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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8월 28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Memorial of Saint Augustine, Bishop and Doctor of the Church)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했습니다.
391년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뒤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이단을 물리치며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며 참회의 자서전 「고백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430년에 선종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며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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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1테살 4장 9-11절
여러분 자신이 하느님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형제 여러분,
9
형제애에 관해서는 누가 여러분에게 써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느님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0
사실 여러분은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에게 그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더욱더 그렇게 하고,
11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화답송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소리쳐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강들은 손뼉 치고, 산들도 함께 환호하여라.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신다.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복음
마태 25장 14-30절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그리스도의 잔치에 참여한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8월 2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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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8월 28일 (토) 1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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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나는 오늘 하루 무엇을 찾고 있나요?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22세에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교사가 되었는데, 이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이라는 말을 발견하고는, 평생 지혜를 찾고자 노력하였습니다.
387년 세례를 받았으나 신앙생활은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우구스티노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성인이 바로 그 유명한 “집어 읽어라.”(Tolle, Lege.)라는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펴서 읽습니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3-14).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수도 생활에 전념합니다. 사제품과 주교품을 받은 뒤 히포의 주교로서 공동체를 돌보고, 이단과 싸우며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이루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오, 그토록 오래되었으면서도 그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제가 당신을 너무나도 늦게 사랑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안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 저는 밖에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 저는 당신 안에 있지 않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 사로잡혀 당신을 멀리하였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 저는 당신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으로 인하여 허기지고, 갈증이 납니다. 당신은 저를 건드리셨으며, 이제 저는 당신께서 주신 평화를 위하여 맹렬히 불타오릅니다”(『고백록』).
“모든 회개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회심하기 전까지 밖에서 살았는데, 하느님께서 그를 내면으로 끌어들이셨습니다”(모리스 젱델, 『감탄과 가난』, 28-29면).
나는 오늘 하루 무엇을 찾고 있나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탓 돌리기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이 받은 한 탈렌트를 그대로 돌려드린 것에 대해 오늘 비유속의 주인은 종이 악하고 게으르다고 질책을 합니다.
그런데 이 종에게 게으르다고 함은 이해되지만 악하다고까지 함은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벌지 않았으니 게을렀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돈으로 아무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악하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의 어떤 점이 악한 것입니까? 게으름이 악이라는 것일까요?
우리는 게으름을 부지런 함과 반대되는 하나의 성격 또는 성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런 게으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저를 봐도 저는 무지 게으릅니다.
전화 하나 거는 것도 미적거리다 때를 놓치기 일수이고, 방 청소 하기 싫어 가능하면 어지럽히지 않고, 설거지 하기 싫어 요리할 때 도구나 그릇을 많이 쓰지 않는 편입니다.
저의 손주들 중에 저를 제일 많이 닮은 조카에게서 나온 손녀가 아주 어린 나이인데도 책 읽는 것 좋아하고 나가는 것 싫어한다는 얘기를 듣고 웃은 적이 있는데 저나 조카가 바로 그런 유형입니다.
그런데 이런 게으름은 동작이나 행동이 굼뜬 것일 뿐 악하다고 할 수는 없고 참으로 악한 게으름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해야 할 사랑을 하지 않는 게으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유의 주인이 종을 악하다고 한 것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이라는 탈렌트를 이웃과 나누지 않은 게으름의 뜻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종의 악함에는 다른 뜻들도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 지점에 악이 있는 것처럼 악은 늘 은총의 반대 지점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처럼 또는 인간처럼 하느님을 아는 것인데 자기가 악하고 자기가 미워하기에 하느님도 악하고 그래서 은총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진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 이것이 우리 인간의 1차적인 악인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기의 허물과 죄를 내 탓이라고 하지 않고, 하느님께 뒤집어씌우기도 하여 그저 악한 정도를 넘어 사악하기도 합니다.
비유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자기의 악함과 게으름을 자기 탓이 아니라 주인이 심지도 않고 거두는 모진 분이기 때문이라며 주인 탓으로 돌립니다.
아담과 하와의 탓 돌리기가 재발할 것인데 창세기에서는 피조물끼리 탓 돌리기를 한 데 비해 여기서는 창조주 하느님에게 탓 돌리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유를 묵상하며 게으른 죄악보다 더 큰 하느님을 잘못 하는 죄의 악, 자기의 허물과 죄를 하느님께 탓 돌리기하는 죄와 악이 내게도 있을 수 있음을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은 나의 능력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믿으실까?
오늘 복음은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개발하거나 성장시키지 않고 게으르게 살다가 온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탈렌트는 ‘재능’입니다. 나의 재능은 어느 만큼 성장할 수 있을까요? 나의 재능은 내가 믿는 만큼 성장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나에게서 솟아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자아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능력을 지녔다면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가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먼저 믿어주었고 내가 그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습니다. 사람은 믿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생명을 유지할 능력도 잃게 됩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인 이춘재 씨가 잡힐 때까지 20년을 억울하게 옥살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윤성여 씨입니다.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보상금을 도박으로 다 날렸습니다. 혼자라도 열심히 살아보려 했지만, 어느 날 경찰이 들이닥쳤고 성여 씨는 영문도 모르는 채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이 사건 때문에 많은 경찰 간부들이 해직을 당하던 터라 경찰들도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여 씨를 고문하여 자신들이 써 놓은 대로 읽고 자백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특히 3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을 때는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백을 시키고 무기징역을 받게 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그런 죄질로 들어온 사람은 집단 구타와 따돌림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무죄를 주장해도 그를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세상에 남겨진 그는 살 힘도 잃었습니다. 사는 것도 누군가가 기대해 주어야 생존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 그를 믿어준 생명의 은인이 나타납니다. 박종덕 교정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는 범죄 자체를 전면으로 그것도 일관되게 부정하는 수용자는 처음 보았다고 하며 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너는 끝까지 살아야 한다. 여기서 살아남는 길은 너의 인내심이다.”
그는 그렇게 감옥에서 20년을 버텼고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윤성여 씨는 박종덕 씨를 생명의 은인으로 부르며 감사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니 더 힘들다고 합니다. 친척들도 왜 왔느냐며 그를 문전박대하듯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여 씨 때문에 친척들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박종덕 씨의 믿음과 또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가겠다고 결심합니다.
나는 이렇게 내가 믿어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내가 살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교만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박지성 씨도 좌절에 빠져있을 때 큰 선수가 될 것이라는 히딩크의 그 한 마디가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만드는 것은 믿음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살기 위해서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믿으려 합니다. 하지만 잘 믿어야 합니다. 뱀과 같은 이들을 믿었다가는 오히려 삶을 망치고 맙니다. 뱀은 그저 생존하기 위해 뱀과 같이 타인을 먹는 것만 할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마이클 타이슨과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감옥에서 살다시피 한 그의 젊은 시절에 그를 알아보고 세계 챔피언으로 키운 코치가 ‘커스 다마토’였습니다.
타이슨은 말합니다.
“커스는 나 자신을 믿게끔 도와주었다. 무엇을 하든 간에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목수건 오타쿠이건 말이다. 나도 이제 나 자신을 믿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지만, 그의 영예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커스 다마토가 죽고 ‘돈 킹’이 그의 후견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돈 킹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돈 킹은 타이슨을 그저 자신의 돈벌이로 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타이슨은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범죄로 감옥 생활을 하고 링은 즐기는 곳이 아닌 물어뜯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점점 망하게되어 많이 번 돈을 다 잃고 파산신청까지 하게 됩니다.
커스 다마토도 자신을 믿게 했고 돈 킹도 자신을 믿게 했습니다. 자신을 믿는 것만으로는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이 부족합니다. 자신을 믿게 만든 사람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믿음을 준 사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면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고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탈렌트를 가진 자는 그 탈렌트에 다른 탈렌트를 더하게 됩니다. 그러나 돈 킹처럼 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 사람을 믿고 일하게 되었을 때 나는 모든 능력을 잃게 됩니다.
능력을 키우기 위해 나는 분명 누군가 한 명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나의 능력을 성장시켜 주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나를 어떻게 단련시키는지 보면 됩니다.
돈 킹은 타이슨을 방탕한 생활로 길들였습니다. 그러나 커스 다마토는 그를 혹독한 훈련으로 길들였습니다. 사람은 방탕해지면 모든 능력을 잃습니다. 오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을 ‘게으름’이라 합니다. 하느님의 믿음을 받아들였다면 게을러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혹독하게 훈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커스 다마토는 말합니다.
“자신에게 이러한 잠재적인 자질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때 마음 깊이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진다. 스스로를 믿을만한 이유를 줘야 한다. 스스로에게 자질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스스로를 믿은 후의 육체적 훈련은 쉽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시며 우리가 당신 아드님처럼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지옥훈련을 거칠 힘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지게 하지 않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믿음을 저버리지 맙시다. 그분은 항상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무엇인가를 배울 때 따라오는 어려움.
무엇인가를 배울 때 따라오는 어려움은 꼭 있습니다. 기타를 처음 배울 때, 남들 앞에서 멋지게 연주하는 모습만을 상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왼손 손가락 끝에 딱딱한 굳은살이 잡히지 않고서는 멋진 연주는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기타 배우면서 이런 굳은살이 잡히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기타만이 아닙니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에는 멋지게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제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수영 연습을 하며 그렇게 많이 물을 먹게 되리라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자전거 배울 때도 넘어질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처음 자전거 배울 때는 초보자 티를 팍팍 내면서 모두 다 넘어집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되기 싫은 모습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되고자 하는 모습 자체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되기 싫은 모습은 전혀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되기 싫은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되고 싶은 모습도 될 수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아가는 한 과정입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이라면 고통과 시련도 참아 견뎌낼 수 있어야 합니다. 원하는 것만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성장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능력에 따라서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로 배분합니다. 그리고 오랜 뒤에 주인이 와서 종들과 셈을 하게 되지요. 모두 두 배로 탈렌트를 불렸지만, 한 탈렌트를 받았던 종은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겨 두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받은 돈의 두 배로 탈렌트를 가져왔지만, 이 종만 늘리지도 줄이지도 않은 채 한 탈렌트만을 가지고 옵니다. 탈렌트를 늘리기 위해 노력했던 두 사람의 종과 달리,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현명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인의 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이 탈렌트를 나눠줬던 이유는 탈렌트를 땅에 묻어두라는 것이 아니라, 탈렌트를 늘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들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탈렌트는 결국 누구의 것이 되었습니까?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종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능력들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다섯 배, 두 배로 키우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받은 능력마저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의 말은 나머지 행동들에 의해서 그 뜻을 얻는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함께 살도록 되어 있는 몸
덴마크 건축가 얀 겔은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꽃밭을 향해 배치되어 꽃을 볼 수 있는 벤치와 거리를 향해 배치되어 걸어 다니는 사람을 구경할 수 있는 벤치 중에서 어느 쪽 벤치에 더 많은 사람이 앉는지 알아보는 실험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거리를 향해 배치된 벤치에 앉은 사람이 꽃을 볼 수 있는 벤치보다 10배 더 많았습니다. 다른 조건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겠지만, 10배의 차이라는 것은 그만큼 사람에게 끌린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사람 많은 것에 답답함을 느껴서 은퇴 후 귀농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다시 도시로 되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만큼 우리는 자연보다 사람 자체에 끌립니다. 그래서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도 함께 살기 위한 덕목이었습니다. 즉,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본성을 따르지 않고 혼자만 잘살려고 합니까? 우리 몸은 함께 살도록 되어 있음을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랑이 깊으면 나눔도 깊어진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마태 25,21)
우리의 방황도 주님을 만나면 은총이 된다. 소용돌이 시간을 힘겹게 지나온 성 아우구스티노의 비틀거린 목마름의 여정이었다. 우리가 함부로 버려도 소중하게 거두시는 은총의 하느님이시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역사에서 만나게되는 하느님이시다.
우리의 죄에서 만나게되는 사랑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찾던 길은 하느님의 사랑에 있었다. 사랑은 은총을 동반한다. 사랑이 깊으면 나눔도 깊어진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에서 맑고 깨끗해지는 영혼의 기쁨을 다시 만난다. 우리의 죄도 하느님의 은총을 입으면 하느님을 위한 뜨거운 사랑이 된다.
지난날의 실패와 방황을 하느님과 나누는 고백의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를 주신다. 은총은 끝나지 않았다. 패배한 자리에서 힘껏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 은총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뿐인 하느님 사랑을 받고사는 사랑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진실한 고백이 된다. 사랑으로 그 놀라운 은총의 힘을 다시 믿는 우리들 시간이다. 사랑과 은총에 감사드리는 우리들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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