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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21년 9월 16일 (목)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Memorial of Saints Cornelius, Pope, and Saint Cyprian, Bishop, Martyrs)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르넬리오 교황은 251년에 교황으로 뽑혀, 로마 박해 시대에 2년 동안 짧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배교를 선언하였던 신자들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단에 맞서 교회를 지키다가 유배되어 253년에 순교했습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고르넬리오 교황과 같은 시대의 목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그는 늦은 나이에 개종하여 사제품을 받고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박해 속에서도 고르넬리오 교황을 도와 교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258년에 순교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행실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라고 당부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드러낸다며, 당신의 발을 닦아 준 죄인인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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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티모 4장 12-16절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12
아무도 그대를 젊다고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니 말에서나 행실에서나 사랑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나,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십시오.
13
내가 갈 때까지 성경 봉독과 권고와 가르침에 열중하십시오.
14
그대가 지닌 은사, 곧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15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 일에 전념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더욱 나아지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도록 하십시오.
16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 일을 지속해 나아가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화답송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손이 하신 일들 진실하고 공정하네. 그 계명들은 모두 참되고, 진실하고 바르게 이루어져, 영원무궁토록 견고하네.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보내시고, 당신 계약을 영원히 세우셨네. 그 이름 거룩하고 경외로우시다.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주님을 경외함은 지혜의 근원이니, 그렇게 사는 이는 모두 슬기를 얻으리라. 주님 찬양 영원히 이어지네.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복음
루카 7장 36-50절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에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천상 양식을 받아 모시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복된 순교자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를 본받아 성령의 힘으로 굳세어져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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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9월 16일 (목)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오늘 복음에서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와 참회하며, 눈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청합니다. 이 여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잃어버린 평화와 자유를 되찾아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가 예수님께 다가와 향유가 든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는 동안 바리사이는 매우 불편해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여인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자 바리사이와 식탁에 초대된 사람들의 불평이 터집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용서’입니다. 물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지만,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그들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제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우리는 ‘고통의 무게는 모두 다르지만, 모든 고통을 피하지 말고 마주하여,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은총을 찾고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노력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죄 많은 여인은 주님의 용서를 통하여 평화와 자유를 얻지만, 바리사이와 초대된 사람들은 평화와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나의 이기심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 자유로워지고 평화를 되찾으며 크든 작든 우리의 죄도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단죄받으러 사람에게 가지 말고 용서받으러 주님께 가자!
오늘 복음에서 죄녀는 어찌하여 바리사이의 집에 쳐들어왔을까? 마을의 공공연한 죄녀가 죄녀를 끔찍이 싫어하는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지 않았고 그래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어찌왔을까?
바리사이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대단한 침입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그 집에 안 계셨으면 그런 대담한 짓은 여인이 할 수 없는 거였고 그래서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는 바리사이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러 온 것이지요. 죄인을 심판하겠다는 바리사이를 죄인이 찾아 갈 이유는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용서해 줄 분을 찾아간 겁니다.
이것을 보면 단죄가 죄를 바꾸지 못하고 용서가 죄를 바꿉니다. 바람과 해가 사람의 옷을 벗기기 시합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옷을 벗기려고 강하게 불면 불수록 옷이 벗기지 않으려고 사람은 옷을 더 여몄고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해가 나서서 사람을 따듯하게 하니 사람은 스스로 옷을 하나하나 벗어젖혔습니다. 단죄가 아니라 용서가 죄를 바꾸는 것도 이런 이치입니다.
그런데 여인이 한 행위는 용서를 청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저 주님 앞에 나타나,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주님 뒤쪽 발치에서 하염없이 눈물로 주님의 발을 닦고 머리로 말린 다음 향유를 발라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용서를 청하는 행위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는 용서를 미리 받았습니다. 아니, 용서받을 것을 미리 알고 감사와 사랑을 드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 미리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빵을 나눠준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 여인의 감사와 사랑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여인이 구원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저 용서해 주시기만을 바랐을 테지만, 그러나 용서란 말은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고 다만 모두 자기를 단죄해도 주님만은 자기를 받아들여주길 바랐을 겁니다.
아무튼, 여인은 죄를 많이 용서받았고 큰 사랑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런데 적게 용서받는 사람은 주님께서 적게 용서하시기 때문입니까? 용서도 됫박만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의 됫박이 사랑의 됫박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무슨 얘기입니까?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자기 죄가 크지도 않고 많지도 않다고 생각하여 그 용서의 됫박을 작게 마련한 것이고, 아예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는 용서받을 됫박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그 됫박으로 사랑을 드리는데 자연 드릴 사랑이 적거나 없습니다.
우리도 단죄받으러 사람들 앞에 가지 말고 용서받으러 주님께 가는 나, 가되 용서와 사랑의 됫박을 크게 마련하여 가는 내가 되도록 하십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용서받았다는 믿음이 ‘봉헌’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실상은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습니다. 이때 죄인인 여인이 들어와서 예수님의 발을 눈물과 향유로 씻어드립니다. 이때 시몬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예수님은 시몬이 당신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입도 맞추지 않았지만, 그 여인은 모든 것을 내어놓았다고 하시며 그 여인의 믿음이 그 많은 죄를 용서받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바리사이 집에 들어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내려놓았음을 의미합니다.
왜 예수님은 ‘내어놓음’, 곧 ‘사랑’의 정도와 ‘죄의 용서’를 직결시키는 것일까요? 당신께 용서를 받은 사람도 봉헌을 적게 하면서도 용서받은 것을 증명할 수는 없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란 다 내어주심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는 심장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회개한 분입니다. 목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당연히 목사가 될 것으로 보였으나 박 목사는 다른 길을 갑니다. 어렸을 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와 목사인 자신의 아버지를 끌어내고 내어 쫓으려 하고 싸우는 모습들, 여자들이 계시를 받았다며 들어와 자기 어머니에게 음란마귀를 몰아내야 한다고 소리치는 모습들. 그리고 학교에서 자기 별명을 불렀다고 다리로 머리를 밟은 다음 “나는 쓰레기다.”라고 몇 번이고 복창하라고 한 선생님이 예배 때는 기도 인도자가 되어 대표로 기도하는 모습들. 이런 것들이 그를 하느님이 계심을 부정하게 만들고 혼자 힘으로 잘살아 보자는 결심을 하게 했습니다.
반에서 꼴찌를 하던 그는 하느님이 없음을 확신하고 분노에 가득 차 공부를 해서 의사가 되고 좋은 집안의 아내를 얻습니다. 그 덕분인지 30년 전에 30억의 재산을 가진 병원 원장이 되었고 그의 삶은 타락 그 자체였습니다. 덕분에 아내는 박 목사를 떠나고 박 목사는 1년 이내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심장병에 걸립니다. 심박수가 어떤 때는 50 이하로 떨어지고 또 갑자기 300 이상으로 오르는 지옥의 고통을 느끼게 만드는 병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더는 손을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작은아버지에게 인사하러 인천방주교회에 갔을 때 한 절뚝거리는 여자가 걸어 내려오며 자신을 안다고 웃었습니다. 자기가 8년 전에 계시를 받았는데 목사 아들의 회개를 위해 매일 기도하라는 것이었고 오늘 그가 나타날 것이라는 소리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매일 기도하기 위해 8년 동안 명절임에도 시댁에도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박 목사에게 오늘 자정에 주님께서 교회 안에서 만나주시겠다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박 목사는 어머니에게 찾아왔던 여인들을 생각하며 미친 사람이라 여기고 작은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잠을 청했는데 심장이 안 좋아 자신도 모르게 교회에 들어갔고 성탄 트리가 있었는데 그 앞에 앉았더니 심장이 제대로 뛰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자정이었고 박 목사는 “나는 너를 내 종으로 쓰겠다.”라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헛들었겠거니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심장이 안 좋아 그 성탄 트리 앞에 앉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습니다. 주님은 차 사고 날 상황에서 사고가 나지 않게 하시고 전화기를 들으면 이러저러한 내용을 들을 것이라고 하시고 그것도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박 목사는 그런 건 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고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심장이 뛰었다 안 뛰었다 하며 죽을 고통을 느껴 교회로 찾아가 트리 앞에 앉았습니다. 그날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황장애 증상이 와서 숨도 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 여인이 나타나 그의 가슴을 열고 수술을 해주는 것처럼 하더니 검은 옷을 입히고 십자가를 목에 걸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교회를 나와 산을 뛰어올랐습니다. 산꼭대기까지 뛰는데 숨은 찼지만, 심장은 멀쩡했습니다. 떼굴떼굴 구르면서도 너무 기분 좋은 상태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도중 마음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너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는데 넌 믿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네가 의사로서 믿는 것으로 너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네 심장을 고쳐주었다. 이젠 믿겠느냐?”
모든 것은 우연일 수 있어도 의사로서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믿게 된 그는 결국 하느님께 용서를 빌며 밤새 산에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내려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20만 원만 들고 바로 신학교에 등록하였습니다. 그때 나이가 39세였습니다.
왜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을까요? 그것이 있었다면 목사가 되어서 바로 교회를 짓고 개척교회 목사로서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받으면 내어놓고 싶은 것이 인간 양심입니다. 따라서 용서받았다는 표징은 내어놓는 것으로밖에 증명될 수 없습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다 내어주심이고 그 용서를 믿는 증거는 그 은혜 때문에 나온 나의 내어놓음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는 왜 시작되었을까요?
‘주님은 나에게 준 게 없어!’
이런 불만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도 봉헌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용서는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가죽옷은 당신 아들의 목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죄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대신 죽이셨습니다. 용서는 곧 내어줌인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다 받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저도 주님께 무언가 드린다고 생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가 다 주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성체를 주실 때마다 이미 저를 용서하고 계신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도 부족합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한다는 법칙이 우리 양심에 쓰여 있습니다. 용서는 받는 것이기에 용서받은 사람은 자동으로 내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소득의 10분의 1도 내어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받지 못해 불만인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닐까요?
용서받았다는 믿음이 봉헌으로 표현되지 못하면 아직 용서받지 못한 것입니다. 바리사이 시몬은 용서받은 것일까요? 당연히 모든 것을 용서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집에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용서받았다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들어오셨어도 아무것도 내어주지 못하여 결국 용서받지 못한 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용서받았다고 믿고 당연히 나의 것을 다 내어드릴 때 그때 비로소 용서받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받았으면 감사하게 나의 것도 내어드려야 하고 그 내어드림이 있을 때 용서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임으로 용서가 확정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와 함께 해줄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직도 내게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
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살아 있는 날까지
- 최성수 동행 노래 가사 中 -
고등학생 때 기타를 치며 많이 불렀던 가수 최성수의 ‘동행’이란 노래의 가사입니다. 이 노래 가사 중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라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누가 있을까요? 배우자, 가족, 친구…. 그런데 끝까지 어떤 상황이 있어도 나와 함께 해줄 사람은 누구일까요?
부모와 자식 간에 등지며 사는 모습도 많이 보고, 형제간에도 소송으로 서로 적대시하는 모습도 봅니다. 친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진정한 동행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배신해도, 돌아오면 다시 받아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너무 힘들어 눈물 흘리고 있을 때, 침묵 속에서 함께 해주시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이런 주님임을 기억하면서 오늘 복음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빚을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호바’는 ‘빚과 죄’라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까닭에, ‘빚’ 이미지는 흔히 ‘죄’를 가리킵니다. 두 채무자의 비유에서 돈놀이꾼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이미지입니다.
돈놀이꾼에게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노동자의 500일분 품삯)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그들이 빚을 갚을 길이 없자 돈 놀이꾼은 이를 탕감해 줍니다.
빚을 적게 탕감받은 이는 부지런히 율법을 익히고 지켜서 의인으로 자처한 바리사이들이고, 빚을 많이 탕감받은 이는 율법을 잘 알지 못하고 지키지도 못한 직업상의 죄인들, 윤리상의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으로 세리, 간음녀였습니다.
여기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관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하느님은 가차 없이 쥐어짜는 수전노가 아닙니다. 큰 빚을 탕감해 주시는 인정 많은 채무자 같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의 서간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사랑으로 진정한 동행을 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어떻게 동행하고 있었을까요? 빚을 적게 탕감받았다고 그 사랑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나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나는 눈부시게 밝은 백열전구 같은 삶을 살고 싶다. 평생 밝게 빛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꺼지는 삶 말이다.
- 산제이 굽타
가훈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우리 집의 가훈’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집의 가훈은 이것이니 모두 이 가훈을 기억하며 살아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퇴근하신 아버지에게 가훈이 무엇이냐고 여쭤보았습니다. 잠깐 생각하시더니, ‘성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시시했고 뻔해 보였습니다.
다음날 우리 집 가훈을 발표하는데 다들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중 제일 많은 가훈이 ‘성실’이더군요. 저는 다르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튀어 보겠다고 등교하다가 본 옆 학교의 벽에 붙어 있던 교훈을 우리 집 가훈인 것처럼 발표했습니다. 그 교훈은 이것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내일의 보람을 찾자.”
가훈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르게 발표하고자 하는 마음에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성실’보다 훌륭한 가훈이 있을까 싶습니다. 특히 뛰어난 재능이나 능력이 없는 저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었습니다. 단, 실천해야 합니다.
어떤 가훈도 다 좋습니다. 그러나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용서는 용서로 다시 채워져야 한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루카 7,47)
진정한 사랑은 있다. 하느님의 용서와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 봉인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활짝 열린다. 용서는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의 나눔이다. 하느님께서 먼저 용서를 나누신다.
옥합을 깨뜨리듯 아픔 없는 사랑이란 없다. 옥합의 눈물이 회개의 향유이다. 회개는 실패가 아니다. 가장 고귀한 용서의 체험이다. 회개의 용서이며 용서의 회개이다.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없는 우리들이다.
용서의 방관자들인 우리가 용서를 만난다. 복음의 삶이란 옥합이 깨어져 용서를 만나는 용서의 삶이다. 옥합 안에는 향유가 있어야 하듯 우리들 삶에는 용서가 있어야 한다. 하느님 없는 용서란 없다.
용서 자체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자녀들의 용서이다. 하느님의 옥합에 다시 채워지는 용서이다. 용서는 용서로 다시 채워져야 한다. 하느님을 다시 뜨겁게 만나는 용서의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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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9월 13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09.13 |
21년 9월 12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0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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