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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2021년 10월 9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요엘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피난처와 요새가 되어 주시고 시온에 머무르신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를 행복하다고 하는 여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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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요엘 4장 12-21절
낫을 대어라.
수확 철이 무르익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2
“민족들은 일어나 여호사팟 골짜기로 올라가라. 내가 사방의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려고 거기에 자리를 잡으리라.
13
낫을 대어라. 수확 철이 무르익었다. 와서 밟아라. 포도 확이 가득 찼다. 확마다 넘쳐흐른다. 그들의 악이 크다.
14
거대한 무리가 ‘결판의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결판의 골짜기’에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15
해와 달은 어두워지고 별들은 제 빛을 거두어들인다.
16
주님께서 시온에서 호령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를 치시니 하늘과 땅이 뒤흔들린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피난처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새가 되어 주신다.
17
그때에 너희는 내가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사는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 되고 다시는 이방인들이 이곳을 지나가지 못하리라.
18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19
이집트는 황무지가 되고 에돔은 황량한 광야가 되리라. 그들이 유다의 자손들을 폭행하고 그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20
그러나 유다에는 영원히, 예루살렘에는 대대로 사람들이 살리라. 21 나는 그들의 피를 되갚아 주고 어떤 죄도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주님은 시온에 머무른다.”
화답송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복음
루카 11장 27-28절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7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자라나 마침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9일 (토)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9일 (토)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은 성모님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행복하지 않으시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해 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복음사가는, 말씀이신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들으신 성모님을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 분’(루카 1,38 참조)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혈육의 인연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셨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성모님의 삶이 그리 행복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혼인 전에 예수님을 잉태하시어 파혼의 위기에 몰리기도 하셨고,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수난과 죽음의 여정을 묵묵히 바라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성모님의 여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행복을 보증해 주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도 그러한데, 그것을 잘 지키고 간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욱 힘든 일입니다. 경쟁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겉옷만이 아닌 속옷까지 내어 주는 삶이란 쉽지가 않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세상에서 뒤처지는 것 같고, 그렇다고 안 지키자니 마음이 불편하다 못해 죄인이 되는 기분까지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이야기하는 행복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이 다른 모습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귀 기울임이, 그분 말씀을 지키려는 작은 노력들이, 우리를 세상이 주는 가짜 행복이 아닌 참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히려 행복한 사람
이미 몇 번인가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피정 때 어머니들께 질문을 드리지요. 천국에 가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면 어떤 관계를 맺겠습니까?
우선 지금의 남편과 꼭 다시 부부의 연을 이어가겠습니까? 대다수가 싫다거나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답을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 아들과 어떻습니까? 관계를 끊겠습니까? 이어가겠습니까?
백이면 백 아들 관계는 끊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일생 망썽꾸러기에다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그렇겠냐고 물으면 그래도 지금의 아들이 계속 당신들의 아들이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서 저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용서도 이런 것이구나!' 아니, '이보다 더 큰 사랑과 용서이구나!'하고 이해합니다.
이제 한 걸을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지금 말썽쟁이 아들과 예수님 중에서 누구의 어머니가 되고 싶습니까?
더러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하는 분도 있지만 대개는 예수님보다는 지금 아들의 엄마가 되고 싶다고들 하십니다.
그런데 보통의 엄마들이 이러한데 오늘 복음의 여인은 다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참으로 행복하다며 부러워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도 자기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니고, 말썽쟁이 아들 때문에 불행해서 부러워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육신의 어머니에서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고 싶은 것일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양심’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 나는 창조자가 아니라 관리자라는 고백
당시 예수님께서 인기가 대단하셨나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아마 ‘나도 저런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행복론을 바로잡아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계명’입니다. 왜 어떤 것을 가지는 것보다 계명을 지키는 게 더 행복할까요?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귀한 것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관리자에게 맡길 때 꼭 주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설계도와 운영 안내서’입니다. 그리고 운영자를 못 믿어서인지 그 매뉴얼 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관리자를 괴롭히는 시스템을 넣어놓는데 이것이 ‘안전 시스템’입니다.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놓는 이유는 항상 관리자가 창조자보다 그것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관리자가 창조자의 안내서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알람을 울려서 관리자가 창조자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제가 처음 영성관에 왔을 때 자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새벽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신속히 대피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엄청난 사이렌 굉음과 함께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듯 뛰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화재가 발생한 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영성관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무조건 ‘119’에 신고했습니다. 그분들은 정말 불이 난 것이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저는 사이렌이 울리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밖에 서서 소방차를 기다렸습니다.
새벽에 출동했던 소방대원들은 화가 잔뜩 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화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끔가다 소방 시스템이 오작동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울리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영성관 구석구석을 살피며 아무 이상이 없으면 일단 알람을 해제하고 잠을 잡니다. 그러면 다음 날 소방점검 회사에서 와서 더 확인하고 시스템을 원래대로 해 놓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것 같습니다.
알람 시스템은 정말 귀찮습니다. 불이 나지 않았는데도 민감해서 훈련을 시키듯 울려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알람 시스템은 그만큼 이 건물을 운용하는 사람이 긴장해서 매뉴얼 대로 건물을 사용해야 건물이 안전할 수 있게 해 주는 꼭 필요한 장치입니다.
매뉴얼은 그 건물을 만든 이가 처음부터 만들어 놓은 설계도와 운영세칙입니다. 관리자는 안전 시스템의 알람이 울릴 때마다 매뉴얼을 공부하고 창조자의 본래 의도대로 그것을 관리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알람 시스템이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요즘은 자동차에 아기가 혼자 남겨지지 않도록 자동차에 아기가 있다면 경고음이 울리는 시스템이 장착되어 나오는 차가 많다고 합니다. 아기들이 부모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가 자기 생명을 책임져 줄 창조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스마트폰이 인간에게서 멀어져 원숭이 손에 들어가면 그것의 생명은 끝난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도 인간을 만드시고 그것을 운영할 인간에게 당신의 창조 의도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알람이 울리게 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을 ‘양심’이라 합니다. 양심은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질 때 울려주어 우리가 하느님 뜻에서 멀어졌음을 경고합니다. 이 느낌을 ‘불안’이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참 행복은 무언가를 소유하여 단순한 걱정을 없애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 말씀이라는 매뉴얼을 따르는 것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거짓말 탐지기’와 같은 것도 사용하면서 양심의 존재는 무시합니다. 양심은 그저 진화론적으로 생겨난 무엇이거나 교육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맡아 운영하는 운영자일 뿐입니다. 내가 만들지 않아서 나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 안전 시스템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나 자신을 운행하면 망가지는 게 순서입니다.
소방 시스템을 무시한 건물 관리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나는지 우리는 어렵지 않고 보아오고 있습니다. 1986년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원전 사고가 있었습니다. 원전 담당자는 피를 토하며 쓰러질 때까지 원전이 폭발한 것이 아니라 냉각기가 폭발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자신만큼 발전소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뒤늦게 이 모든 사태에 직면한 정부 또한 이 심각성을 인지 못 하고 일단 감추려는 데 전념했습니다. 체르노빌을 봉쇄하고 사람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으며 전화선도 끊었습니다. 그리고 사태를 악화시킬 일만 했습니다. 결국, 피신하지 못한 모든 사람이 방사능에 노출되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은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낙진을 맞으며 즐거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2~3일 후 바람을 타고 날아간 방사성 물질들이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까지 감지되었고 미국 인공위성이 이것을 찍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시간을 그들은 알람 시스템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창조자처럼 완전히 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사고는 터빈의 관성력으로만 얼마만큼의 발전이 가능한지에 관한 실험을 하기 위해 안전 시스템을 해제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습니다.
양심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신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이와 같습니다. 알람 시스템을 끄고 실험을 하다 사고가 발생했고 그는 자신이 그런 실수를 했을 것으로 인정하지 않아 자신은 물론이요 수많은 사람이 죽게 했습니다. 정부 또한 매뉴얼대로 하지 않고 이 일을 은폐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의 피해를 늘렸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것들에는 안전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음을 믿지 않으면 우리 개인들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자신도 그렇게 가정도 그렇게 나라도 그렇게 세상도 그렇습니다. 내가 만들지 않았으면 창조자의 매뉴얼대로 운영해야 한다는 겸손을 되찾아야 합니다.
주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을 하며 양심의 알람이 울리는데도 ‘그럴 리가 없다.’라며 그 불안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거나 그 불안을 잊으려고 더 큰 죄에 물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멸망시킵니다. 세상도 그렇게 멸망의 길로 갑니다.
우리가 겸손을 회복했다는 증거는 바로 ‘양심’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 양심이 알람을 울리지 않도록 운영세칙인 하느님의 말씀을 순간마다 찾는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존재와 가장 가까운 말은 ‘뜻’입니다. 엄마 품에서 자기 뜻대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드님을 가져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시기에 행복하신 것입니다.
내 안에 양심이 있다면 분명 누군가가 나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양심은 매뉴얼대로 작동하고 양심과 매뉴얼이 있다면 나를 만드신 분이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뜻대로 삶으로써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끼며 주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위해 무언가를 소유해서가 아니라 주님 뜻에서 멀어질 때 느끼는 불안을 먼저 해소하려고 합시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창조된 자로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의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낫을 대어라. 수확 철이 무르익었다.
“명연아! 인제 그만 놀고 밥 먹어라.” 옛날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의 이 목소리를 들으면 집으로 뛰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사실 다른 어머니들도 식사 때가 되면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더 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이 부름에 하나둘 빠져나가면 당연히 함께 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이 호명되면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이 기억이 아직 제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많은 이가 이 세상 안에서 더 오랜 시간 머물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반드시 옵니다. 나만 부르는 것이라면 이 부르심을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부르심이 주어집니다.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
어머니께서 불러서 놀이는 끝이 났지만, 집에서 밥먹고 또 나름의 놀이 시간을 갖습니다. 이처럼 죽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끝나지만, 하늘 나라에서 새로운 일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가져다주지만, 분명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도 품게 됩니다.
“인제 그만 놀고 하늘 나라에 와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이 언제 주어질까요? 그날과 그때를 모르기에 우리는 매 순간 준비해야 합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이 행복 선언이 옳음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여기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 복되신 것은 예수님을 잉태하셨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분의 말씀을 믿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믿음을 통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완벽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마지막 부르심의 순간이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제1독서의 요엘 예언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낫을 대어라. 수확 철이 무르익었다.”(요엘 4,13)
아직도 멀었다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을 계속해서 뒤로 미루다가는 커다란 후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할까요?
‘먼 훗날’이 아닌, ‘바로 지금’입니다. ‘여유가 되면’이 아닌, ‘바로 지금’입니다. ‘많은 것을 받은 다음’이 아닌, 많은 것이 부족해도 ‘바로 지금’입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으면서 지금의 삶 안에서 하느님과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참 행복에 가까워집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신의 인생을 단순하게 살면 살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더 명료해질 것이다.
- H.D.소로
목적과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식당 가는 것도 꺼려지는 요즘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부들을 만나기도 참 어렵습니다. 친한 신부들을 만나서 식사나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오던 저로서는 정말로 힘든 시기가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들을 제가 있는 성지로 초대하기 시작했습니다(물론 모임 인원 숫자를 방역 규칙에 맞춰서 했습니다). 초대받은 신부들도 남 눈치 보지 않아서 좋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초대하는 것은 솔직히 귀찮고 힘듭니다. 장도 봐야 하고 음식을 만드는 수고도 해야 합니다. 또 나중에 설거지와 정리 역시 제 몫입니다. 거의 이틀을 손님맞이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신부들을 위한 자리라는 생각에 기쁘게 준비하고 마지막 정리까지 기분 좋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나 자기가 믿는 어떤 목적이라면 많은 고통도 감내할 수 있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고통과 시련은 일차적인 것이 아닌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찾지 않으면 고통의 무게는 더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찾아서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 28)
행복의 시작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삶이 있는 곳에 말씀이 있다. 말씀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 말씀으로 우리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말씀과의 만남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말씀이 우리를 돌보고 있다. 말씀의 일상이 말씀의 행복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와 함께하는 말씀이다. 아름다운 삶을 낳는 말씀이다. 말씀 안에 참된 관계가 있다. 말씀이 삶을 바꾸어 놓는다.
행복의 길은 말씀의 길이다. 오히려 행복한 더 없이 행복한 말씀의 삶을 성모님은 사셨다. 삶을 행복하게 하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행복한가를 묻게된다. 말씀으로 우리의 행복을 새롭게 할 때이다.
말씀이 물들여가고 말씀이 열매 맺는 말씀의 신비이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는 말씀의 행복한 자녀들이길 바라시는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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