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
21년 9월 15일 (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Memorial of Our Lady of Sorrows)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자식의 아픔은 어머니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시메온은 성모님의 고통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이 기념일을 정했습니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이 기념일을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옮겨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연계하여 기억하게 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시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께서 서 계셨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십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히브 5장 7-9절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화답송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의로움으로 저를 구하소서. 제게 당신 귀를 기울이시고, 어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숨겨진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의 피신처이시옵니다.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저는 당신만 믿고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제 운명 당신 손에 달렸으니,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주님은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사람들 보는 데서 그 선을 베푸시나이다.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부속가
아들예수 / 높이달린 / 십자곁에 / 성모서서 / 비통하게 / 우시네.
섧고설운 / 슬픔고통 / 성모성심 / 칼에찔려 / 참혹하게 / 뚫렸네.
독생성자 / 수난하니 / 여인중에 / 복된성모 / 애간장이 / 다녹네.
아들수난 / 보는성모 / 맘저미는 / 아픔속에 / 하염없이 / 우시네.
예수모친 / 이런고통 / 지켜보는 / 우리죄인 / 누가울지 / 않으리?
십자가의 / 아들보며 / 함께받는 / 성모고통 / 누가슬퍼 / 않으리?
우리죄로 / 채찍모욕 / 당하시는 / 아들예수 / 성모슬피 / 보시네.
기진하여 / 버려진채 / 죽어가는 / 아들보고 / 애처로이 / 우시네.
사랑의샘 / 동정성모 / 저희들도 / 슬퍼하며 / 함께울게 / 하소서.
그리스도 / 하느님을 / 사랑하는 / 제마음에 / 불이타게 / 하소서.
어머니께 / 청하오니 / 제맘속에 / 주님상처 / 깊이새겨 / 주소서.
저를위해 / 상처입고 / 수난하신 / 주님고통 / 제게나눠 / 주소서.
사는동안 / 십자고통 / 성모님과 / 아파하며 / 같이울게 / 하소서.
십자곁에 / 저도서서 / 성모님과 / 한맘으로 / 슬피울게 / 하소서.
동정중의 / 동정이신 / 성모님의 / 크신슬픔 / 저도울게 / 하소서.
주님상처 / 깊이새겨 / 그리스도 / 수난죽음 / 지고가게 / 하소서.
저희들도 / 아들상처 / 십자가위 / 흘린피로 / 흠뻑젖게 / 하소서.
동정성모 / 심판날에 / 영원형벌 / 불속에서 / 저를지켜 / 주소서.
그리스도 / 수난공로 / 십자가의 / 은총으로 / 보호하여 / 주소서.
이몸죽어 / 제영혼이 / 천국영광 / 주예수님 / 만나뵙게 / 하소서.
복음
요한 19장 25-27절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부속가 -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영원한 구원의 성사에 참여하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며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15일 (수)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15일 (수)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15일 (수)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그리스도의 희생 없이 우리의 구원은 없다.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성전에 들어섰을 때, 의롭고 독실한 시메온은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이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루카 2,34-35 참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께서는 시메온이 예언한 시간의 가장 중심에 서 계십니다. 십자가 아래의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구세주의 수난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고, 인간은 다양한 삶의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이 모두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수난 없이 파스카의 부활은 없으며, 그리스도의 희생 없이 우리의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의 수난을 두 눈으로 목격하신 성모님의 고통은, 이집트에서 피난살이하며 겪은 고통(마태 2,13-15 참조)이나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려서 헤매던 고통(루카 2,41-51 참조)보다 더 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께서, 우리도 우리의 삶의 고통과 마주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더 큰 계획 안에 함께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도 신앙의 나그넷길을 걸으셨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드님과 당신의 결합을 충실히 견지하셨다. 거기에 하느님의 계획대로 서 계시어(요한 19,25 참조), 성모님께서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극도의 고통을 겪으시며 당신에게서 나신 희생 제물에 사랑으로 일치하시어 아드님의 희생 제사에 어머니의 마음으로 당신을 결합시키셨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성모님을 제자에게 어머니로 주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27 참조)”(교회 헌장 58항).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 옆에 그리고 우리 옆에도 함께 계시는 어머니
저는 이런 얘기를 할 자격이 없을 정도로 제 사랑은 보잘 것 없지만 이런 제게도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면에서 재미있는 현상, 곧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
곧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있었으면 하고,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을 아예 모르기를 그래서 제 슬픔과 괴로움의 근처에도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저의 어머니가 두 번 면회 오셨습니다. 그중 한 번은 군대 간다는 얘기도 없이 수도원에서 바로 군대 간 것을 6개월이 지난 다음 아시고 수소문해서 오신 거지요.
그런데 오시겠다는 연락을 받고 제가 외출할 테니 오지 마시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받지 못하고 오셨기 때문에 헛걸음을 하셨지요. 저는 집으로 가고 어머니는 부대로 오심으로 길이 엇갈렸던 겁니다.
군대 갈 때 말씀드리지 않고 간 것이나 면회를 오지 마시라고 한 것 모두 어머니가 너무 슬퍼하실까 봐 그리고 고생하는 모습 보시고 너무 마음 아파하실까 봐 그런 것인데 나중에 좀 더 철이 들고는 군대 가는 자식을 보시는 아픔보다 못 보신 아픔이 더 크고 고생하는 저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보다 안 보여드린 것이 더 불효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렇게 군대를 보내신 것이나 면회 오셨다가 헛걸음케 한 것을 생각하면 그때 저의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 아프시고 슬프셨을까 지금도 너무 후회되는데 그때의 저는 저대로 어머니를 사랑한답시고 그리한 것입니다.
아무튼, 사랑하면 기쁨과 즐거움에 사랑하는 이가 함께 하기를 바라고, 슬픔과 괴로움에는 사랑하는 이가 함께 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 반대도 같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기쁜 일과 즐거운 일에는 함께 하지 않아도 되지만 슬픈 일과 괴로운 일에는 함께하지 않으면 그것이 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을 경우는 기쁘고 즐거운 일에는 함께하다가 슬프고 괴로운 일을 당할 때는 주님의 제자들처럼 도망쳐버리지요.
오늘 복음은 이런 사랑의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장면입니다. 십자가 곁에 주님께서 환호받으실 때 있던 제자들은 없고 그럴 때는 한걸음 물러나 있던 마리아와 여인들이 있습니다.
고통을 함께할 수 없는 것이 더 큰 고통인 그런 사랑,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 차라리 덜 코통스런 그런 사랑, 이런 사랑을 일컬어 우리는 Passio(수난)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하셨고, 어머니께서는 아들에게 이런 사랑을 하심으로 아드님의 지체들이며 어머니의 다른 아들들인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을 하셨습니다.
어제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미사를 작은 그룹과 함께 봉헌했는데 부처님에 비해 십자가의 주님을 보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냐, 십자가의 주님을 보며 편한 적이 있었냐고 제가 물었을 때 내가 고통받을 때는 십자가의 주님이 불편하지 않았다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보통 때는 십자가의 주님을 보는 것이 불편하고 부담스럽지만 내가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십자가의 주님이 위안을 주시지요. 그런데 그렇긴 하지만 그것은 편안이라기보다는 위안입니다.
그리고 많은 분에게 위로는 주님보다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더 느끼고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 마리아를 위로의 성모라고 부르지요.
아무튼, 십자가의 주님 옆에 함께 계신 어머니께서 우리 옆에도 함께 계심을 믿고 그 사랑을 느끼는 오늘 우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돈만 많이 주면 출산율이 높아질까?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받으신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모님 고통을 보답해 주시는 것처럼 요한을 당신 아들로 주십니다.
십자가 신학에서는 예수님은 교회의 신랑이시고 성모님은 신부이시며 요한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교회를 낳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라 불림을 받으십니다.
이것은 성모님께서 고통받으신 것의 보답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편하게 지내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여 하느님 자녀들을 낳으셨습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당신 자녀들을 보시며 참으로 행복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에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더 큰 행복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를 더 낳으라고 하면 어머니들은 ‘당신이 키워줄 겁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만큼 한 자녀를 더 낳는 것은 큰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출산율은 전세계 최하위입니다. 2020년 우리나라 출산율은 0.84명입니다. OECD 국가 중 출산율 1.0 이하인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현 속도로 가면 2100년경 총인구는 1650만 명대로 쪼그라들고 2300년경이면 100만 명도 안 돼 사실상 국가의 소멸입니다.
옥스퍼드 인구문제연구소 데이비드 콜먼 박사는 우리나라 저출산 문제를 연구하고 코리아 신드롬이란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지구촌에서 사라지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극도로 아기를 낳지 않는 이유를 대부분은 돈이 많이 든다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주택정책과 교육을 위한 재정지원 정책으로 어마어마한 액수가 매년 투자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집값만 더 오르고 사교육비는 더 증가합니다. 그리고 출산율은 계속 곤두박질칩니다. 그런데 유럽 나라들은 이런 정책들을 하지 않을까요? 합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효과가 없고, 외국은 효과가 있다는 그 차이입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고통이었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아닌 성모님은 이런 고통을 감내하시길 원하셨을까요? 돈을 많이 줘서였을까요?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자녀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고통을 함께할 어머니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고통에서 자녀를 많이 낳게 만드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이나 마더 데레사와 같은 분들은 많은 하느님 자녀를 낳으신 분들입니다. 그들은 왜 그런 고통을 감내하셨을까요? 단순합니다. 하느님을 알아 행복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정글 지역에 있는 개신교 학교에 매우 보기 흉한 소녀가 찾아왔습니다. 흉한 몰골의 그 소녀는 코가 없는 기형아였고 심지어 지적장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학교의 교감은 그를 환대하고 학교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학교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래 몇 마디를 배우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코 없는 소녀가 가진 유일한 소질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되지 않아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의 반대로 더는 소녀를 가르칠 수 없었고 그래서 교감은 그 소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녀는 슬퍼하며 다시 정글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렇게 소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졌습니다.
2년 후, 한 선교회에 정글 마을로부터 복음을 전해 달라는 간절한 호소의 편지가 왔습니다. 선교회는 그 마을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선교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언덕에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오자 몇몇 사람들이 그를 맞이하여 주민 가운데로 인도했습니다.
선교사는 먼저 찬양을 하나 가르치기로 하고 간단한 합창을 하나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300여 명의 원주민은 “우리도 아는데요.”라고 말하며 찬양을 함께 불렀습니다. 선교사는 너무나 놀라 다른 찬양을 불렀는데 역시 그 찬양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배우셨나요?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는 한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선교사는 놀란 듯이 그들을 쳐다보았고, 그들은 한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바로 학교에서 쫓겨난 후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진 그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지적장애인이었지만 자신을 받아준 학교에 대한 감사를 느꼈고 자신이 외운 찬송가를 자기 마을에서 매일 부르고 다녔던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든 그날그날의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누구는 그 같은 고통 속에서도 아이를 더 낳고 누구는 낳지 않으려 합니다. 어쩌면 나와 똑같이 불행한 아이를 더는 낳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게 하려면 나라가 나서서 내가 낳는 자녀가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될 확신을 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도 자녀를 낳지 않으면 이율배반이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현재 어느 나라가 가장 출산율이 높을까요? 항상 우리나라와 비교되는 이스라엘입니다. 2018년 기준으로 이스라엘이 3.09명이고 그다음이 멕시코 2.13명입니다. 그리고 터키가 1.99명, 프랑스가 1.84명입니다. 꼴찌에서 두 번째가 스페인인데 1.26명이고 한국이 당시 0.98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2위 멕시코와의 격차도 상당합니다. 이렇게 가면 이스라엘은 미국처럼 커지고 한국은 지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복지가 좋을까요? 당연히 좋습니다. 정년이 68세이고 아기를 더 낳으라고 갖은 장려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와 문화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자존감이 있습니다. 그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문화 안에서는 자신만 그 행복을 누리고 그래서 또 다른 하느님 백성을 낳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텔아비브에 유학해 23년째 거주하는 한국 여성 정자은 씨(44)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아이가 삶에 중요하다는 종교적 믿음이 있고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은 수치스러워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출처: ‘출산율 이스라엘 1등, 한국 꼴찌 왜?’, 김세형, 매경 칼럼)
내가 낳은 자녀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광스럽게 빛나게 될 것을 믿는다면, 그런 확실한 태몽을 꾸었다면 그 아이를 낳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도 그렇게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자녀를 낳는 고통을 거부하는 이유는 고통 자체를 원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 고통에 대한 확실한 보답이 있을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봐야 나처럼 고통만 받으며 살 것 같고 자녀가 왜 나를 낳았냐고 원망을 할 것 같으니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사람만이 자신과 같은 행복한 사람을 낳기 위해 고통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자존감’과 비례합니다. 출산율을 높이려고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부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으로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냐는 정체성으로 높아집니다. 이는 진화론이 팽배한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진화론 안에서 우리는 그저 유전자를 나르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낮은 자존감과 행복감 안에서는 나의 생존이 우선이지 나의 불행을 이어받을 자녀를 낳기 위해 고통을 감내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아무리 선교를 강조해도 선교하지 않을까요? 선교를 강조하며 억지로 고통을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행복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이 행복을 느끼게 하려고 시키지 않아도 선교할 것입니다. 더 많이 낳게 하려면 그 낳는 사람이 태어난 자녀가 자신처럼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확신을 자신이 느끼고 있어야 합니다.
성모님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영혼 기뻐 뛰놉니다.”라고 노래하셨습니다. 이것이 당신 고통을 감내할 충분한 자존감이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모님을 닮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적어도 그 행복감 안에서 더 많은 자녀가 그 행복에 참여하도록 자신들도 자녀를 낳는 고통을 감내할 힘을 가져야 당연할 것입니다. 내가 너무 받아 행복해서 이 행복을 전하지 않으면 부끄러워 아기를 낳고 선교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에서 계속해서 1등을 차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뉴스에도 자주 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의 노래를 한번 들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우리나라 가수가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련된 복장과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통해 분명히 좋은 노래라는 것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듣는 데 그렇게 편하지 않았습니다. 제 감성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는 요즘 노래보다는 7~80년대의 노래가 더 좋습니다. 귀도 편해지고, 마음도 편해집니다.
학창 시절에 ‘가요 톱 10’이라는 프로를 보며 상위권의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해서 듣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분명히 순위의 인기 가요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순위보다는 마음이 편해지는 노래에 더 관심이 갑니다.
이제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은 순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남과 다른 그 무엇이 나를 이 세상에 살게끔 하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가운데 1등보다 다른 나만의 모습을 찾는 것이 더 필요했습니다.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하시는 성모님을 기념합니다. 사실 우리는 성모님의 아픔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성모님의 영광에만 그리고 성모님의 행복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당신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아픔을 이겨내지 않고서는 영광의 자리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 성모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1등의 자리가 아니라 꼴찌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모두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했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성모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면서 십자가에서 제자들을 성모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면서,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 지금의 어려운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순위를 쫓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을 철저하게 따랐던 성모님의 삶을 기억하면서 살 때 진짜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이다.
- 데이비드 소로
제대로 봐야 합니다.
갑곶성지에 성체 조배실이 있습니다. 성체 조배실 한가운데에는 십자가가 있는데, 맨 뒤에 서서 이 십자가를 보고는 “여기 십자가는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등을 돌려 나가십니다. 앞에 가서 자세히 보려고 하지 않고 말이지요.
이 십자가를 만드신 작가는 자그마치 8개월 동안 작업을 하셨습니다. 특히 이 십자가에는 많은 성물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성물은 본당에서 버려진 폐성물입니다. 이 폐성물을 하나하나 깨끗이 닦아서 정성껏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폐성물 십자가, 부활하신 십자가로 불립니다.
뒤에서 보면 정신이 없지만, 이 의미를 듣고 앞에서 보면 감동을 하십니다. 그리고 사진도 열심히 찍습니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은 제대로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제대로 본다면 하느님의 손길을 얼마나 많이 발견할 수 있을까요? 대단한 것 투성의 세상임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살짝 보고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더 보고, 한 번 더 생각할 때 하느님도 보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
어머니의 삶속에 가득 담겨있는 고통이다. 삶이 있기에 고통이 있다.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맑고 아픈 십자가이다. 어머니의 고통은 기도가 되고 생활이 된다. 십자가의 무게와 사랑의 무게는 언제나 같다.
어머니의 사랑은 유통기한이 없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으로 복음을 읽는다. 복음의 어머니가 되시어 복음을 길러내신다. 사랑이 복음이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고통으로 알게되는 참된 사랑이다.
사랑이 삶을 바꾸어 놓는다. 많은 말보다 "어머니!" 라는 한 말씀이 더 강렬히 우리에게 꽂히는 것은 그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어머니가 행복한 어머니가 되신다.
사랑과 고통은 하나이다. 사랑하기에 고통도 열매가 된다. 여인이 십자가로 어머니가 되신다. 사랑으로 가장 좋으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년 9월 18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09.18 |
---|---|
21년 9월 17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09.17 |
21년 9월 16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09.16 |
21년 9월 14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09.14 |
21년 9월 13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09.13 |
21년 9월 12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09.12 |
21년 9월 11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09.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