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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
21년 9월 17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복음을 전하러 다니실 때,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수산나 등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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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티모 6장 2ㄹ-12절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의로움을 추구하십시오.
사랑하는 그대여,
2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3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4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5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 갑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6
물론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7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9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10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11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 대신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12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화답송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뒤쫓는 자들이 악행으로 나를 에워쌀 때, 그 불행한 날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그들은 자기 재산만 믿고, 재물이 많다고 자랑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어찌 구원하랴? 하느님께 제 몸값을 치를 수도 없거늘. 그 영혼의 값 너무 비싸, 언제나 모자란다, 그가 영원히 살기에는, 구렁을 아니 보기에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누군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부러워하지 마라.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네가 잘한다고 사람들이 칭찬한다.” 사는 동안 스스로에게 말할지라도, 조상들이 모인 데로 내려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복음
루카 8장 1-3절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이끄시어 저희가 제 생각대로 살지 않고 그 은총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17일 (금)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17일 (금)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17일 (금)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하느님께 정확히 초점을 맞추고 묵묵히 봉사하기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헌신적으로 도움을 준 여인들이 나옵니다.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다른 많은 여자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도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도 복음 선포에 도움을 준 여인들이 사도행전과 바오로 서간에 자주 등장합니다. 리디아(사도 16,14), 프리스킬라(사도 18,2), 에우오디아와 신티케(필리 4,2), 클로에(1코린 1,11), 포이베(로마 16,1) 등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 시대에도 복음 선포에 자신의 삶을 바친 여인들이 많습니다. 목숨을 바쳐 순교한 이도 있고, 숨어 살면서 고귀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여성 회장으로 알려진 강완숙 골룸바는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와 피난처로 제공하고, 주문모 신부와 교우들에게 음식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여인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탈렌트를 사용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때로는 실망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목적을 잊어버린 채 무조건 열심히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정확히 초점을 맞추고 묵묵히 봉사한다면, 우리의 삶은 실망을 넘어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여인들처럼, 또 한국 천주교회의 초창기 교우들처럼 우리의 봉사에 대한 하느님의 영원한 갚음을 기억하며, 기쁨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상처가 은총이 되게
오늘은 프란치스코가 오상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프란치스코의 모든 사건 중에서 오상 받은 것만 따로 떼어 기념하는 겁니다.
이참에 저는 상처받음에 대해서 성찰하고자 합니다. 얼마 전부터 상처받았다는 얘기가 너무 흔하고, 까딱하면 힐링, 힐링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저를 보고 여러분은 즉시 상처와 힐링을 얘기하는 요즘 행태에 대한 거부감이 제게 있는 것 아니냐 생각하실 분도 있으실 텐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 너무 쉽게 상처를 받기 때문이고,
- 제 상처를 제가 키우기 때문이며,
- 상처를 키우는 것이 공포증 때문이고,
- 상처와 치유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트라우마라고 하고
힐링이라는 표현이 다분히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상처와 치유를 영성이 아닌 심리학적으로 대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힐링 남용에 대한 저의 비판의 근거는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프란치스코에게 있습니다.
-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상처를 당하게 해달라고 했고,
- 상처를 하느님에게서 받았지 인간에게서 받지 않았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수난에 대한 공경심 때문에 매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면 라베르나에 가 축일을 지냈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1224년 축일에 그는 두 가지 소원을 주님께 아뢰는데 그것이 하나는 죽기 전에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고 다른 하나는 얼마나 사랑이 크시기에 우리를 위해 그 큰 고통을 감수하시고 감당하셨는지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게 해달라는 거였지요.
그러므로 상처 치유의 해법도 프란치스코에게 있습니다.
-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과
- 상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승화시키는 겁니다.
상처를 좋아하거나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상처를 사랑하면 그것은 더 이상 상처가 되지 못할 터인데 그런데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쉽지 않지만 프란치스코처럼 상처를 사랑하면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고 은총이 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을 우리가 지내는 것이 바로 상처가 은총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받으면 은총이고 사람한테서 받으면 상처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이고 더 나아가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사람에게서 상처받지 말고 하느님에게서 받을 것이고, 사람이 준 상처라도 하느님이 주신 은총으로 치환하거나 승화해야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이렇게 살기로 다짐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여성 봉사자는 사제의 오른팔인가, 그리스도의 왼팔인가?
오늘 복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신다.
2.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3. 여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이런 구조로 볼 때 예수님의 협조자는 제자들이고, 제자들의 협조자는 여성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차별을 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 여성들은 사제가 될 수 없고 수녀님으로서 사제의 협조자 역할만 해야 할까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잘못일까요?
그래서 일각에서는 여성 사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안타깝지만 이미 물 건너간 이야기입니다. 사제가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기에 여성이 사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시대적 상황이 그래서 당시는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처럼 여성도 당당히 제자들과 함께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협조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공회는 여성 사제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성체를 나누어 줄 때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대리해야 하는 사람이 여성일 때는 신자로서는 아무래도 헛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의 협조자들인 여성도 여성이기에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남성과 같은 영광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교회에서는 수녀님들이 사제들처럼 영광을 받을까요? 아무래도 사제들이 영명축일 같은 행사는 더 크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제들은 어쩌면 신자들이 주는 영광을 피상적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더 가까워 자녀들의 감사를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직접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수녀님의 묵상글입니다. 함께 나눕니다.
“그 전 본당에서 작년 겨울 소임 이동을 준비하고 떠나기 직전에 좀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평소에 열심히 기도하시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초에 대한 집착이 있으셔서 지난해에도 다 쓴 제대초를 대부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제대회에 봉헌금을 내고 짧아진 제대 초들을 택시를 동원하여 받아가십니다.
그런데 잘은 모르겠는데 신자분들이 이 할머니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열심히 기도하시고 초에 대해 그렇게 오래전부터 집요한 애착을 두고 있어선지 그분들 사이에서는 약간 무시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도 저는 할머니의 그런 모습과 주위 분들의 그런 태도에 별 신경 안 쓰고 그냥 편하게 지냈어요.
그런데 제가 소임 떠난다고 하니까 할머니가 저를 조용한 곳으로 잠깐 가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갔는데 저보고 의자에 앉으라고 하셔서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 같아 같이 의자에 앉으시자고 하니까 굳이 일단 의자에 앉아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의자에 앉으니까 할머니가 갑자기 맨바닥에서 저에게 절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너무 놀라 당황했는데 절을 하시면서 저에게 ‘수녀님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는 할머니의 절을 받고 제가 갑자기 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체험했어요. 그러면서 할머니가 저를 꼭 껴안으시면서 죽을 때까지 저를 못 잊을 거라고 하셨어요. 할머니는 자식들 데리고 제가 떠나는 부임지로 꼭 한번 찾아가겠다고 하시면서 손을 못 놓으셨어요.
저는 그날 밤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큰 표징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할머니가 마치 하느님과 같이 느껴지면서 그 할머니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저에게 2년 동안의 이 본당에서 그래도 헛되이 살지 않았고 하느님이 위로와 사랑을 주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런 체험이 또한 그저 평범하고 약한 이들 안에도 역시 숨어 계신 하느님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소중한 신앙 체험으로 제 마음에 간직되고 있습니다.”
여성이 가진 어머니의 모성과 사랑을 남성은 쫓을 수 없습니다. 여성들은 성당에서 이런 역할을 합니다. 사제들이 하지 못하는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여성이 사제가 되려는 것이 여성의 권위를 향상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여성의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교회에서 점점 여성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수녀님이 줄어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성모회도 사라지는 곳이 많고 자모회도 예전만큼 힘이 있는 단체가 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성당에 갔을 때 수녀님이 안 계신 성당은 왠지 좀 삭막한 것 같다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오늘 복음의 여성들과 비견할 복자품에 오른 분이 계시는데 ‘강완숙 골룸바’입니다. 이 분은 ‘한국 천주교 초대 여성회장’이셨습니다. 이분의 역할은 그분이 숨겨주셨던 주문모 신부님 못지않습니다.
강완숙 골룸바는 서첩의 자녀로 태어나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오라버니들의 어깨너머로 글공부를 하였으나, 오라버니들보다 더 뛰어난 학식으로 영특한 여성이었습니다. 순천에서 아내와 자녀가 있었던 사람과 혼인하여 시모와 전처 자녀를 성실히 키웠습니다.
처음에는 불교에 입문하여 열심히 불경을 공부했으나 그에 충족하지 못하고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서학을 알게 되어 심취하게 됩니다. 남편은 박해가 심해지자 자신의 아내가 천주교를 가까이함을 알고 배교하기를 바랐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니 집에서 내쫓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강완숙 골롬바는 시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한양으로 이사합니다. 얼마나 어르신을 잘 모셨으면 시모와 전처소생인 아들까지 같이 한양으로 상경했을까요?
이때 중국에서 선교사로 오신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주 신부를 찾고 있을 때라 시모께서 아실까 봐 광에 모시고 대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지내다 골룸바는 단식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일을 굶으니 시모님께 왜 식음을 전폐했는지를 물으시고 마음의 병으로 그렇다고 하니, 시모가 여러 사정을 물으며 당신도 같이 식음을 전폐하고 2일이 흘렀다고 합니다. 총 5일을 금식하신 복녀는 그제야 자신의 사정을 시모님께 아뢰었었고 시모님께서 그러한 마음의 병은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주문모 신부님을 댁으로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렇게 주문모 신부는 골룸바 집에서 6년간 사목합니다. 주 신부 입국 당시 겨우 4,000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는 5년 만에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골룸바의 활약으로 여신도의 수가 절대다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총회장으로서 주위 아낙네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부는 주 신부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고 골룸바는 주 신부를 피신시켜 체포를 면하게 하였습니다. 주 신부 체포에 혈안이 된 포도청에서는 갖은 고문으로 강완숙에게 주 신부의 행방을 다그쳤으나, 함구하여 밝히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로 인해서 수많은 신자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음을 가슴 아파한 주 신부가 자수하여 처형당하자, 이를 옥중에서 전해 들은 강완숙은 자기 옷을 찢어서 그동안 주신부가 조선에서 활동한 경과를 적어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전해 받은 어느 여 교우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그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모진 형벌인 주뢰(周牢)를 여섯 번이나 받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으므로 형리들도,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이렇듯 옥중에서 갖은 고난을 겪은 지 만 3개월만인 그해 7월 2일,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나가는 길에서도 강완숙은 다른 4명의 여 교우들을 격려하고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였습니다. 즐거운 빛으로 제일 먼저 목숨을 바치니, 그때 나이 41세였습니다.
이렇듯 누가 강완숙 골룸바 복자가 주 신부보다 뒤처지는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 신부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고 강완숙 골룸바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습니다. 골룸바가 없었다면 주 신부는 머물 곳이 없고 사목할 곳도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성별의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다만 성별에 따른 역할만 다들뿐입니다. 주문모 신부도 자신을 고문하는 이들에게 ‘신’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모세도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때 자신 대신 말해줄 사람이 없다면 들어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론을 붙여주셨습니다. 이 아론의 역할이 여성의 역할입니다. 남자가 여자가 아니면 자녀를 낳을 수 없고, 예수님은 교회가 아니면 복음을 전할 수 없듯, 사제들도 여성의 도움이 없다면 어쩌면 무용지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오른팔이 사도들이었다면 왼팔은 여성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의 오른손이 그리스도요, 왼손이 성령이셨던 것과 같습니다. 여성들이 사제의 오른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자 제자들과 여성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오른팔과 왼팔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줄어든다는 말은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줄어든다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나라에서 강의를 제일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강의를 제일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이곳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어디에 계시기에 그럴까요?
정답은 유튜브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 유튜브 안에는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강의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도 어떤 자료를 찾다가 어떤 분의 강의를 보게 되었는데 너무나 훌륭한 강의였습니다. 이 훌륭한 강의를 그것도 공짜로 봐도 되나 싶더군요.
작년부터 계속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대면이 강조되는 시기에 유튜브를 활용해 강의하는 것은 접근성도 좋고 비용도 무료라는 점에서 소비자에게는 큰 이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유튜브의 지식은 잘 전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식을 요리해서 숟가락으로 떠서 먹여주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를 보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건너뛰기를 하면서 제대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는 것도 본인의 노력이 있을 때 그 가치는 더해집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자신의 노력 없이 많은 것을 얻기만 바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를 해주시는 주님만을 원하지, 나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나의 노력이 없으면, 주님의 사랑과 은총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곁에 누가 있었는지를 오늘 복음은 전해줍니다. 열두 제자 외에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많은 여성이 예수님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성차별이 대단했습니다. 여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명한 스승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남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많은 여성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차별하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신의 열두 제자를 부를 때처럼 여성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께 의지하려 하였고, 예수님과 함께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제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제외하고 그냥 주님으로부터 받기만 하려는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렵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감히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 루키우스 세네카
결혼
결혼 생활에 대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20대에는 서로 좋아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 실망하며 살고, 40대에는 서로 체념하며 살고, 50대에는 서로 불쌍하고 가여워서 살고, 60대에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되어서 살고, 70대에는 서로 고마워서 산다.”
결혼과 함께 서로 고마워서 살아야 할 것 같은데, 7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다고 이 글을 말합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계속해서 실망하고 체념하고 불쌍하고 가엽고의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결혼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너무 많이 들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함께’의 가장 제일 원칙 ‘사랑’이 없다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시중드는 삶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 3)
상생과 협력으로 이가을은 열매를 맺는다. 주님께서 주신 열매의 시간이다. 마음을 바꾸는 은총의 계절이다. 물질은 나눌수록 더더욱 풍요롭다. 행복과 기쁨은 주님께 있다. 우리자신이 행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오래갈 수 없다.
시중드는 삶이란 자아를 벗어나 주님 안에서 성장하는 열매의 삶이다. 나눔은 열매가 되고 봉사는 기도가 된다. 값지고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배우게된다. 함께하는 삶이 나눔의 삶이며 봉사의 삶이다.
삶의 보람은 주님의 일에 협력하는 우리들 봉사에 있다. 나눔과 보람은 봉사의 은총이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랑의 가치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일을 함께하는 실천이다. 또한 사랑은 하느님의 준엄하신 명령이다.
사랑은 시중드는 정성으로 주님께 내어드리는 우리들 마음이다. 마음을 만나고 이마음을 하느님께 올려놓는 마음의 만남이다. 마음의 열매를 맺어야 할 신앙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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