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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14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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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

 

 

2021년 10월 14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며,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1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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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3장 21-30ㄱ절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형제 여러분, 

21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27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28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30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주님,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애원하는 제 소리에, 당신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1장 47-54절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14일 (목)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14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말씀은 회개의 주춧돌

 

지난 화요일 복음에서는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식사 자리에서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복음까지 이어집니다. 식사 초대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루카 11,37). 

사실 그의 초대는 예수님을 옭아매거나 시험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 좋은 의도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식사 자리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과연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마음이 독한 앙심으로, 또한 그분을 옭아매려는 마음으로 변하고 맙니다.

이러한 마음 변화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태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들을 향한 저주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들이 올바른 눈과 귀를 지니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보고 듣고 깨우쳐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향한 적대감을 키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오히려 그 말씀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호의가 독한 앙심으로 변화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가끔 주님의 말씀이 나의 약점을 드러나게 할 때,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모습에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잔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말씀입니다. 바리사이처럼 독한 앙심을 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말씀을 회개의 주춧돌로 삼으시겠습니까? 선택은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불행 선언 2

 

어제에 이어 주님의 불행 선언은 계속됩니다. 이는 주님의 행복 선언과 병행하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행복 선언이 누구를 지칭하지 않는 데 비해 불행 선언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꼭 짚어 얘기하는 점입니다. 

오늘 주님의 불행 선언은 한층 더 신랄하고 독합니다.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지만 모든 예언자의 피의 책임까지 이 세대가 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상들의 책임까지 왜 그들이 져야 할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조상들과 똑같은 짓을 하기 때문인데, 예언자들이 옳고 조상들이 잘못했음을 알면서도 같은 짓을 하고, 예언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꾸밈으로써 자신들은 조상들과 다른 것처럼 착각하거나 자기들을 겉꾸밈 하기 때문입니다. 

무덤을 겉꾸밈 하면서 자기들을 겉꾸밈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성인처럼 살지 않으면서 성지 순례는 자주 하고, 성지를 화려하게 꾸미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요. 모르고 죄를 지으면 죄가 안 되거나 크지 않은데 알면서도 죄를 지으면 그 죄가 더 크듯이 조상들의 잘못을 알면서 같은 짓을 하면 그 잘못까지 덮어 써야 하지요. 

이들의 또 다른 죄와 불행은 자기들도 천국에 못가면서 다른 사람도 천국에 가지 못하게 하는 점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천국에 들게 하는 열쇠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인데 율법의 잘못된 준수를 율법의 준수라고 알고 있고 그렇게 하면 천국에 들 수 있다고 하니 그것이 자신들의 불행이며 남도 불행케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잘못과 불행은 바로 증명이 됩니다. 이들의 이런 잘못된 지식을 바르게 알려 주시는 주님께 앙심을 품고 바로 음모를 꾸밉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너 그렇게 살면 불행해진다고 얘기해주고 가르쳐주시는 것이 감사할 일이 아니고 그렇게까지 앙심을 품을 일이며 그렇게 얘기한다고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해야 할 일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겸손이 부족할 뿐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가르침이 아니라 꾸짖음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때 우리가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한 얘기에 누가 크게 화를 낸다면 그것은 그 말이 그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는 표시이고, 그 말이 큰 상처가 된 것은 그가 이미 큰 상처를 입고 있기 때문이듯 주님의 가르침에 그렇게 앙심을 품고 궁지에 몰아넣으려 노리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치명상을 안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들은 가르침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인데 자기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오히려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할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 권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충고나 가르침이 앙심으로 남는 우리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언자들을 죽인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들의 조상이라 말하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질책하십니다. 이는 당신도 예언자이기에 그들이 당신도 똑같이 죽일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조상으로 삼지 말고 하늘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조상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조상이면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러면 조상이 한 그대로 살다가 조상이 저지른 모든 죄까지 벌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말이 그들에게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을까요? 조상까지 나무라는 예수님을 살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후손임을 고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말은 곧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면 곧 하느님 백성일까요?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국 국적을 가지면 한국 사람일까요? 그렇기도 하지만 진정한 한국인이 되려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세금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주민등록증만 가지면 한국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면 그는 더는 진정한 한국 사람이 되는 발전을 하지 못합니다. 나의 목표가 주민등록증을 갖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미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인 혼혈인 ‘힘의 길’이란 유튜버가 있습니다. 그가 유전자 검사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결과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피가 섞였고 시베리안 피도 섞인 56.06%의 동아시아인, 그리고 동유럽과 핀란드인 피가 섞인 35.6%가 유럽인, 4.84%의 아메리카 원주민 피가 섞여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왜 놀랐을까요? 자신은 자신을 완전한 ‘한국인’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며 말합니다. ‘시베리아인 피’가 섞여 있어서 보드카를 좋아하고 눈이 좋은 것 같다고. 이렇게 우리는 조상을 알면 그 조상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조상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은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는 ‘한국말’밖에 못합니다. 만약 그가 아버지처럼 자신도 미국인이라 생각했다면 분명 영어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이란 생각이 강하기에 한국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비록 미국인이지만 본인이 한국인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이미 완성된 것으로 규정해 놓고 그것으로 만족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힘의 길’ 씨 앞에 아버지가 계속 계셨다면 영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영어를 하지 못하는 자신이 좀처럼 용서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사생활이라 죄송스러운 마음도 있지만 이미 유튜브에서 밝힌 사연이라 말씀드리겠습니다. 

힘의 길 씨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미국에 가서 결혼하였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아기를 데리고 한국에 온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처럼 한국말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발전은 할 수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어를 배우는 것에만 한정된 이야기이지 이분이 인성적으로나 세상의 측면에서 발전이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다만 끊임없이 발전하려면 내가 될 수 있다고 믿지만, 그 대상보다 내가 너무 못나서 벌레처럼 보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하기에 하느님 자녀가 되라는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이 앞에는 항상 자신을 아직 많이 부족하게 여기게 만드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자신처럼 분명히 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대상이 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습니다. 

JTBC의 ‘말하는 대로’에 샤이니의 ‘키’(Key)가 나와 팬들과 소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26세였습니다. 그날의 주제는 ‘나답게 사는 법’이었고 제목은 “닭이 닭답게 못 사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었습니다. 

키의 이름은 김기범입니다. 그는 왜 자신을 닭이라 여겼을까요? 처음엔 샤이니 모든 멤버들이 ‘백조’란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백조로 태어나서 금수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키는 몇 번의 오디션에 떨어지고 간신히 붙은 경우입니다. 그리고 인기투표를 하면 항상 5위였습니다. 멤버가 다섯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아는 사람은 부모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음을 압니다. 처음부터 백조였다는 말은 사람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모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오히려 가수 키는 다른 멤버들은 ‘백조’이고 나의 출신은 ‘닭’이니 닭답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자기답게 사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분명히 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신을 믿어야만 이렇게 겸손해집니다. 신 앞에서는 누구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을 통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신 앞에서 자신은 닭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랑하지 못합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샤이니 멤버 중 점점 인지도가 향상하는 가수는 키라고 합니다. 요즘 개인 앨범도 내고 많은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발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이 ‘닭’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계기는 분명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하느님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닭이니까 백조보다 더 열심히 살고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말자는 결심입니다. 그는 주근깨도 찢어진 눈썹도 가리지 않고 방송에 출연합니다. 자신은 닭이니까. 그래서 어려운 연예계에서 무탈하며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려면 내가 될 수 있는 최대치의 대상을 내 앞에 두십시오. 마치 아기가 부모를 앞에 두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목적이 그리스도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불완전한 대상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이 완성되면 거기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멈추지 않고 발전하려면 내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내 앞에 모셔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베드로처럼 물 위도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목적지는 세례받는 것, 혹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공원마다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데 나이 든 이들을 위한 시설은 거의 없다.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에 60세 이상 노인들을 위한 이색 놀이터가 있다고 합니다. 이 놀이터는 잔디밭과 테니스코트와 볼링장, 어린이공원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다른 놀이터와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입구에 ‘젊은이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나이트브리지협회의 매들린 엘스던은 BBC 등과의 인터뷰에서 “공원마다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데 나이 든 이들을 위한 시설은 거의 없다”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며 반기는 사람도 있지만, 나이 든 티를 내고 싶지 않다면서 이용하지 않는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하긴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은 참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젊은이가 출입할 수 없는 60세 이상 노인의 놀이터도 생겨났겠지요. 하지만 솔직히 이렇게 서로 분리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함께한다는 것이 중요함을 잘 알면서도 이 세상은 계속해서 분리해나갑니다. 젊은이와 늙은이, 남자와 여자, 보수와 진보…. 이러한 분리 속에서 아픔과 상처를 겪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함께 하기 위해서는 내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서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늘 나라의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우리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어제 복음에 이어서 주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향한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 판단이 바로 하느님의 판단인 양 사람들을 단죄하고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자신의 판단으로 박해하였으며, 이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까지도 죽음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판단만이 최고인 듯한 생각으로 행동하면 결코 함께할 수 없습니다. 자기만 맞고 남은 모두 틀렸다고 생각하는 데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자신의 판단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곳에는 사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보다는 거짓된 위선과 자기만 아는 이기심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할 수 없는 자리가 되고 맙니다. 
 
사랑은 판단하지 않고 오랜 기다림 속에서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채워주려고 애쓰는 것, 그 마음이 바로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 안에서만이 우리 모두 함께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에 생기는 모든 일은 우리를 목적지로 인도한다.

- 조 비테일

 

 

진정성 있는 삶을 위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어 팔린 작품으로 손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안젤루스, 삼종기도)입니다. 해가 저무는 저녁의 들판, 그 가운데서 하루 수확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리는 남녀에 많은 이가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 작품에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밀레는 너무나 지독한 생활고에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의뢰한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사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를 가엽게 여긴 수집가가 사들였지만, 이 작품을 계속 보면 시끄러운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이유로 다른 작품으로 교환해 갔다고 합니다. 
 
밀레가 활동하는 19세기 초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화풍이 유행할 때였습니다. 신이나 귀족같이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을 소재로 삼아 화려하고 웅장하게 표현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밀레의 작품 모두는 비참한 현실을 묵묵하게 담아내는 진정성 있는 예술이기에 사랑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성은 결국 인정되어서 현재 많은 이가 사랑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지금 다른 이의 시선에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어떤 사람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지금을 산다면 언젠가는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루카 11,50)

 

아름다운 가을 하늘을 맘껏 볼 수 있는 요즈음이다. 더 나은 발전은 과거를 뼈저리게 반성하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무한한 책임감으로 바뀌어야 한다. 책임을 지는 삶이 건강한 우리들의 참된 희망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피 흘린 수 많은 예언자들을 기억한다. 올바른 정신의 진전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피흘림을 기억하며 우리의 내면에서 생활로 이어지는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일관된 노력과 단호한 변화의 의지가 필요한 우리들 세대이다. 변화와 변질은 엄연히 다르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참된 변화이다. 창조적인 만남은 피에 대한 책임을 지는 성숙함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창조와 재창조 사이에 십자가가 있다. 상호연결 되어있는 우리들 삶이다. 

과거의 십자가가 현재의 십자가이며 미래의 십자가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로 새로운 시도를 하신다. 한 사람의 변화가 세상을 정화하는 치유의 변화가 되었다. 

하루하루 변해가는 가을의 색채이다. 십자가에 동참하는 변화가 참된 변화이듯 우리들의 가야 할 책임있는 삶이다. 책임의 정신으로 돌아갈 때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자신또한 역사의 죄인 공동체의 죄인이라는 각성이 새로워지는 진정한 변화임을 믿는다. 대자연은 결코 새로운 변화를 방해하지 않는다. 단풍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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