 함께 계신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살리십니다. 이제 세례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아파서 울부짖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살리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희망없는 자의 슬픔이 아니도록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난봄 저의 제자가 젊은 나이에 죽었을 때 저는 제 일생을 통틀어 제일 많이 울었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보다도 더 많이.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오늘 바오로 사도 말씀을 들으면서 그때 그렇게 슬펐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의 제자가 죽은 것은 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희망하던 대로  하느님께로 돌아간 것이라는 믿음은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나 얼마 전 제 동창 신부가 죽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슬픔은 믿음과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가 죽은 것은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간 것이며 희귀 암으로 고통스러웠던 몇 년을 생각하면 오히려 고통을 끝낸 것이니 슬퍼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울었던 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서러움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서러웠습니다. 일찍 죽은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고생만 하다가 죽은 것 같아서 서러웠던 것입니다. 

아니, 고생만 하고 행복은 없었던 것 같아서 서러웠습니다. 그러니 이 서러움 안에는 저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했기를 바라는 그 바람이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제 제자가 이 세상에서도 행복했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제자에 대한 저의 사랑 때문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저의 희망과 기쁨과 행복이 아직도 초월적이지 못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천국의 행복을 향한 희망이 이 세상 모든 고통과 불행을 뛰어넘게 할 정도의 희망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올해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때문인지 그 부끄러움이 더 큽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제 제자보다 훨씬 일찍 돌아가셨지요. 생각해보십시오. 25년을 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고통은 제 제자보다 훨씬 컸지요. 가족이 풍비박산이 되고 일생이 고통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김대건 신부님이 불행하셨습니까? 김대건 신부님이 당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하셨을까요? 김대건 신부님이 남긴 글들과 행적을 보면 불행의 흔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불행을 초월케 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무리 고통이 커도 당신이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그 믿음이었고, 이 세상의 짧은 고통을 넘는 영원한 생명과 행복에 대한 희망이었지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고통이 그렇게 서럽고 그래서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고통 가운데 있지만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체험이 없다는 표시요, 모든 고통을 초월케 하는 초월적 희망이 없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죽음을 슬퍼함이 아무리 사랑일지라도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막연히’ 사는 사람은 죽음도 ‘막연해서’ 두렵다.

 

루카는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 소명을 선포하는 사건이 나자렛에서 일어난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는 요셉이 메시아가 되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선입관에 사로잡힌 교만을 지적하시고 그들은 그런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두려움 없이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소명을 선포하는 것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은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누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루하루를 주님 뜻에 따르며 자신을 버린 삶을 사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냥 조금 더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일까요? 

말기 암 환자들을 많이 접한 경험을 책으로 쓴 김범석 의사가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라는 책에 소개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두 분의 말기 암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70세의 노인 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로서 볼 때 6개월 이상은 힘들 거 같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 환자는 담대하게 그것을 받아들였고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닌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는 매주 병원에 올 때마다 지난주에 자신이 했던 일들을 소상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진작에 그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며 떠났습니다. 

김범석 선생을 찾아온 다른 노인 환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기대수명을 듣고는 딱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지나친 기대였습니다. 평균적으로 그는 당해 추석도 넘기기 힘들다고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꾸만 ‘10년만 더’를 말했습니다. 

물론 모른 척하고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환자가 의식이 없어지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환자가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도 인생의 귀중한 일부로 만들고 떠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   

침묵이 흘렀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손주가 학교 들어갈 때 교복 한 벌 해 주고 싶다거나, 아니면 고향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뭐 그런 거요.”

“...”

여러 번의 질문에도 그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연히’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가 특별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일주일에 하나씩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이례적이라고 합니다. 사실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무엇에 기쁘고 슬픈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른 채 그저 막연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의사로서 앞 환자의 예를 들어 그분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다음 외래에 올 때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만 생각해오라고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웃을 일 만들기, 핸드폰 사진 매일 찍기, 일주일에 세 번 산책하기, 자식들에게 하루에 한 통 문자 보내기, 아내에게 매일 고맙다고 말하기 같은 소소한 것이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숙제가 너무 어려웠는지, 너무 평범해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인지, 그는 다음 외래에도 빈손으로 왔고 그렇게 주저하다 추석을 넘기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이 두 사례 중 죽음을 덜 두려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 사람이 죽음이 두려워 하루하루 충실히 살려고 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삶이 막연하니 죽음도 너무 막연해서 두려운 것입니다. 

반면 삶이 해야 할 일로 채워지면 죽음도 해야 할 일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도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삶이 명확할 때 죽음도 명확해집니다. 

어느 독특한 월터란 물리학 교수의 동영상이 있습니다. 그는 물리 공식에 광적으로 미쳐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월터 교수는 물리학 수업을 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은 강의실 안에서 실제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루는 월터 교수가 살짝 더 이상했습니다. 15kg 되는 추를 자신의 턱에 갖다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운동에너지 보존법칙을 100% 확신해요. 나 자신은 믿지 못할지라도. 조용히 해 주세요. 장난이 아닙니다. 어제 잠을 거의 못 잤더니 힘드네요. 셋, 둘, 하나.”

추가 다시 돌아올 때 턱이나 목이 부서질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믿는 물리학 법칙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에너지 법칙에 따라 추는 자신이 놓은 그 자리 이상 올라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보는 사람도 짜릿합니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에게 삶의 법칙을 주십니다. 당신 뜻대로 살면 행복할 것이란 법칙입니다. 그리고 그 법칙대로 살다 보면 하루하루가 정말 빡빡합니다.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 덕분에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법칙대로 삶의 일부인 죽음도 주님 뜻대로 받아들이면 행복으로 끝날 것을 알게 됩니다.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월터 교수처럼 하루하루가 짜릿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에 오류가 없음을 체험하며 기뻐합니다. 

‘오늘은 뭐 하며 살지?’라는 식으로 절대 하루를 막연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분명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전날 잠들기 전에 다음 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래서 꼭 해야 할 일을 두 가지에서 많게는 여섯 가지 정도 정하십시오.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정한 대로 기계처럼 움직이며 먼저 두 가지는 꼭 하십시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항상 기쁨으로 끝난다는 것을. 

그리고 죽음조차도 하나의 소명임을. 

그리고 그 죽음 뒤에 가장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그렇게 우리는 죽음 앞에서까지 담대할 수 있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 뜻에 나를 맡기고 마지막 날이라고 여기며 기쁘게 살아갑시다. 하느님 뜻에 살짝 미치면 죽음까지 포함한 매일의 삶이 즐겁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즘 아이들은 공부를 안 해.

 

대학교 교수인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 아이들은 공부를 안 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서 노력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시간만 보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때는 정말 다들 열심히 공부했는데….”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저는 일반 대학이 아니라 신학 대학에 들어갔기에 일반 대학교 분위기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 때의 교수 신부님께서도 “너희들 지독하게 공부 안 한다.”라고 자주 말씀하셨거든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어서, 일반 대학생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공부 안 한다고 자주 혼내셨습니다. 
 
늘 자기 관점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긴 운전자들에게 자신의 운전실력이 어떤지를 질문하면 대부분 다른 운전자에 비해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자기 관점에서 옳고 그른 것을 보려 하고, 그 입장을 가지고서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역시 나는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그런 단죄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생각이 정답이었을까요? 큰 잘못이었고 후회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선포를 고향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영 이상합니다. 자신의 기준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며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찮은 목수의 아들인데, 무슨 하늘 나라를 선포하냐는 것이겠지요.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서 화만 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 시대의 사렙타의 과부,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 이야기를 하면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선민의식에서 벗어나야 함을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자기 기준만을 내세우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실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간의 본질은 에상치 못한 일을 하는 것이므로, 모든 인간의 탄생에는 세상을 바꿀 가능성이 수반된다.

- 한나 아렌트

 

 

우울증

 

우울증은 흔한 정신질환으로 마음의 감기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결코 간단한 병이 아닙니다.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어나게 할 수 있으며, 심한 경우 자살이라는 심각한 결과에 이를 수 있는 뇌질환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것 아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 생각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우울감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고혈압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요인이 2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혈압은 생물학적 측면에서 보면 아주 단순한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200가지가 넘는데, 하물며 우울증 같은 복잡한 병에는 얼마나 많은 요인이 있겠습니까? 
 
저도 잘 몰랐습니다. 얼마 전에 1,000페이지가 넘는 우울증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모습처럼, 남을 자기 기준에 맞춰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알기 위한 노력을 통해 이해의 시작이 이루어집니다. 
 
지금 힘들어하는 분이 참 많습니다. 이들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말씀의 발자취는 이해와 긍정의 발자취이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루카 4, 21)

막아 설 수 없는 계절의 흐름이다. 말씀은 순리이다. 그 누구도 말씀을 역행할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말씀이다. 말씀이 우리의 감춰진 선입견을 읽어준다. 
말씀도 진리도 고향에서만은 환영을 받지 못한다. 환영을 받지 못해도 오늘 하루는 말씀이 있기에 생명의 말씀으로 소중하다.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으시는 말씀의 주님이시다. 

말씀은 언제나 말씀의 발자취를 남긴다. 말씀의 발자취는 이해와 긍정의 발자취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말씀이 선입견으로 가득한 이곳을 비추며 찾아왔다. 

나의 뜻을 내려놓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복음이 되었다. 말씀으로 이끌어가시고 말씀으로 완성하시는 말씀의 오늘이다. 우리자신이 말씀으로 먼저 맑아져야 할 오늘 하루이다. 

대자연은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간다. 계절과 계절 사이 사람과 마음 사이에 완성하시는 말씀이 있다. 말씀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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