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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8월 31일 (화)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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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

 

 

21년 8월 31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날이 밤도둑처럼 올 것이니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자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그 더러운 영을 몰아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8월 31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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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테살 5장 1-6절, 9-11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 시간과 그 때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1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4장 31-37절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8월 31일 (화)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8월 31일 (화)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8월 31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구원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신 다음,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기적을 본 군중과 목격자들은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권위와 힘이 있다.’라며 몹시 놀랍니다. 

“이 권위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도유되신 데 기인하고 성경 본문을 어떠한 인간적 전통에 의지하여 해설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 직접 말씀을 받아 가르치시는 데서 성립된 것입니다”(박영식, 『루카 복음 해설 2』, 112면). 

여기서 예수님과 같은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에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예식으로는 물을 붓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례성사의 핵심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는 말씀과 비둘기 모양의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마태 3,16-17; 루카 3,21-22 참조).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도 똑같이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머무르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 성령께서 내게서 떠나지 않으시기에 우리에게 인호가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는 무엇을 하실까요?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시고자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이렇게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길은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하고, 죽어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죽음’이 대비되듯이, 이 사랑의 길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 사랑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완성하고자 끝까지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도 잠드는 그런 밤은 아니올시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바오로 사도는 어제도 희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더니 오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으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이방인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뉘앙스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깔보는 것은 아니지요.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야 한다는 자극이요 도전이요 격려지요. 

자꾸 제 얘기하는 것 같아서 얘기하는 것이 그리 흔쾌하지는 않지만 옛날의 저는 저 자신에게도 그리고 형제들에게도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을 거면 뭣하러 수도원에 들어왔냐는 태도를 강하게 견지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컸지요.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버리게 되었는데 이것도 하나의 욕심이고, 욕심 중에서도 고차원적인 욕심이며 교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성인들이 살았던 사랑을 살자고, 성인이 목표인 삶이 아니라 하느님이 목표인 삶을 살자고 목표 수정을 했는데 이런 좋은 이유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곧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평범한 사람이 되자는 것인데 향상向上의 의지를 포기한 평범이요, 다분히 편안함에 안주하는 평범이었지요. 

어제 아침에도 혼자 미사를 드리면서 저를 성찰하고 반성하는데 요즘 들어 자주 저를 내어주기보다 저의 만족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삶을 많이 살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만들거나 일을 벌이려 하지 않고, 성가신 일이나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것 등등. 

이렇게 만족과 편안함에 안주하는 평범을 살기 시작하면 부지런히 움직이던 제가 활동을 멈추고 앉게 되고, 앉아 있던 저는 소파에 비스듬이 기대게 되고, 기대어 앉아 있던 저는 완전히 자리를 깔고 누울 것이고, 자리를 깔고 누운 저는 그만 잠에 빠지게 되겠지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밤에 나쁜 짓을 하거나 쾌락에 빠져 지내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밤이란 나쁜 짓과 쾌락의 시간만이 아니라 밤은 잠에 취해 있는 시간이기도 하잖아요? 

밤에 깨어 나쁜 짓 하기 보다 잠자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잠을 잔다는 것은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도 잠들고 좋은 일도 멈춘 상태지요. 

죄 짓지 않기 위해 잠이나 자는 그런 소극적인 태도로는 사랑을 이룰 수 없고 무엇보다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육신의 잠은 좋은 것일 수 있지만, 영적인 잠, 그러니까 영이 잠들고 사랑이 잠든 그런 잠은 나쁩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우리는 썩어빠진 정신은 버리고 맑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는 것은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은 몰아내고 어제 복음의 주님처럼 영을 받는 것이니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대낮의 자녀로 살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어떤 권위? : 몽둥이 - 논리 - 피

 

오늘 복음은 ‘권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회당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낫게 하는 것에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영’에 관련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구조는 ‘육체-혼-영’으로 되어있습니다. 육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고, 혼(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으며, 영(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란 상대를 나의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누구나 권위를 가지고 산다고 믿을 텐데 우리는 인간의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권위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가장 낮은 단계의 권위. 사실 권위가 없을 때 사용되는 권위입니다. 소위 ‘폭력’이라고 하는데 몸을 움직이는 데 사용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설득할 머리도 없고 그저 힘만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권위입니다. 

궁예는 바닥에서 시작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한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궁예는 폭군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미륵불이라 자처하며 부처와 같은 수준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 옛날 원효는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불법을 다 알 수 있다고 하였느니라.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주문이 있노라. 그대들은 모두 외울지어다. 집에 있을 때나 일할 때나 잘 때나 일어났을 때나 모두 외울지어다. 옴마니 밤매훔을 외울지어다. 이것은 석가도 알았고 나도 알았던 불경의 모든 것이니라. 이 주문이 그대들을 이 지옥에 땅에서 극락으로 이끌 것이니라. 옴마니 밤매훔, 옴마이 밤매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인가?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말이야!”

한 신하가 기침을 하며 말합니다. 

“소인이옵니다. 폐하.”

“참으로 딱하구나. 짐이 지금 관심법을 하고 있는데 어찌 기침을 할 수 있느냐, 이 미련한 것아.”

“송구하옵니다,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가만해 보니 네 머리에는 마군이(불도를 방해하는 온갖 번뇌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가득 찼구나. 여봐라. 저자 안에 있는 마군이를 때려죽여라!”

이렇게 신하뿐만 아니라 여인들까지도 철퇴로 죽이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왜 폭력을 쓸까요? 말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왜 말로 안 될까요? 설득시킬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녀에게 폭력을 쓴다면 그것은 말로 설득할 논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자기 힘으로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문제입니다. 

또다른 권위는 논리로 설득하는 사람입니다. 역시 자기 힘으로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폭력을 쓰지 않고 논리적인 설득력을 사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설득력도 항상 한계를 지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머리를 따르지 않고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컬투쇼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요즘 유행한다는 부모교육을 두 시간 동안 들은 엄마가 아이들에게 윽박지르지 않고 ‘… 구나’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실천방법을 터득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에 다녀온 아이가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려 하자, “너 배가 아주 고팠구나. 그런데 손을 먼저 씻어야겠지? 손을 씻고 먹으면 더 맛있겠구나.”라며  설득하는 투로 말했습니다. 

항상 이렇게 아이를 설득하며 지내던 그날도 “친구와 싸웠구나. 친구와는 사이좋게 지내야지. 왜냐하면….”이라고 하는데, 아이는 귀를 막고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해. 그만해! 그냥 때려. 그럼 그냥 할게!”

우리가 머리로 이해한다고 그것을 다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죄를 안 지어야 하는 것을 몰라서 죄를 지을까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바뀌어야 바뀝니다. 그래야 이해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바꿀 줄 아는 힘이 가장 큰 힘입니다. 

마음엔 무엇이 살까요? ‘욕구’가 삽니다. 우리를 조정하는 것은 이 욕구입니다. 그런데 욕구는 ‘본성’입니다. 태어날 때 부여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세속-육신-마귀의 본성을 타고났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바꾸는 방법은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는데, 새로 태어나려면 새로운 부모가 주는 ‘양식과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 양식과 가르침을 성체와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따라서 가장 큰 권위는 나의 욕구를 바꿔줄 양식과 말씀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하려면 그보다 더 높은 하느님 본성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임금이 있어도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지닌 미실이라는 여인의 캐릭터가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신을 치려는 임금과 많은 군사 앞에서 그녀는 화랑들을 이끌고 나옵니다. 그녀가 화랑을 관장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금과 군사들 앞에서 ‘낭장결의’(화랑들이 화장하고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세우는 일)를 하고 할복하자 임금과 군사들은 칼을 집어 던집니다. 미실의 ‘권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미실은 당시 귀족의 아들들을 자신의 한 마디에 할복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미실이란 여인이 그들을 위해 죽어줄 수 있는 사람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드라마라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권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곧 성령입니다. 그 성령으로만 우리 마음을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권위가 있으셨던 이유는 당신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정치적 권위를 얻으려고 경선도 하고 상대를 공격하기도 하며 노력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는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권위입니다. 

먼저 생명이 아닌 십일조라도 기쁘게 내어놓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권위가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권위의 시작일 것입니다. 피는 흐름입니다. 인간 본래의 본성은 소유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흐르게 할 수 있다면 이미 영적인 권위를 지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자녀에게 소유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방법

 

부부싸움을 자주 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싸우는 것을 보고 자란 대학생 딸은 어떻게 하면 부모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어머니의 휴대전화를 보게 되었는데, 통화목록에 ‘ㅅㅂㄴ’이 있습니다. 좋지 않은 단어가 생각나는 약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약자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어머니에게 “엄마, ㅅㅂㄴ이 누구야?”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이 “응, 네 아빠지. 누구겠니?”라고 답합니다. 
 
딸은 엄마 아빠가 자주 부부싸움은 하지만, 이렇게 욕을 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아니, 아빠를 어떻게 ㅅㅂㄴ(시발놈)이라고 할 수 있어?”라면서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설마, 네 아빠를 시발놈이라고 하겠니? ㅅㅂㄴ은 서방님을 말하는 거야.” 
 
약자의 정확한 뜻을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냥 평소에 봤던 글자에 맞춰서 추측할 뿐이지요. 그러다 보니 어머니에 대한 오해를 딸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추측도 참 많았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게 되면서 여러 가지 추측을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예수님에 대한 신원을 알게 되는 것은 참으로 힘든 것 같습니다. 각종 표징을 보여줘도 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전해줘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큰 소리를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마귀의 말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당연히 참입니다. 마귀들도 인정하는 예수님의 신원을 왜 사람들은 믿지 못했을까요? 
 
마귀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정상인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묘지 사이를 다니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처럼 내동댕이쳐지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한 사람이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이야기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만약 당시에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가 말을 했다면 분명히 다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혼란을 줘서는 안 되기에 함구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방법은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숨어있던 주님의 신비가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은 자신과 삶 그리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도와준다.

- 프랭크 오스타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실천

 

어느 헬스트레이너가 몸매 관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며 그 방법을 이렇게 말해 줍니다. 
 
“매일 1시간씩 뛰거나 체육관에서 운동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를 6개월에서 1년 동안 지속하십시오.” 
 
이대로 한다면 어떨까요? 분명 멋진 몸매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왜 멋진 몸을 만들기 힘들까요? 
 
알지만 그렇게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 뜻에 맞게 살면 됩니다. 하지만 실천하지 못하기에 주님 앞에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어떤 실천을 하고 계십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현존이 바로 살아있는 권위이다.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루카 4,34) 

신앙의 기쁨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참기쁨이다. 예수님과 마주하는 은총의 기쁨을 우리가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만나는 시간이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참된 권위이시며 참된 영광이시다.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현존이 바로 살아있는 권위이다. 예수님의 인격과 권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의 인격 안에 사람을 온전케 하는 권위가 들어있다. 복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내고 권위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치유하신다. 마귀를 내쫓는 권위또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다. 

우리를 속죄와 구속으로 이끄시는 권위이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의 강력한 뜻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에 속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능력을 드러내고 능력은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 이끄신다. 

회개와 치유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8월의 끝날이다. 우리의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는 은총의 8월이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신앙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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