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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11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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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

 

 

2021년 10월 11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서간을 보내며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11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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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1장 1-7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1장 29-32절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11일 (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11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표징은 무엇일까요?

 

지난주 금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이야기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루카 11,15-16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가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을 앞의 내용과 연결해서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표징을 읽어 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표징은 무엇일까요? 표징은 단순히 기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표징은 하느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하느님 구원 약속의 성취를 읽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 그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그저 일종의 구마 행위로 바라보았음을 알려 줍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이 한마디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고 그저 요나 예언자의 이 한마디면 충분하였습니다. 요나 예언자가 선포한 뒤에,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큰 성읍 니네베의 모든 사람이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 한마디의 선포로 회개합니다. 이방 민족인 니네베 사람들도 요나의 한마디를 통하여 회개하는데, 자칭 하느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다인들은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들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을 직접 모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오고, 말씀 자체이신 분께서 우리에게 빵이 되어 오십니다. 이 만남 안에서 우리 또한 유다인들처럼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적적인 회개가 아니라 회개의 기적을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한 가지 의문을 자아냅니다. 표징을 요구하기에 이 세대가 악하다면 표징을 요구하지 않으면 선하다는 뜻인가? 

표징이라면 하늘의 표징인데 하늘의 표징을 아예 요구치 않는 세대, 하늘의 표징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요구치 않는 세대, 이 세상일에 흠뻑 빠져 하늘의 표징은 도무지 관심 없는 세대는 괜찮은가? 

그렇습니다. 하늘에 대해 관심이 없는 세대도 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별이 하늘에 있어도 별을 보지 않고, 구름이 흘러가도 그 구름을 보지 않고 산 그간의 삶은 분명 문제입니다. 

그러니 표징을 요구치 않는 세대가 어쩌면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 주님께서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 세대를 한탄하시는 겁니다. 

이 세대가 악하다고 할 때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선이 없어서 악한 차원과 다른 하나는 노림수가 있는 사악의 차원입니다. 

먼저 선이 없어서 악한 세대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악이란 선의 결핍,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 선의 결핍이니 악한 세대는 하느님의 선이 결핍된 세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이 왜 결핍이 됩니까? 하느님께서 선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셔서 그리 된 것입니까? 누구에게는 하느님께서 선을 주시고 누구에게는 안 주셔서 그리 된 겁니까?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와 햇빛을 주시는 분이니 우리가 선하고 악하고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겠지요. 

햇빛을 좋아하는 사람이 햇빛을 쬐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햇빛을 피하듯 하느님의 선을 좋아하는 그 선을 소유하여 선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 선을 거부하여 선의 결핍 때문에 악하지요. 

그리고 이렇게 악한 세대는 하느님의 선은 거부하고 이 세상의 선을 너무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선이 더 좋다면 표징을 보여 좋다는 것을 하느님보고 증명하라는 억지를 부리지요. 

둘째는 사악의 차원에서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광야에서 받으실 때 사탄이 주님께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기적을 보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겁니다. 

하느님의 힘을 시험하는 교만하고 사악한 기적 요구입니다. 하느님, 당신이 선이시라면 제 병을 고쳐주십시오. 하느님, 당신이 저를 사랑하신다면 제 사업을 번창케 해주십시오. 뭐 이런 식으로 당신의 능력과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라는 요구이고, 그러면 당신이 하느님이심과 사랑이심을 믿어 주겠다는 교만한 요구입니다. 

이런 것이기에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징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나의 표징이란 삼일 낮밤을 고래뱃속에서 지내는 것이고, 니네베에 회개를 선포하여 사람들을 회개케 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힘이 내게 있다고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죽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이 복음 곧 기쁜 소식임을 믿고 회개하는 것이 주님께서 악한 세대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요나의 표징이고 하늘의 표징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적인 회개가 아니라 회개의 기적을 살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듣는 마음’은 자신 안의 뱀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지금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악한 이유를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들이 표징을 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듣지 않으면서 보기 원하면 악한 것입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악한 세대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증거를 대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불신을 깰만한 화끈한 무엇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거를 보여주면 의견을 바꿀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그런 것으론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고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기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속에서 사흘을 있다가 밖으로 나온 사건입니다. 예수님도 사흘 동안 땅속에 머물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울 수 없는 표징에도 악한 세대는 꼼짝하지 않습니다. 이미 귀를 막고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부터 본인들은 마음이 굳게 닫혀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남방 여왕이 긴 여행을 했다는 것과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기적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는 것은 듣는 것 다음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 마음에 이미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합당한 증거를 보여주어도 그 사람은 바뀌지 않습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뀌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최강의 영향력』이란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증거가 우리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가?’

이 책에서 여러 실험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사형제가 범죄율을 낮춘다는 증거와 또 범죄율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객관적 증거를 준비하였습니다. 물론 객관적 정보이기는 하지만 둘 다 편향되게 만든 그럴싸한 허위 정보들입니다. 

두 그룹에 각자 하나씩의 정보를 주었더니 사형을 반대하던 학생들은 사형이 범죄율 감소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증거에 대해서 잘못되고 조작된 정보라고 반기를 들었고, 사형을 찬성하던 학생들은 범죄율을 낮춘다는 증거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가 아니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실험은 온실가스에 관련된 실험입니다. 처음 환경학자가 2100년까지 지구 온도가 3.4도 오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의견에 수긍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과학자들이 정보를 재평가한 후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절반에게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했고 다른 절반에게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바뀐 정보를 수용했을까요?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3.4도 맞을 텐데?”

[참조: ‘팩트를 제시해도 신념을 바꾸지 않는 진짜 이유’, 유튜브, ‘더 나은 삶 TV’]

이것은 지금 대선 주자들에 대한 인지도 평가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잘못된 일들을 아무리 쏟아내도 일단 한 번 지지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좀처럼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한국일보, 2021년 10월 5일’ 자 신문에 ‘대선이 이상하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선주자 빅2’로 불리는 두 사람에겐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고발 사주 의혹 같은 대형 악재를 맞아도, 실언·실책으로 자질 시비가 일어도 콘크리트 지지율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사와 윤 전 총장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겠지만, 이 같은 기현상엔 그늘도 있다.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똘똘 뭉쳐 격돌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뜻인 동시에, 대선에서 정책·인물 경쟁이 변별력을 발휘할 공간이 지극히 좁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 선거를 할 때 나라를 위한 대통령을 뽑으려는 것보다는 내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증명하려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증거를 제시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나를 부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열린 마음’을 갖고 올바로 판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확증편향은 의견이 곧 자신이라 여기는 오류에서 시작함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부정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험이 있습니다. 서울 아파트 시세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32평 아파트를 보여주고 “10억 원이 넘을까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은 10억 원 아래다, 더 나간다는 두 쪽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자신과 의견이 같은 사람들이 몇 명씩인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이 많으면 자신감이 생겨 자신이 배팅한 가격보다 더 내리거나 더 올렸습니다. 하지만 처음 정한 의견은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남더라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더 자신의 의견을 견고하게 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은 견뎌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듯 ‘자기가 부정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견이 틀릴 수 있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믿고 있었던 자신의 의견이 뱀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와는 뱀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뱀을 철저히 믿은 것입니다. 뱀의 의견이 바뀌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아가 뱀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기에 귀를 막아버립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자아를 뱀이 아니라 천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버린 것만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지도 않을 것이면서 끊임없이 증거를 보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명확한 증거를 눈으로 보더라도 자기 식대로 합리화해버립니다. 따라서 듣지 않고 보여달라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어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가 뱀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오류만 있음을 알기에 진리를 외부에서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듣는 마음’을 청했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지혜는 듣는 마음입니다. 자신이 뱀이요, 오류요, 어둠이요, 악임을 인정할 때야만 듣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뱀임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외부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책을 찾아서 읽고, 강의를 찾아서 듣고, 묵상하며 하느님 음성을 들으려 합니다. 고집불통이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뱀임을 아는 것뿐입니다. 내가 뱀임을 알았다면 외부에서 진리를 습득하기 위해 남방 여왕처럼 진리를 찾는 노력을 반드시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적과 표징을 찾아보세요.

 

봄을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만물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꽃이 피고 새순이 돋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봄에 피는 꽃은 겨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포가 우리나라의 개나리를 너무 좋아해서 고국 방문 때 개나리 몇 토막을 잘라다가 시드니 자기 집 정원에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나리는 위로 자라기만 하지 몇 해를 두고서도 꽃을 피우지 않는 것입니다. 
 
개나리꽃이 예쁜 것이지, 개나리의 줄기는 별 볼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는 식물학자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시드니에는 겨울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춥고 황량한 겨울을 이겨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게 보입니다. 암을 극복하신 분이 더 열심히 사시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자기 삶이 다져져서 삶 자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지금을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 후에야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 
 
요나 예언자의 말 한마디로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했던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며 표징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나 예언자는 이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민족을 지배하던 니네베 사람들이기에 이들의 멸망은 곧 자기 민족의 구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망까지 갔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대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몽땅 다 회개합니다.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말이지요. 
 
바로 가장 큰 기적과 표징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을 때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 모습이 때로는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이를 인정하고 굳은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했을 때, 가장 큰 기적과 표징이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내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적과 표징을 찾아보세요. 고통과 시련 속에서 그 기적과 표징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노동은 인생을 감미롭게 해주는 것이지 결코 힘겨운 짐이 아니다.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는 자만이 노동을 싫어한다.

- 빌헬름 브르만

 

 

어떤 영향을 세상에 전달하겠습니까?

 

스탠퍼드 대학에서 104명을 대상으로 실험했습니다. 우선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제1그룹에는 지루함을 느꼈던 때를 주제로 짧은 에세이를 쓰게 했습니다. 제2그룹에는 인생이 불공평하거나 ‘타인에서 부당한 대우나 무시당했다’라고 느꼈을 때의 상황을 쓰도록 했습니다. 
 
이 작업을 마친 사람들에게 혹시 연구진을 도와줄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부정적인 글을 쓰도록 했던 제2그룹이 제1그룹보다 26% 낮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2그룹은 계속해서 이기적인 행동을 보였고, 실험 후 그들의 자리에는 쓰레기가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실험용 펜까지 가지고 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삶 자체를 바꿔놓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전달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으로 다른 이에게 좋은 영향이나 나쁜 영향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향을 세상을 전달하겠습니까?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루카 11,32)

 

소중한 인격을 탄생시키시는 공감의 주님이시다.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신다. 삶의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할 주님이시다. 회개를 일깨우고 삶을 일깨우는 스승이시다.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들에게 활짝 열어 보여주신다. 삶의 시작부터 삶의 끝까지 희망 자체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는 깊이만큼 깊어가는 우리들 믿음이다.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지를 다시 묻게된다. 하늘을 향하듯 가을 햇빛을 간절히 바라듯 주님을 향하는 우리들이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을 통하여 하느님 자녀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께서 누구이시며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하는 이것이 참된 은총이다. 신앙은 마음 깊이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 이곳에 가장 필요한 것은 먼저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삶의 길 관계의 길을 알려주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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