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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9월 11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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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

 

 

21년 9월 11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이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 말씀을 실천하여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맺는 열매가 그들의 믿음을 입증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9월 1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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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티모 1장 15-17절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사랑하는 그대여, 

15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16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17 
영원한 임금이시며 불사불멸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찬양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을.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은 찬양받으소서. 주님은 모든 민족들 위에 높으시고, 그분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네. 주님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누가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 같으랴? 하늘과 땅을 굽어보시는 분, 억눌린 이를 흙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 주님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6장 43-49절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44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46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47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48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49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믿는 이들을 생명의 말씀과 천상 성사로 기르시고 새롭게 하시니 사랑하시는 성자의 크신 은혜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11일 (토)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11일 (토)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11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듯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하고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삶이 아닌 구체적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사랑이란 그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사랑』, 59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공허하며 아무 의미 없는 단어일 뿐입니다. 행동으로 보일 때, 그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이 느껴질 때 우리는 마침내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삶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죄인이었지만,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소하게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비판하기도 하고, 그 밖의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고 용서를 청하며, 치유의 은사를 받아 다른 이에게도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듯’ 우리는 기도와 성사 생활을 통하여 우리 마음의 곳간에 선한 은총을 풍성히 내려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가진 것을 이웃과 기꺼이 나누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과제만 받아든 오늘

 

늘 하던 대로 어제 새벽도 강론을 올리고,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묵상을 시작하자마자 이런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 나는 나 자신에게 진실한가?

- 나는 나 자신에게 성실한가?

- 나는 하느님 앞에 있는가?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데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이 내게도 오시는가?

이런 질문들이 터져나온 이유는 제가 그렇지 않다는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의구심이 무의식 안에 계속 있었는데 그것을 계속 눌러왔기 때문에 터져나온 것일 겁니다.


- 나는 나 자신도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 합리화를 위해 하는 시늉만 하는 것은 아닌지,

- 잠시 하느님 앞에 있는 것으로 안심시킨 것은 아닌지.

 
이런 의구심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싫어 눌러왔다가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에 대한 오늘 복음이 눌러왔던 이 의구심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구심들 때문에 어제와 오늘 저는 유쾌할 수 없었고, 지금도 찜찜한 상태로 있습니다.

옛날 저는 다음과 같은 강의를 자주 했습니다.

사음수성독 우음수성유 (蛇飮水 成毒, 牛飮水 成乳)

곧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된다.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뱀과 같은 내가 소와 같은 존재로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들어도 남을 죽이는 독설로 나올 것이다. 그러니 존재적인 회개를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주로 강의를 했지요.

그런데 오늘은 남에게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한테, 속속들이 병든 몸을 고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음식 먹어도 소용 없고, 암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암을 더 키울 뿐이듯 육의 내가 영의 나로 존재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나는 육의 열매만 맺을 것이라는 과제를 주는 것으로 갈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강론을 끝날 때까지 각성(覺醒)과 각오(覺悟)와 결심은 못하고 과제만 받아들고 오늘 강론은 마쳐야겠습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당신이 누구라고 믿건 당신의 믿음은 옳다.

 

오늘 복음은 ‘본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가 열릴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둘 수 없습니다. 본성이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동을 내어놓고 본성이 악한 사람은 악한 행동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따라서 마음, 곧 본성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고 생각이나 행동을 변화시키려 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바라시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치셨으니 그것을 실천하자.”라는 식의 가르침은 신자들을 금방 무너질 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 곧 본성은 오직 ‘믿음’으로만 변화됩니다. 마음 안에 자리 잡는 것이 셋 있는데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본인이 늑대라 믿으면 사람이면서도 늑대의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까치도 자기가 개라고 믿으면 개처럼 짖어댑니다. 사람이라도 본인이 개라고 믿으면 개의 소리를 내며 마치 먹을 것을 빼앗길 것처럼 자녀들을 학교에 못 가게 방안에 가둡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자신의 본성대로 밖에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본성이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같은 본성끼리여야만 완전한 친교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자격 미달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하더라도 그 열등하다고 믿는 수준만큼밖에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건 겸손이 아닙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본인이 늑대라고 믿는 사람과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온전한 친교와 사랑이 이뤄지겠습니까?

“이방에 들지 않겠어요.”

켈리 여사가 호텔 보이에게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가구 하나 없는 이 게딱지만한 벽장에 들면서 그렇게 많은 방값을 지불하진 않을 겁니다. 당신은 내가 촌에서 올라왔다고 깔보는 모양인데….”

“부인 일단 타세요.”

보이가 그녀의 말을 자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부인의 방이 아닙니다. 엘리베이터라고요!”

자존감은 내가 누구냐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누구와도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 그럴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다 내 열등감의 희생양이 됩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작은 것에도 무시당하는 것 같아 상처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와 만날 때 먼저 가져야 하는 것은 나도 저 사람에게 꿀릴 게 하나도 없다는 자신감입니다. 이 자신감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누구도 만나지 마십시오. 어쨌거나 그 관계는 비극으로 끝날 것입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한 여학생이 입사 지원서를 냈는데 면접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지원한 분야는 회계업무부서였는데 회사는 경력자를 선호하는데 그녀는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디려는 사회 초년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입사 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번에 그녀는 “면접이라도 치를 수 있게 꼭 기회를 달라.”라고 사정했고 면접관은 그녀의 적극적인 의욕을 높이 샀습니다. 결국, 그녀는 필기시험까지 무사히 통과하여 인사경리 부서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인사경리부서의 책임자는 입사시험 성적이 뛰어난 그녀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으나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회사 규정상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다른 부서와 마찬가지로 인사경리부서 역시 경력 사원을 찾고 있었습니다. 면접을 보러 온 여학생에게 그는 예의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도 좋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다시 전화로 연락을 드리지요.”

분위기가 냉담해진 것을 알아차린 여학생은 갑자기 1달러를 꺼내어 면접관에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좋으니 꼭 제게 연락해 주세요.” 

면접관은 이렇게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라 잠시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는 여학생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전화하지 않을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여학생이 말했습니다. 

“아까 분명히 좋은 소식이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의 의미는 합격하지 못하면 전화하지 않겠다는 말이잖아요.”

면접관은 점차 호기심이 발동하여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당신을 채용하지 않기로 했다면,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저의 어떤 점이 귀사의 채용 기준에 부적합한지 알려주시면 앞으로 고치겠습니다.”

“그럼 아까 내게 준 이 1달러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학생이 말했습니다. 

“회사 규정상 불합격자에게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전화 요금을 따로 드린 거예요. 그러니 떨어졌더라도 연락 부탁드립니다.” 

면접관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번졌습니다.

“1달러를 돌려주겠어요. 당신에게 전화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을 채용하기로 했거든요.” 

여학생은 단돈 1달러와 재치 있는 행동으로 인생의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출처: 『좋은 생각이 행복을 부른다』, 커쥔, 프라임]

이렇듯 자신이 만나는 무엇과 관계를 맺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 믿음을 사제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를 통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합당하지 않다고 하지 맙시다. 그 마음 없애주기 위해 성체 성혈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야곱이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이 에사우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성체를 영한 우리는 그리스도라 믿고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들에게 이런 믿음을 주는 레베카와 같은 사제들입니다. 사제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고, 다른 이들도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변화시켜주는 것입니다. 

내가 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사과나무를 심었는데 썩은 사과가 맺혔습니다. 이는 내가 주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믿음입니다. 계속 썩은 열매만 맺는 그 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내가 하느님과 관계 맺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에 합당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 믿는 그 믿음이 바로 좋은 열매입니다. 그래야 내가 잘리지 않습니다. 

성체를 영한 뒤 여러분 안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나는 예수다!”

그러면 여러분은 응답하십시오. 

“아멘!”

이것이 하느님과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열매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의 길

 

유산소 운동뿐 아니라 근육운동도 같이 하면서 매일 1시간 이상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제관에 들어오면 헬스장에 있는 바벨과 덤벨을 비롯한 각종 운동 기구를 볼 수 있습니다. 꾸준하게 운동해서인지 근육도 꽤 붙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를 보고 어떤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십 넘어서 몸짱 되려는 거야? 왜 이렇게 몸이 좋아졌어?” 
 
방송에 나오는 헬스트레이너와 같은 몸매를 가지고 싶어서 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책 많이 보고, 글 열심히 쓰기 위해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신학생 때, 허리를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 병원에 입원도 하면서 허리통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지요. 허리가 아플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수영, 자전거 그리고 헬스까지 모두 허리통증을 없애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습니다. 
 
몸짱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근육맨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저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했던 운동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따름으로 인해 자기 마음의 안정과 함께 힘차게 이 세상을 사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밖에 다른 은총은 여분의 주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은총, 특히 세속적인 욕심만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튼튼한 기초를 다지고서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들어가는 순간,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짓는 모습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은 좋은 나무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 나쁜 나무로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참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행복의 길로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억지로 끌고서 그 길로 들어가시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그 길이 어떤 길인지만을 가르쳐주셨고, 그 실천의 몫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 길로 직접 걸어가고 있나요?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행복의 길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으시길 바랍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는 자는 큰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다.

- 에스토니아

 

 

자기만의 삶을 떳떳하게 삽시다.

 

20대에는 대학 졸업과 군 생활, 그리고 곧바로 취업에 들어갑니다. 여기에 능력이 되면 결혼까지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30대가 되면 직장 생활과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 4~50대가 되면 직장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고, 자녀의 교육 문제가 끝나 가는 시기를 갖게 됩니다. 60대 이후 나와 사랑하는 아내와의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 
 
저야 신부라서 조금 다르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런 공식에 맞춰서 살아야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 주변의 사람을 보면 대부분 이 공식에 맞춰서 살아야 잘 적응하며 사는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힘든 삶을 사는 사람으로 평가되곤 했습니다. 
 
종종 옛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지금 신나게 사는 친구들은 남처럼 사는 친구가 아니라 자기만의 삶을 사는 친구였습니다. 취업 준비를 하지 않고 노는 데 더 집중했던 친구, 30세에 들어서며 다시 공부를 시작한 친구, 자신이 잘하던 것을 그만두고 이제까지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시작했던 친구…. 
 
남들처럼 사는 것이 정답 같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만의 삶을 떳떳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말씀은 실행을 부르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부른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루카 6, 43)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이 가을 묻게된다. 귀를 기울여야 할 주님의 말씀이시다. 말씀의 진리가 실행의 참된 열매가 된다. 날마다 생명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실행하는 삶이 바로 복음의 참된 삶이다. 

복음의 삶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복음의 삶은 좋은 실행의 발자국들로 넘쳐난다. 말씀은 우리에게 열매를 내어주듯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선사한다. 말씀과 함께 이 시간을 견디고 말씀과 함께 이 시련을 통과한다. 

말씀과 실행은 나무와 열매같이 이렇게 함께 이어진다. 말씀으로 시작하고 실행으로 완성된다. 말씀의 실행이란 주님께 바치고 주님께 내어드리는 삶이다. 우리의 삶이 좋은 열매가 되어야한다. 

좋은 나무는 주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실행과 함께 자라난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또한 말씀과 함께 자라난다. 말씀을 품은 삶이 말씀을 실행한다. 말씀은 실행을 부르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부른다. 주님께서 자녀들을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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