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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8월 29일 (일)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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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2주일 -

 

 

21년 8월 29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가 내리는 주 하느님의 명령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 오늘 제2독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며,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8월 2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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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신명 4장 1-2절, 6-8절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는 안 된다.
주님을 명령을 지켜야 한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친구를 해치지 않으며,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악인을 업신여기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존중한다네.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이자를 받으려 돈놀이 않으며, 죄 없는 이를 해치는 뇌물 받지 않는다네. 이 모든 것 행하는 그 사람, 영원토록 흔들림 없으리라.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야고 1장 17-18절, 21ㄴ-22절, 27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21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7장 1-8절, 14-15절, 21-23절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이사야 예언자의 목소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만을 지키려는 우리를 꾸짖습니다. 마음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악한 것들을 멀리하기로 다짐하며, 입술이 아닌 마음으로 주님을 공경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8월 29일 (일)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8월 29일 (일)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8월 29일 (일) 교중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어째서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손 씻는 문제는 율법이 아닙니다. 오경 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기에, 그들은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막 지대라 먼지바람이 많고 물이 귀한 곳입니다. 따라서 외출하고 돌아와서나 음식을 먹기 전에 몸을 씻는 것은 위생에 큰 도움을 주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 규정이 왜 예수님과 제자들을 공격하는 수단이 될까요?

법의 자구 하나하나를 잘 지키는 것보다 그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이 존재하고 지켜지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죽음의 땅에서 구출하시고 생명의 땅으로 들어가 살게 해 주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과 함께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정신이 아니라 문자를 제 나름대로 해석하여 규칙을 더해 가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백성에게 강요합니다. 이 규칙들은 몇백 년의 시간을 거치며 ‘위대한 조상들의 전통’이 되어 백성을 옥죄입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백성을 차별하고, 죄인 취급하며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모든 규정과 율법은 그 기본 정신에 따라, ‘죽음의 땅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다가가시어 그들을 살리셨듯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당이나 사회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땅엔 없고 하늘에만 계시는?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오늘 신명기의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까이 계셔 주시는 하느님을 모시고,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율법도 가진 위대한 민족이라고 한껏 치켜세웁니다. 

그런데 복음의 주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이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할 뿐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떠나 있고 하느님이 주신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만 지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가까이 계시는데 이스라엘은 멀리 있고, 하느님께서는 계명을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은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까? 가까이 계시다면 왜 이스라엘은 멀리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다가가시고 이스라엘은 달아난 것일까요,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러니까 물리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적으로 한 공간에 있어도 누가 마음에 없으면 그는 먼 거지요. 관심이 없을 때 소 닭 보듯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소 닭 보듯 한다고 할 때 그 소와 닭의 관계입니다. 

무관심(無關心) 

이것이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관심을 풀이하자면 무엇 또는 누구에 관한 마음인데 무관심이란 그런 관심이 없는 것이고 무관심할 때 모든 관계가 정말로 완벽하게 끊어집니다. 

그러니까 마음 하나로 모든 관계가 완벽하게 끊어지는 것인데 그 마음 안에 사랑도 없고 미움도 없으며, 좋아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도 없으며, 그렇기에 욕망도 갈망도 없고 기대도 바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님과 남은 점 하나 차이라는 말처럼 마음이 멀어지면 부부가 한 이불 안에 있어도 등 돌리면 그만이지요.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며 주님께서 꾸짖으시듯 입술로는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데 우리 마음이 이 세상에만 있어 하느님은 하늘 멀리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늘에 계시고 땅에는 안 계신 하느님을 매일 입술로만 부르고 있지 않은지, 그래서 하느님의 뜻과 계명은 차 버리고 내 맘대로 살거나 기껏해야 인간의 전통이나 지키는 나는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의 ‘악’은 나에게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으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면서 하느님의 법은 폐기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 곧 자기를 더럽히는 것이 외부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것들은 모두 그 사람 안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가장 많이 읽고 존경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마이클 싱어’입니다. 마이클 싱어가 왜 그리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물론 그냥 ‘내어 맡기기 수행’을 통해 연 매출 3천억에 이르는 기업의 회장이 된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 안의 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될 일은 된다』란 책에서 자신이 내면의 목소리를 죽이고 그 너머의 ‘고요’와 같은 어떤 존재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기 시작하게 된 경험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고 심리나 인문학과는 거리가 먼 과학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상가요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까요? 

그의 이야기는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마이클 싱어는 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 셀리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 로니와 자신의 집 소파에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화의 소재가 떨어질 때마다 자신 안에서 스스로 다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대화의 소재를 찾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옳은 말을 하는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쉬지 않고 자신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으며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1970년 바로 그날만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 생각과 감정에서 잠시 나와 그렇게 다그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 어색한 순간을 메꿔보려 힘쓰는 나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 그 순간, 그 체험이 그의 온 삶을 바꿔놓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시시콜콜한, “날씨가 좋죠?”, “어제는 뭘 하며 지냈나요?” 등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말을 내뱉었다면, 그 순간 그는 그 짜증 나는 내면의 나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혹시 머릿속에서 쉼 없이 떠들어대는 목소리를 알아챈 적이 있나요?”

로니는 처음엔 조금 이상한 눈빛으로 마이클을 응시하더니 즉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자네가 무슨 이야기하는지 알겠어. 내 것도 당최 입을 다물지 않아.”

둘은 그렇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경험 이후로 지금까지 자기가 자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머릿속에서 쉼 없이 지껄이는 그 목소리가 점점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확신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나 자신과 싸움이 시작도 되지 않았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면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이후에 그놈이 멈추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지만, 자신은 어찌할 능력이 없다는 체험으로 미쳐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발견하게 된 것이 불교 명상이었습니다. 자아를 비워야만 참 나를 발견하게 되기에 생각을 멈추는 수련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시간 나는 대로 가부좌를 하고 호흡에 집중하며 생각을 끊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생각이 끊어져 고요한 평화로 들어갈 때의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빨리 명상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명상을 해도 일상의 삶 안에서는 또 내면의 목소리의 종이 되어 휘둘리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후 그는 또 다른 명상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면의 목소리 저편에 있는 ‘고요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캠핑하러 갔을 때 그곳 경치가 너무 좋아 그는 마치 부처님처럼 무언가 깨닫지 못하면 일어서지 않으리라는 결심으로, 한 나무 밑에 자리 잡고 앉아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자아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절대 자아의 목소리일 수 없는 이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은가, 알고 싶지 않은가?”

이 준엄하고도 따듯한 목소리에 가부좌한 다리가 아파져 왔지만, 다시 집중하여 그 목소리가 있는 곳에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고요 그 자체였습니다. 자아의 목소리가 범접할 수 없는 곳. 고요 그 자체였지만 평화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는 명상으로 우리로 말하면 거의 지성소까지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 평화의 고요에 자신을 맡기는 연습을 하였고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일들 속에서 그 섭리가 자신을 이끌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 경험은 우리 영성 안에서는 큰 깨달음도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도 내면의 적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만이 외부에 적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주님의 기도를 하면서 정작 ‘악’이 외부의 사탄이나 나를 괴롭히는 사람, 혹은 그러한 상황이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나를 더럽히는 모든 것은 나의 ‘내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내부에서 나를 유혹하는 목소리가 바로 ‘악’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악이 무엇인지 알려주실까요? 당연히 알려주십니다. ‘우리 자신’입니다. ‘자아’(ego)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시고, 당신이 십자가에 당신 자신을 죽이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버려야만 당신을 따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할 때 ‘사탄’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교리서는 이 ‘자아’에 대해 말하지 않을까요?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가톨릭교회교리서』, 2015)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눈길은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시선의 빛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준다. 그분의 진리와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에 비추어, 우리는 모든 것을 보게 된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15)


다시 말하면 자아와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영성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고, 그 자아를 이기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현존인식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마이클 싱어가 자신이 사라지고 고요에 머무는 상태를 체험했듯,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야만 자아의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파라오의 지배 아래에 있는 우리를 당신 피로써 구원하신 것과 같습니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에서 자기 형을 죽인 원수를 갚겠다고 끝까지 쫓는 레이를 인남은 더는 도망하지 못하고 딸을 살리기 위해 그와 함께 자폭합니다. 인남은 레이의 형을 죽인 킬러입니다. 이 영화에서 끝까지 자기를 쫓는 레이가 곧 인남 자신입니다. 곧 인남의 자아입니다. 킬러인 인남이 살아있는 한 이정재는 끝까지 그를 쫓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를 떨쳐내지 않으면 딸이 위험합니다. 딸은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레이가 살아있는 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안전하지 않습니다. 결국, 내가 죽지 않으면 자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황정민의 또 다른 캐릭터가 있습니다. 트랜스젠더인 유이입니다. 인남이 레이와 함께 자폭하여 둘 다 죽었을 때 유이는 기꺼이 유민이를 맡아줍니다. 유이가 참 자신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자아를 봉헌하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아’가 곧 주님께서 나를 구해주셔야 하는 ‘악’임을 알지 못하고 화해해야 한다거나 치유해야 하는 존재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아직 십자가의 길, 기도의 길, 곧 영성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를 더럽히는 모든 것은 내 안에서 자아가 자아내는 생존 욕구들입니다. 이것을 알면 남을 탓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당장 내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보기 때문입니다. “악에서 구하소서.”의 악이 나 자신임을 알고 그것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삶, 곧 기도를 시작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시 생각하기

 

학창 시절에 시험 볼 때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문제를 풀다 보면 ‘1번 아니면 2번인데….’라는 식으로 알쏭달쏭할 때가 있습니다. 고민 끝에 답을 썼습니다. 그 뒤에 문제를 모두 풀고 나서 답을 다시 점검하던 중에 갈등이 생겼던 문제를 봅니다. 한참을 다시 보면서 생각하다가 답안을 바꿨습니다. 그렇다면 바꾼 답은 정답일까요? 오답일까요? 확률적으로 어떤 것 같습니까?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답을 바꿔서 늘 틀렸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확률적으로 정답이었다가 오답으로 바꾼 경우는 25%이고, 오답이었다가 정답으로 바꾼 경우는 50%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나머지 25%는 오답이었다가 바꿔도 오답인 경우입니다. 
 
이 결과를 보면, 다시 생각해서 답을 바꾸는 것이 정답일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생각했기 때문에 정답을 찾을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다시 생각하기’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가 과거에 내린 결정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인지, 결정을 쉽게 바꾸지 못합니다. 바꾸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가 다가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택에 대한 후회에 대해 아쉬움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다시 생각하기에 더 좋은 선택을 할 확률이 높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항의하기 시작합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는 이유는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제의 법규의 준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 식사할 때까지 굳이 제의 법규를 준수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반대하는 마음에 이것을 굳이 지적합니다. 
 
이들 역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지적을 하고 있었는지, 과연 이런 지적이 올바른 것인지를 다시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들을 향해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통해서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게 될 때,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게 될 때, 남을 판단하려고 할 때, 모두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것들을 조금씩 줄여나갈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모든 일이 뜻대로 되고, 하느님께 청하여 성공하게 되더라도,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두려워해야 한다. 성공에는 하느님을 잊고 그분을 거스를 위험이 많기 때문이다.

- 십자가의 성 요한

 

 

어떻게 신경 쓰지 않고 살까요? 

 

지금까지 산 삶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면, ‘누구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생기기 마련이다’입니다. 이는 누구나 예외 없이 경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분명히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싫어하는 감정을 품는 사람은 어떨까요? 이 사람의 감정도 엉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미움을 받는 나뿐 아니라, 미워하는 감정을 갖는 상대 역시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차피 싫어하는 사람은 있는 법입니다. 괜히 신경을 써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오히려 사랑하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더는 신경 쓰지 않으면서 지금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봉헌은 위선을 치유하는 회심이다.

 

"사람을 더럽힌다." (마르 7, 23) 

아름다운 창조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생명이다. 우리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올바른 신앙은 하느님을 황급하게 되찾는 것이다. 하느님을 되찾는 것이 내면의 성찰 그 시작이다. 

관계를 더럽히는 우리의 오만과 독선 이기적 욕망과 지나친 경쟁심을 다시 보게된다. 가슴 치는 성찰을 통해 깨닫게되는 것은 관계의 파괴 자연의 파괴 그 주범이 우리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관계의 파괴는 무분별한 자연의 파괴로 이어진다. 우리 마음도 다시 태어나야 본래의 빛깔을 되찾게된다. 마음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 깨어있는 마음이 깨어있는 실천이 된다. 아름답고 진실한 마음이 서로를 위하는 살아있는 마음이다. 나 중심으로 살아온 어두운 시간이 하느님 중심의 살리는 빛의 시간으로 나누어져야 한다. 

우리의 내면이 하느님을 향할 때이다. 시간은 참으로 빠르다. 지금을 놓치고 내일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사람을 더럽히는 죄에서 벗어나 사람과 환경을 위해 기도하는 거룩한 주일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은 사람을 더럽히는 악한 삶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더럽힌 사람을 하느님께서 다시 깨끗이 씻겨주는 사랑이다. 우리 삶에 모셔야 할 하느님이시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그 하느님께 우리 내면의 악한 모든 것을 봉헌한다. 

봉헌은 위선을 치유하는 회심이다. 하느님 마음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주일이다. 사람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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