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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
21년 8월 26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믿음으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어 격려를 받고 기쁘다고 전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라며,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성실히 일하고 있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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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테살 3장 7-13절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을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기를 빕니다.
7
형제 여러분, 우리는 이 모든 재난과 환난 속에서도 여러분의 일로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 때문입니다.
8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고 하니 우리는 이제 살았습니다.
9
우리가 여러분 덕분에 우리의 하느님 앞에서 누리는 이 기쁨을 두고, 하느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10
우리는 여러분의 얼굴을 보고 또 여러분의 믿음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게 되기를 밤낮으로 아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11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친히,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기를 빕니다.
12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도,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며,
13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화답송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가 기뻐하리이다.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당신은 말씀하시나이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가 기뻐하리이다.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가 기뻐하리이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가 기뻐하리이다.
복음
마태 24장 42-51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2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45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46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8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49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50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51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성찬례로 충만한 구원을 이루시니 저희가 주님의 자비로 치유를 받고 힘을 얻어 모든 일에서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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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8월 26일 (목)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은 작은 바람에도 떨리는 나뭇가지 같습니다. 그렇게 흔들릴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주고자 하는 마음과 받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흔들림 사이에서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생생함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방황과 고통의 시간을 겪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이 시간을 낭비라 생각할 뿐 아니라 억울하다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점과 결점을 통하여 오히려 일이 해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 하느님 안에서는 이 약점이 이렇게 쓰이는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바람 속 나뭇가지의 떨림처럼 우리는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또한 악(惡)을 선택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좌절과 절망이 아니라 다시 희망으로 넘어와야 합니다. 이를 알아차릴 때 인간은 하느님을 찾습니다. 나 자신도 갈팡질팡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다른 이를 함부로 심판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 언제 어느 쪽으로 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의식 성찰’의 시간입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 경험한 일들 안에서 일어난 생각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을 곱씹어 보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마음의 움직임을 아버지 하느님께 설명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하여 그 감정이나 행동의 뿌리를 볼 수 있고 정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의식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보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깨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게을러서도 방탕해서도 안 되는.
마태오 복음 23장은 대부분이 종교 지도자들을 주님께서 비판하시는 내용이고 끝부분은 이런 지도자들로 인한 예루살렘 황폐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23장을 마친 마태오 복음은 24장에서 종말론적인 재난 상황에 대해 얘기를 한 다음 끝부분에서 이런 상황에서 깨어 있어야 함과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기준을 들려주는데 오늘 복음이 바로 이 끝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얘기는 우선 종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종에 대한 얘기가 우리에게 해당이 됩니까? 종에 대한 얘기는 남 얘기가 아닙니까? 나는 종이 아니니 남 얘기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남이 아닌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먼저 나는 종이고 주인은 하느님이라는 것부터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종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동생활을 하며 자주 주인 의식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공동체 또는 집을 나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거지요. 사실 미성숙하면 할수록 공동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며 집을 하숙집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 공동체에서 그리고 우리 인간끼리는 주인 의식이 필요하고 중요하며 주인 의식만큼 성숙합니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에서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는 종 의식이 필요하고 중요하며 따라서 성숙하면 할수록 주인에게 충성하고 주인이 맡긴 일에 충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충성과 충실을 구분할 필요도 있습니다. 충성은 인격적인 말로서 하느님께 충성하는 것이며 오늘 복음에서는 주인이 언제 올지 또는 주인이 언제 부를지 늘 주인에게 깨어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 곧 인간의 눈치가 아니라 주인이신 하느님 눈치를 보는 것이며 자기 욕구의 만족이 우선하지 않고 주님 뜻의 실현이 늘 우선하는 겁니다.
충실은 임무적인 말로서 일 특히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성실한 것인데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란 주님의 식솔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이 말씀을 뜯어 볼 때 주님이 종에게 맡긴 임무는 주인 집안의 식솔 관리와 양식 관리입니다.
그래서 충실한 종이란 맡겨진 사람을 주인 집안의 식솔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 집안의 식솔이라면 주님 공동체 곧 교회 신자들이니 충실한 종은 신자들을 자기 집의 식솔이나 종처럼 부리지 않고 주님의 집안의 자녀로 여기며 받들어 섬겨야 합니다.
다음으로 충실한 종이란 양식 관리 곧 양식을 제 때에 나눠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비유에서 '제 때'란 표현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양식을 안 나눠주는 것도 문제지만 설사 나눠준다 하더라도 제 마음대로 나눠주는 것도 문제라는 말이며, 주인이 돌아올 때 곧 주인의 때 못지 않게 식솔들의 때에도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게을러서도 안 되고 술이 처먹으며 방탕해서도 안 됩니다. 요즘 저의 경우 게으름과 술이나 처먹는 방탕함이 목의 가시처럼 걸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은 다목적 댐처럼 : 기쁨의 발전기를 수시로 점검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을 신자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상대에게 양식이 되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깨어있음’이란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인지 살피라는 뜻입니다.
내가 하는 사랑이 참사랑이라면 지금 어떤 느낌일까요? 기쁠 것입니다. 사랑하면 항상 기쁩니다. 하느님께서 기쁨 자체이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만약 사랑을 실천하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분명 다른 기쁨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는 사랑이 아님을 증명할 것입니다.
다목적 댐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사람은 댐처럼 아래로 사랑을 전해주는 기쁨을 느낍니다. 이 과정에서 전기가 생성됩니다. 그것처럼 그냥 사랑을 내어주는 것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만약 전기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내려보낸 물을 받는 것들에게서 자신의 기쁨을 뽑아내려 할 것입니다. 이것은 고장 난 댐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최광현 작가의 『가족의 두 얼굴』에 나오는 사례들입니다.
진혁 씨는 상담하며 자신은 30년 동안 한 번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진혁 씨의 아버지는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했지만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자수성가한 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공부에 대한 한이 있었습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꿈이었고, 주위에서도 공부만 했었다면 분명 합격했을 것이란 말을 합니다.
진혁 씨는 셋째였는데, 아버지는 진혁 씨가 임신했을 때 왕관을 받는 태몽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진혁 씨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아들로 여겼습니다. 물론 다른 형제들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진혁 씨도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고시 공부에 지친 진혁 씨는 회사에 취직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다시 시도하라고 윽박지릅니다. 진혁 씨는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든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또 그 꿈을 이뤄주지 못한 죄책감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저 맛있는 물고기에 불과합니다. 지금 깨어나지 못한다면 하느님 앞에 가서 자신은 셋째를 가장 사랑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깨어나야합니다.
이런 사례도 있습니다. 연화 씨는 가족의 무게를 항상 등에 업고 다니며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4남매의 장녀로서 술과 도박, 친구들을 너무 좋아해 언제나 집 밖으로 나도는 무능한 아버지와 그런 남편 뒷바라지하다 건강을 잃어버린 어머니 때문에 연화 씨는 가장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화 씨의 고생은 교육대학을 나와 선생님이 되고 결혼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동생들이 뚜렷한 직장을 잡지 못해 수입이 변변찮았기 때문입니다. 남편 눈치 보면서 부모의 치료비를 대며 친정을 돌보느라 30대 중반이 되었어도 자기를 위한 옷 제대로 한 번 산 적이 없습니다.
며칠 전 아버지가 “이젠 너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하지만 연화 씨는 말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이젠 제 자신을 멈출 수 없어요. 제가 없으면 친정 식구들이 다 무너지지 않을까 너무나 불안해지는걸요.”
연화 씨는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것 자체로 기쁨의 보상이 있습니다. 연화씨는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형제들의 인정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가 보상으로 주어져야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거래입니다. 인정받기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 중 단 한 명도 구원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십자가 사랑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만으로 보상이 있습니다. 힘들면 사랑도 멈추어야합니다.
대학에서 만난 두 남녀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생활을 하는 남자는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을 남자에게 주기도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남자의 자취방에 가서 빨래와 청소를 해주며 사랑하는 남자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여자가 먼저 취직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취업이 되지 않자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회진출을 위한 숨 고르기를 하였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학비를 대고 헌신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남자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하였습니다.
여자는 이제 고생스러운 시간이 끝나고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여자는 남자로부터 그만 헤어지자는 충격적인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남자가 다른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왜 여자를 떠나려 했었던 것일까요? 여자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빚을 아주 많이 진 사람입니다. 그 빚을 떠안고 결혼해서 평생을 갚아나가야 할 부담감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냥 나쁜 놈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무작정 잘해준 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떠나가게 하고 싶다면 한없이 잘해주어라.”라는 말도 있듯, 잘해주면서도 상대가 어떤 마음을 갖는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내가 더 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냥 사랑하는 데서 충분한 행복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랑을 하면서 ‘내 사랑이 사랑이 맞나?’를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가짜 사랑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은 이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만으로 기쁜가?”입니다. 사랑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전기가 생성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하는데 우울하다, 그래서 다른 보상을 원한다, 하는 것은 본성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지 않으면 내가 고통스러워서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본성입니다.
누가 보답을 바라고 두 발로 걷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냥 그것으로 기뻐야 하는데, 오늘 복음처럼 먹고 마시고 때리는 등의 또 다른 기쁨을 찾는다면 그것이 깨어있지 않은 삶입니다. 양식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기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데 힘들다면, 그래서 다른 보상을 찾는다면 당장 멈추십시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기쁨이 생성되도록 고장 난 발전기를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기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다목적 댐과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깨어 준비한다는 것.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인데도, 즉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죽음이 마치 커다란 불행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왜 두려워할까요?
사람들에게 어떤 죽음을 원하는지를 물어보면, 사랑하는 가족에게 둘러쌓여 기도받으며 죽는 것을 원합니다. 그에 반해 가장 피하고 싶은 죽음은 ‘고독사’라고 하더군요. 죽었음에도 아무도 찾지 않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되는 것을 제일 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결국 외로움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요? 우울증 환자 중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요. 외로움의 공포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로움과 죽음을 뛰어넘어 다른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외로움과 죽음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성인·성녀들이 직접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공포가 아닌 희망으로 보셨습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주님과 더 가까이에서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면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서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언제 주인이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어 있으면 될까요? 아무런 생각 없이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깨어만 있으면 괜찮은 것일까요? 주인이 늦게 올 것으로 생각하면서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서 집을 비워놓고 있는 것도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깨어 준비한다는 것은 주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면서 단지 깨어만 있다고 할 일 다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예상치 못한 날에 주인이 돌아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을 주제로 논문을 썼고, 이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앎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논문을 싼 사람이 행복하다면 앎을 뛰어넘어 실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절망하고 좌절하는 일들이 참 많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맞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깨어 준비하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통해 커다란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될 것 같다고 말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힘으로 인생이 굴러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일 때, 가장 힘이 세다.
- 강송희
당신이 없는 불행을 택하겠어요.
미국의 40대 대통령 레이건은 퇴임 후 5년이 지난 1994년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사람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레이건은 몇 시간 동안 갈퀴로 수영장 바닥에 쌓인 나뭇잎을 긁어모아 깨끗하게 청소하면서 너무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에 아내 낸시 여사는 이 행복해하던 기억을 되살려 주고 싶어서, 밤에는 수영장에 낙엽을 깔고 아침에 남편에게 “여보, 수영장에 낙엽이 가득 쌓였어요. 이것 좀 청소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레이건은 이를 다시 깨끗이 치우며 기뻐했지요.
레이건과 낸시 여사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사랑의 힘이 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레이건은 기억력을 잃었지만, 아내 낸시만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레이건은 가끔 정신이 들 때마다 “내가 살아 있어서 당신이 불행해지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라고 한탄했습니다. 그러자 낸시 여사는 레이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당신이 있다면 좋아요. 당신이 없는 행복보다 당신이 있는 불행을 택하겠어요. 부디 이대로라도 좋으니 10년만 더 내 곁에 있어 주세요.”
정말로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까요? 이런 사랑으로 나의 이웃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준비는 겸손이며 선택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마태 24,44)
가을을 맞이하기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삶이 바로 준비하는 삶이다. 그래서 준비하는 삶은 삶의 기본에서 출발한다. 삶의 기본은 정직과 감사이다.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준비하는 삶은 우리의 생활을 진심으로 반성한다. 복음은 우리의 생활을 반성으로 새롭게한다.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한다. 준비는 하느님을 향한 충실한 사랑이다. 아름다운 준비가 아름다운 마무리이다.
우리자신을 보게되는 준비이다. 준비 그 자체가 은총이다. 우리자신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맞아들이는 준비이다. 이것이 삶의 기쁨이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는 결국 우리를 위한 준비이다. 준비는 겸손이며 선택이다. 이와같이 계절도 준비하며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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