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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9월 24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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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

 

 

21년 9월 24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하까이 예언자는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에게, 하느님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9월 24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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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하까 1장 15ㄴ, 2장 1-9절

머지않아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15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이었다. 

2,1 
그해 일곱째 달 스무하룻날에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너는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와 나머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 가운데 이 집의 옛 영화를 본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느냐? 지금은 이 집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너희 눈에도 있으나마나 하지 않느냐? 


그러나 즈루빠벨아, 이제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야, 용기를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일을 하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 정녕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머지않아 나는 다시 하늘과 땅, 바다와 뭍을 뒤흔들리라. 


내가 모든 민족들을 뒤흔들리니 모든 민족들의 보화가 이리 들어오리라. 그리하여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은도 나의 것, 금도 나의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하느님께 바라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
나는 찬송하리라.

 

하느님,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불충한 백성에게 맞서, 제 소송을 이끌어 주소서. 거짓되고 불의한 자에게서, 저를 구해 주소서. 하느님께 바라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 나는 찬송하리라.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의 피신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제가 원수의 핍박 속에, 슬피 울며 걸어가야 하나이까? 하느님께 바라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 나는 찬송하리라.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 하느님께 바라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 나는 찬송하리라.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비파 타며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하느님께 바라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 나는 찬송하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9장 18-22절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성체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니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삶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24일 (금)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24일 (금)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24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지금도 존재하지만, 한동안 ‘가짜 뉴스’라는 용어가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짜 뉴스가 “독자를 기만하거나 조종할 의도로, 존재하지 않거나 왜곡된 자료에 근거하는 허황한 정보와 관련된다.”(제52차 홍보 주일 담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하는 목적을 위하여 끊임없이 확산되는 가짜 뉴스는 거짓을 위한 자유이며, 거짓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함으로써 다툼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고 하셨습니다. 가짜 뉴스는 우리를 자유롭게도 평화롭게도 하지 못합니다. 오직 진리만이 우리에게 참평화를 줍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가짜 뉴스가 매우 많았던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요한으로, 엘리야로, 옛 예언자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어떤 수고와 수난을 겪고 부활하실지 알려 주십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에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주님을 참되게 알고 깨우쳐 그분께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떻게 현실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올바로 실행에 옮길 때, 신앙인은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와 함께 자유롭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를 완벽하게 지배하시는 분

 

하느님의 존재 여부가 십대 때는 제게 너무 중요하였습니다. 모두들 공부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그때 제게는 공부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 여부가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이었지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저는 정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통뿐인 삶과 악이 판치는 세상을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존재를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찾았고 십여 년이 지나서 하느님의 현존 체험을 한 뒤에야 하느님 존재 여부에 저의 전부를 걸지 않게 되었으며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도 생기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느님이 존재자일 뿐 아니라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어야 하고 나에게 힘 주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전에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데 워낙 급급했기에 하느님이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이제는 존재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나와 함께 계시며 살아갈 힘을 주시는 분 그래서 어떻게 보면 더욱 절실한 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하까이서의 주님 말씀이 아주 마음에 와 닿습니다.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야, 용기를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일을 하여라." 

그런데 이것은 한 때 겁 없이 일을 저지르던 제가, 마치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만만하던 제가 이제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반증이며 하느님께서 옆에 계시며 계속 힘을 내라고 용기를 주시지 않으면 용기를 낼 수도 없게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러니까 인간적으로만 보면 슬픈 일인데 그런데 요즘 저는 이것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제가 하느님께 안착하였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용기를 내어 일을 하라고 하시지만 이제 많은 일과 큰 일을 하려고 할 필요는 없고, 주님께서 맡기시는 만큼 그리고 힘 주시는 만큼만 하면 되고, 그러다가 이 주님께서 이제 그만 살고 당신께 돌아오라 하시면 가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내게 살아야 할 이유이시고, 살아갈 힘이시며 돌아가야 할 귀향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나라는 존재를 시작하게 하시고, 사는 동안에는 함께 계시며 살아갈 힘을 주시고 당신께 돌아갈 때까지 완벽하게 저를 지배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란? 피를 흘려 피 흘릴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

 

어느 복음이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누구시냐고 물으신 다음에는 항상 ‘수난 예고’라는 것을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직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그리스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예수님만 십자가에 매달리고 자신들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란 성령을 받아 파견된 자를 의미합니다. 성령은 사랑의 본성을 심어줍니다. 사랑은 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전에도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체로 상징되는 빵을 거저 나누어주신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나눔이 그리스도께는 곧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죽지 않으면 준 것이 아니고 피가 섞이지 않은 어떤 선물도 사랑이 아닙니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생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황제는 국민에게 사랑을 받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중국 황제는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립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서태후가 지목하여 3살 때 부모를 떠나 황제가 됩니다. 나이가 들어도 신발 끈 묶을 줄도 모르고 칫솔에 치약을 짤지도 모를 정도로 완전한 대우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대우가 정말 사랑이었을까요? 

푸이는 황제로 살고 있었지만 6살 때 시대 상황에 따라 폐위됩니다. 하지만 중화민국이 그에게 생활비를 대주어 그는 아직도 자신이 황제인 줄 알고 호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그 성안에서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실제로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결혼도 자기 뜻대로 하지 못했는데 17살이 된 푸이는 주위 어른들의 강요에 못 이겨 같은 날 2명의 부인을 얻습니다. 이는 자금성 안에서 안위를 누리던 이들이 푸위를 잡아놓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두 여자 중 하나는 아편 중독으로 남의 남자아이를 낳고 다른 황후는 이혼 소송을 제기해 푸이는 중국 최초 이혼남이 됩니다. 일본군이 세운 만주국의 황제로 등극하지만 사실 이도 일본군의 꼭두각시 역할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그는 10년간의 감옥생활을 거친 후 식물원 정원수로 일하다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세상에 중국 황제만큼 엄청난 권위와 재산, 그리고 여자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세 차례나 황제였고 많은 여성을 알았으며 청나라의 재산이 한때는 다 그의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선물들 안에 없었던 것이 단 하나 있습니다. 주는 이의 ‘피’입니다. 주는 사람들은 그를 이용하려 그런 선물들을 한 것이지 그 안에 피를 넣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그 사람들은 부모였지만 그는 부모에게서 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받는다고 다 선물이 아닙니다. 그 선물 안에 피가 들어있어야 나를 살리는 선물이 됩니다. 다 가졌던 남자 푸이는 감옥에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것을 보고는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런 모든 것 안에 ‘사랑’이 담겨 있지 않음을 그때는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받는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이렇듯 사랑의 고통이 담겨 있지 않은 선물은 사람을 그냥 껍데기로 만들어버립니다. 

달걀도 유정란이 있고 무정란이 있습니다. 그냥 봐서는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떤 것은 병아리가 되고 어떤 것은 썩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냥 먹을 때는 영양의 차이는 크게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유정란이 비싼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유정란에 생명력이 더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암탉이 키워진 환경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정란은 아무래도 양계장이 아닌 조금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키워져야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는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피가 들어간 선물과 들어가지 않은 선물이 있습니다. 피가 들어가지 않은 선물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내가 주는 선물에 나의 피가 섞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생명을 주는 사랑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물질일 뿐입니다. 

사실 부모도 죽지 않는다면 자녀를 위해 주는 모든 것들이 사랑이 아닌 그냥 물질일 수 있습니다. 돈 많은 부모가 식모에게 시켜 힘들이지 않고 자녀를 키웠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 자녀는 올바로 클까요? 

어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여자분은 그렇게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잘 나가는 사람이라 큰딸을 키우는 것보다 일에 더 치중했던 것입니다. 엄마는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둡니다. 그래서 동생은 엄마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큰딸은 비록 풍요하게 자랐지만, 자신은 지독한 열등감에 자해까지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구타하는 남자를 떠나지도 못합니다. 돈이 많아서 돈으로 편하게 자녀를 키우면 자녀는 그렇게 자존감 없는 아이로 자라나 힘겨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인들은 고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부모 잃은 아이들을 한데 모아 키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보모들은 기계로 아이들의 젖병을 만들어 아이들이 배고플 때마다 젖을 먹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몸은 편해졌지만, 아이들은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갔습니다. 아이들은 젖을 원하는 게 아니라 피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피 흘림 없는 그리스도가 없듯이, 고통 없는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인데 그 주는 것 안에 내 피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무언가 주면서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이 주는 선물 안에는 그저 그 사람도 줄 줄 아는 사람이 되게 만들려는 뜻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의 기억은 완벽할까요?

 

자신이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인데 어떻게 틀릴 수 있겠냐고도 할 수 있지만, 사실 틀릴 수 있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언젠가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서 대화를 하다가 제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 하나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저라는 것입니다. 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데, 상대방은 분명히 제가 그랬다면서 자신의 좋은 기억력을 강조합니다. 제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했다고 하는데, 너무 강하게 이야기해서 “그래 네 기억이 맞아.”라면서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친구가 틀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가 했다는 것을 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지금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억이라는 것은 입력되는 정보를 끊임없이 해석하고 분석한 결과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기억이 계속해서 바뀌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 모두가 진실이 아닌 바뀐 기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기억도 그런 것 같습니다. 주님의 뜻 자체에 맞추면 올바른 기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뜻 자체에 맞추면 주님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채워주는 알라딘의 램프 속 ‘지니’ 정도로만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 한 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라는 군중들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군중들이 그렇게 말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자신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기에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분으로 예수님을 만들어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 중의 으뜸 제자답게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기에 가능했던 정답이었습니다. 물질적인 욕심을 채워주는 분으로 기억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진정한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잘못된 기억으로 주님의 외면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와 같은 정답을 말할 수 있도록, 주님의 뜻에 맞게 철저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기억으로 주님께 제대로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리더십은 말로 행하여지기 보다는 태도와 행동으로 보여진다.

- 헤럴드 제닌

 

 

잊어버리는 것도 좋아

 

나이를 먹으면서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분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저 역시 자꾸 깜빡깜빡 잊어버릴 때가 있더군요. 치매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봤기에 저 역시 불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2019년 과학자들은 우리 뇌 속의 ‘망각 신경 세포’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몸에 쓸데없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잘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망각 신경 세포’는 왜 있을까요? 
 
뇌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기억하면 뇌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고 합니다. 즉,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거나 얼굴을 인식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를 막기 위해 잊어버릴 수 있도록 돕는 ‘망각 신경 세포’가 있다는 것입니다. 잊어버려야 새로운 정보를 저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긴 치매 환자의 대다수가 과거의 기억에 매여 있습니다. 망각 신경 세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 지금 현재의 얼굴도 잘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사실입니다. 아니 지금을 더 잘 살려면 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기억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말이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랑이 고난을 끌어 안는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루카 9, 22) 

지극히 자연스러운 어둠과 빛 고난과 기쁨이다.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신 사랑의 주님이시다. 우리와 함께 고난의 여정을 걸어가시는 희망의 주님이시다.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서 고난을 체험하는 우리들 삶이다. 

그 누구도 고난을 피할 수는 없다. 고난도 은총이 되게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고난의 무게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의 인격은 성숙을 향해 나가게된다. 겸손을 배우게 된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수난이다. 주님께 달려가 안기는 우리들 절박한 믿음이다. 고난이 가리키는 것은 구원의 주님이다. 우리 삶 안에서 시작된 구원의 은총이다. 

고난은 숨겨져 있던 많은 것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안다. 힘겨운 고난 속에서도 끊을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이 고난을 끌어 안는다. 고난을 끌어 안으시는 주님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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