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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9월 19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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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5주일 -

 

 

21년 9월 19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은 연중 제25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지만, 정작 제자들은 누가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지혜를 주시어, 성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섬기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는 가장 큰 사람임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저자는, 악인들은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인지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고 말한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야고보 사도는, 위에서 오는 지혜는 순수하고,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9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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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지혜 2장 12절, 17-20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악인들이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이방인들이 제게 맞서 일어나고, 포악한 자들이 제 목숨을 노리나이다. 그들은 하느님이 안중에도 없나이다.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야고 3장 16-18절, 4장 1-3절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6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4,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9장 30-37절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야고보 사도가 지적한 대로 우리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지 맙시다. 큰 사람이나 첫째가 되려고 싸우거나 다투지 말고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주님의 성체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니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삶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19일 (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미사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19일 (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19일 (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미사 - 경축 이동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에 대한 성찰.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의 체험과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마태 16,24 참조)에 대한 성찰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정체성대로 살고 있는지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 끝없이 계속되는 듯한 십자가 체험은 우리를 한숨짓게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러한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우리는 인내로 이 시간을 잘 견뎌 내야 합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 인내의 열매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알려 줍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십자가의 체험’에 대하여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 뒤 사흘 만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현세적 명예가 중요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며 서로 논쟁을 벌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하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말씀 안에서, 성체 안에서, 그리고 어린이와 같은 약한 이들 안에서 당신을 발견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세상 것만을 추구하지 말고,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인내하여 구원의 길로 들어선다면, 하느님 나라를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려울 때 나의 기도

 

지난주에 이어 연중 25주일도 그리스도의 운명에 대해 얘기합니다. 복음은 오늘 첫 번째 독서 지혜서의 의인처럼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것임을 얘기하는데 지혜서에서 의인은 악인들에게 성가시게 하는 자요 죄지었다고 나무라기만 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악인들은 덫을 놓아 죽이자고 하며 최후가 어찌 될지 보자고도 하고,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이렇게 시험을 해보면 의인이 진짜 하느님의 아들인지, 온유와 인내력은 어느 정도인지 드러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 생각에 최후에 대한 예측 외에 다른 것은 악인들의 말이 다 맞습니다. 우선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시험은 모욕과 고통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는 그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잘 드러나지 않고, 특히 얼마나 약한지 또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없지요. 좋을 때는 온유의 한계와 인내력의 한계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유와 인내력이 어느 정도인지 드러나도록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보자는 그들의 말은 맞습니다. 

프란치스코도 권고 13번에서 비슷한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자기가 만족스러워할 때에는 자기에게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이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만족스럽게 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 때에 지니고 있는 만큼의 인내와 겸손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그 이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의인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라는 말도 맞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이 돕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실 리 없고, 그러므로 적대자의 손에서 죽는다면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적대자의 손에서 구해 주심이 뭐냐가 다릅니다. 지난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정체는 베드로가 맞게 알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가 수난받으시고 권력자들의 손에 돌아가서야 한다는 것은 모르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다가 사탄의 말을 들은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하느님의 도우심은 모욕과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시거나 적대자들의 손에 죽지 않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과 모욕을 당하되 끝까지 잘 견뎌내게 하시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적대자들의 손에서 최후를 맞게 하시는 겁니다. 

이는 박해시대에 하느님이 순교자를 돕는 것은 온갖 형벌과 회유에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도록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주시는 것과 같지요. 

최민순 신부님의 "기도"라는 시가 여기에 딱 맞습니다. 

"주여, 오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서 부딪치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넓은 길 편편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더욱 깊은 믿음을 주소서." 

그러니 의인과 악인이 다른 것은 최후에 대한 생각입니다. 의인들의 최후는 하느님께 가는 것인데 악인들의 최후는 이 세상 끝날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민순 신부님의 기도처럼 하느님께 갈 때까지 어떤 십자가의 길이 우리 앞에 있을지라도 그 길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갈 힘 주십사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모가 자녀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유일한 인생의 방향 : 십자가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제자들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당신 수난과 부활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따라야 할 구원의 표지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습관상 하늘을 보기보다는 땅을 보며 걷습니다. 

하늘엔 죽어야 산다는 표지판이 있고, 땅엔 그저 이전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이 있습니다. 표지판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인생의 길에 방향이 분명 있음을 믿는 사람이고, 땅을 보는 사람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길을 만든 사람이라면 표지판을 공중에 달아놓는 법입니다.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길을 만들지 않아 방향을 모릅니다. 그래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는 그 끝이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표지판보다는 이전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을 따르려 합니다. 바닥만 보는 사람은 당장 넘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지금의 생존을 위해 소유하고 강해지는 것만을 원합니다. 그러며 서로 누가 더 높은지를 두고 다툽니다. 그러다보니 그 생존경쟁 안에서 이웃에 대한 포용력과 이해력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어린이는 나의 생존에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신경만 쓰입니다. 당시 어린이는 과부처럼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 어린이 때문에 나를 희생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십자가로 자기를 죽이는 삶이 아니면 그런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받아들여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희생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사람이기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발걸음을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그런데 걸을 때 땅을 보도록 가르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하늘을 보고 걸으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있습니다. 

‘히틀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렇다면 히틀러의 아버지는 히틀러에게 어디를 보며 걸으라고 알려주었을까요? 땅일까요, 하늘일까요?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을 좋아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며, 난폭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출세 지향적 성향’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13살 때부터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생존만을 위해 산 사람이고 그것을 자녀들에게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도 자신처럼 실제적이고 분별 있고 현실적이며 비종교적이고 비정치적이며 안정적이고 근면한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서 마찰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아버지에게 심한 폭력을 당하며 컸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사망하자 미술의 꿈을 꿉니다. 그러나 미술에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결국엔 아버지의 발걸음을 쫓아갑니다. 

아버지의 소원대로 군인이 되어 고위 공무원 자리에 오르고 결국 독일 총통이 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그렇게라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까요? 히틀러가 군대에서 마치 아버지처럼 인정받기 전까지는 무엇을 해도 사람들과의 충돌 때문에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총통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큰일을 벌이게 됩니다. 

방향이 없는 길은 없습니다. 인생도 동물처럼 그저 생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어진 길이 있다고 믿는다면 하늘을 보게 해야 합니다. 하늘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달려있습니다. 죽어야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생존만을 위한 삶은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길을 만든 사람이 표지판도 만듭니다. 그리고 표지판은 항상 공중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방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달에도 있고 별에도 있고 표지판도 그렇고 등대도 그렇습니다. 생존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는 부모는 자녀에게 삶의 표지판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사람입니다. 

히틀러와는 반대로 이 시대에 가장 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마더 데레사’의 부모님은 어땠을까요? 마더 데레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지역 유지였고 교회에 많은 후원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10살 때쯤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는 어머니에게 키워졌는데 그 어머니는 십자가를 지워주는 분이셨겠습니까, 아니면 치워주는 분이셨겠습니까? 대답은 정해져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이렇습니다. 

“어머니를 떠오를 때마다 ‘거룩’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말씀과 행위가 거룩했기 때문이지요.”

어머니는 힘든 생활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을 곤경에 처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때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고, 말이 아니라 실제로 알코올 중독 여성, 버림받은 노파를 돌봐줌으로써 행동으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가난한 사람들이 문가에서 음식을 청할 때 자신도 먹을 것이 모자라도 반을 떼서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애들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때는 말 없이 하여라. 바닷물 속에 돌을 던지듯 말이다.”

선행하고 알리지 말라는 말은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18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께 하느님께 온전히 속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하루 동안 홀로 기도한 후에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얘야, 예수님의 손을 꼭 잡아라. 죽을 때까지 그분과 함께해라.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려무나. 성모님은 네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거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표지판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부모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믿고 그분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인간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합니까? 길을 만든 사람은 길 위가 아니라 하늘에 방향을 표시합니다. 

인도의 ‘디팩 쵸프라’는 아들 둘에게 어렸을 때부터, “너희는 어떻게 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지만을 생각해라. 나머지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게.”라고 가르쳤습니다. 
큰아들은 학교도 안 가고 마을 어른들을 도와주다가 큰 사업가가 되었고, 둘째는 학교에서 꼴찌들에게 공부 가르쳐 주다가 하버드 교수가 되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창조의 법칙을 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창조자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창조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디팩 쵸프라는 자녀들에게 바로 그것을 바라보도록 교육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무엇을 바라보도록 교육합니까? 이웃의 행복입니까, 당장 나의 행복입니까? 많은 자녀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법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땅만 보고 교육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를 지게 할 수 있을 때 정말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이웃과도 행복하게 지내며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자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없게 되면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만든 부모 자신의 책임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군대 있을 때 상관이 두릅이 많다고 따러 들어가자고 해서 쫓아 들어갔다가 지뢰를 밟아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지뢰밭이라는 표지판을 못 보고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면 눈을 들어 표지판을 보지 못하는 눈먼 자녀로 만듭니다. 땅은 생존을 위한 집착의 상징입니다. 하늘은 십자가와 부활의 상징입니다. 죽어야만 살 수 있다는 유일한 진리와 생명의 길을 알려주는 부모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진짜로 운 좋은 사람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으로 뽑힌 인물이 있습니다. 1929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프란 세락’이라는 인물인데, 그의 좋은 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열차가 탈선해서 한겨울 차가운 강에 빠져서 17명이 사망했지만, 그는 팔이 부러지는 상처만 입었습니다. 
 
2) 처음 타 본 비행기가 추락해서 19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건초더미 위에 떨어져 목숨을 구했습니다. 
 
3) 그 후에도 버스가 강에서 떨어지거나, 운전하던 승용차가 폭발하는 등 다섯 번의 사고가 있었어도 매번 죽음에서 벗어났습니다. 
 
4) 자신의 다섯 번째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복권을 샀는데 1등에 당첨되었습니다. 
 
진짜로 운 좋은 사람일까요? 교통사고를 아예 당하지 않는 것이 더 운 좋은 것이 아닐까요? 또 다섯 번의 결혼을 했다는 것은 네 번의 이별을 했다는 것인데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거액 복권 당첨자의 불행이 자주 소개되는 것을 보면, 복권 당첨도 행복하다고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무 일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가장 운 좋은 사람이 아닐까요? 왜 특별한 행복을 찾을까요? 
 
세상의 관점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은 세상의 관점과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평범함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관점을 뒤집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직접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외 아드님인데도 불구하고 그 고통스러운 수난을 당하시고, 또 발가벗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매를 맞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는 권력자가 어디 있습니까? 
 
사랑이 담긴 주님의 관점을 따를 때, 하늘나라에서 첫째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선택이 남았습니다. 세상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늘나라에서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 
 
세상의 첫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각종 조건이 많습니다. 능력도 좋고, 돈도 많고, 또 운을 비롯한 그 밖의 많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세상의 첫째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의 첫째 자리는 딱 하나,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기도란 내가 하느님께 바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순간이기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지 묻는 순간이다.

- 성녀 마더 데레사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지 마세요.

 

올해는 아직 못하고 있지만, 매년 국내외 성지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이 순례 중에서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성지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성지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맞은 편에 순례객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지 문이 자물쇠로 닫혀 있어요.” 
 
몇 차례 방문했었던 곳인데, 이곳을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늘 문이 열려 있었던 곳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런데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순례객들과 함께 내려갈까 했는데, 그래도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문 앞까지라도 가야겠다 싶어서 혼자 올라갔습니다. 
 
정보를 알려 준 순례객의 말처럼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는 생각으로 자세히 보니, 자물쇠가 걸려는 있지만 문이 움직이지 못하게만 했을 뿐 열려 있는 것입니다. 앞선 순례객은 문에 자물쇠가 끼워져 있는 것만 보고서 그냥 포기했었던 것이지요. 
 
시도도 하지 않고 ‘안 돼’라는 생각으로 포기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낮아져야 충만하다.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 

작은 들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짜가 되는 첫째보다는 꼴찌가 되는 진짜가 더 아름답다. 복음의 기본은 언제나 진실함과 겸손에 있다. 낮아지는 섬김과 우리자신을 제대로 아는 겸손이 예수님을 만나는 참된 기쁨이다. 

삶이란 우리자신을 알아가는 겸손의 여정이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왼편과 오른편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이 자리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 더 중요하다. 건강한 믿음은 낮아지는 겸손에 있다. 

낮아질수록 깊어지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낮아지면 모든 것은 은총이다. 십자가의 겸손이다. 낮아질수록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다. 하느님을 가리는 장본인이 우리자신임을 알게된다. 

낮아지신 예수님의 삶에서 참된 사랑이 겸손임을 다시 만난다. 실패와 아픔을 통해 다시 일어나는 꼴찌들과 함께 꼴찌가 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낮아지는 기쁨에 있다.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다시금 깨닫는 은총가득한 가을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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