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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
2021년 10월 13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며,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 영광과 명예와 평화를 내리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불행하다고 선언하시며, 남에게 힘겨운 짐을 지워 놓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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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로마 2장 1-11절
하느님께서는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모든 이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1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3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4
아니면,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5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7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8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9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10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11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화답송
주님, 당신은 사람마다
행실대로 갚으시나이다.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구원이 오리니, 내 영혼 그분을 고요히 기다리네.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주님, 당신은 사람마다 행실대로 갚으시나이다.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희망이 오리니, 내 영혼아, 그분을 고요히 기다려라.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주님, 당신은 사람마다 행실대로 갚으시나이다.
백성아,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이시다. 주님, 당신은 사람마다 행실대로 갚으시나이다.
복음
루카 11장 42-46절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13일 (수)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13일 (수)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불행하여라!
종교 지도층을 향한 “불행하여라!”라는 선언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던 이들을 향해서 “불행하여라!” 하고 일침을 가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에게 ‘불행 선언’을 들은 이들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을 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야기하지만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시는 듯 살았고,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들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구약에서 신약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합니다.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지는 않는지, 신자들에게 힘겨운 짐을 지워 놓고 자신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모습이 있다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변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주일의 의무만을 지켰다고, 봉사 활동에 참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음에도, 하느님 때문에, 또 예수님 때문에 양보하고 실천하는 작은 희생이 우리를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그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행 선언’이 아닌 ‘행복 선언’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저절로 생각게 되는 것은 ‘가만이나 있었으면’과 ‘누가 더 창피했을까?’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너희 바리사이들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이러저러한 그들의 잘못을 말씀하시자 듣고 있던 율법 교사가 나서서 그것은 자기들에게도 모욕이라고 항의하니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를 나무라실 때 나의 잘못은 없는지 성찰하고 반성하고 있었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자기들은 마치 잘못이 없는 양 톡 나서자 주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지없이 면박을 주시니 얼마나 더 멋쩍고 창피하겠습니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불행하다는 선언을 받고, 그들이 불행한 네 가지 이유 그러니까 그들을 불행케 만드는 네 가지 잘못을 지적받습니다.
첫째 잘못은 의로움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는 잘못입니다.
십일조는 잘 바치지만 정작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엔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십일조는 하느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 신자 의무를 다한 것일 뿐입니다.
의무를 한 것으로 의롭다고 생각한 것인데 의무로 의롭지 않고 의무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더더욱 아니지요. 그런데도 의롭다 착각하고 하느님 사랑도 없으니 그것이 불행한 것입니다.
둘째는 공동체 안에서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잘못과 이 불행은 사람들 가운데서 윗자리를 좋아하다가 사람들에 의해 아랫자리로 끌려내려가게 되는 불행만을 얘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 역시 하느님 앞에 서지 않는 불행을 얘기하는 것일 겁니다.
셋째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은 불행입니다.
그런데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덤이란 죽은 자가 묻혀있는 곳이니 겉으로 살아 있고 잘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죽어 있고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즉시 떠오르는 것이 대궐 같은 부잣집인데 그 안에 사는 사람끼리는 아무런 사랑이 없고 그래서 그곳에서의 삶은 아무 온기가 없는 삶이며, 매우 교양이 있는 사람처럼 굴지만 그것은 위선일 뿐 사랑이 없습니다.
넷째는 남에게 힘겨운 짐을 얹어 놓고 자기는 그 짐에 손가락 하나도 대려 않는 것인데 다른 사람들을 불행케 만드는 사람의 불행입니다.
주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사람은 다 당신께 오라고 하시는데 율법 학자들은 그 지키기 어려운 율법 규정들을 사람들이 지키게 하고는 그들의 고통과 불행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남을 불행케 하는 것이 자기도 불행케 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의 행위입니다.
사실 최고의 불행은 자기가 불행한 것을 모르는 불행이고, 자기의 무엇이 자기를 불행케 하는지 모르는 불행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너희는 불행하다고 하신 것은 불행해지라는 저주가 아니라 불행한 것을 알라는 말씀이고 불행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서 돌아서라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불행을 알려주시고 무엇이 불행케 하는지 알려주시는 것을 사랑이 아니라 모욕을 주시는 것이라고 율법 학자들은 받아들이니 이것이 참으로 딱하고 이것이 참으로 불행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도 이랬다면 이제라도 돌아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십일조보다 사랑실천인가, 십일조 통해서 사랑실천인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특별히 그들은 십일조는 잘 지키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실천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이웃사랑입니다. 하느님께 자비를 받았으니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의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십일조는 내면서 사랑실천은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십일조’는 바리사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나는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라는 명목으로 지키는 대표적인 조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일조를 지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더 중요한 율법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십일조를 통해서 사랑실천을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나라 말의 번역은 약간 십일조와 사랑실천이 별개인 것처럼 해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십일조와 사랑실천을 별개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지 않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서로 죄짓게 만들고 서로를 심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사랑하지 않고 자기가 주체가 되어 사랑하면 그 사랑은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바치는 것은 십일조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봉헌다는 뜻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하느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행위를 저버리면 이웃사랑도 당연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해석은 “너희들이 꼭 지키는 십일조보다는 사랑실천을 해야 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의 십일조가 사랑실천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느냐?”라고 하시는 뜻이 됩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일까요? 당연합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형제끼리는 잘 지내게 될까요?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형제끼리 잘 지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이 부모가 하느님이 된다면 그것은 감사의 십일조가 될 것입니다.
유튜브에는 부모를 피해 집을 나와 혼자 평생을 산속이나 다리 밑에서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34년째 길 위에서 사는 남자의 사연’이 있습니다. 한 번 가졌던 부모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면 혼자 집을 나간 장남. 그러나 하는 일마다 잘 안 되어 34년 동안 형제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다리 밑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많이 잘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부모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면 형제에 대한 애정과 책임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용돈을 모아서 부모 생신 때 선물을 해 드립니다. 그렇게 되는 가족이라면 형제들 간의 우애도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인공 기훈은 착하지만, 돈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누구도 이 게임에 강제로 참여하라는 강요를 받지 않습니다. 모두가 큰 빚을 지고 있기에 여섯 개의 게임을 잘 통과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배신하고 죽이고 죽습니다. 이는 돈을 위해 달려가는 우리의 삶이 마치 오징어 게임 안에 있는 것과 같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착한 사람 기훈은 정말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는 누구도 짝이 되려 하지 않는 1번 할아버지 일남과 짝을 맺습니다. 그런 짝과 게임을 하면 질 게 뻔합니다. 그러나 게임은 둘이 구슬 따먹기를 해서 다 잃는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게임의 달인이기 때문에 이정재의 구슬을 거의 다 땁니다.
할아버지는 말기 암 환자로 몇 달밖에 살 수 없습니다. 이정재는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것으로 단정하고 할아버지를 속입니다. 홀이라고 했는데 짝이라고 했다고 하고 짝이라고 했는데 홀이라고 바꿉니다. 그렇게 죄책감이 들기는 하지만 일남 할아버지를 속여서 구슬을 다시 빼앗습니다. 이때의 짧은 대화가 뇌리에 남습니다. 일남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구슬이 다 없어졌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구슬이 하나 남아있었습니다.
“구슬이 하나 더 있었네?”
“우리 다 걸고 한 판 할까?”
“그 구슬 하나랑 이걸 다 걸라고요?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기훈은 화를 버럭 내며 소리칩니다. 이때 일남이 차분하게 말합니다.
“내 구슬 가져간 건 말이 되고?”
일남은 치매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저 자기를 선택해 준 기훈에게 베풀고 싶었을 뿐입니다. 일남은 남은 구슬을 기훈에게 넘겨주며 말합니다.
“그동안 고마웠네. 괜찮을 거야.”
그리고 일남은 죽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게임을 만든 건 일남이기 때문입니다. 일남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재밌게 게임을 하다가 죽고 싶은 마음에 이 게임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게임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단 한 사람이 일남입니다. 언제든 누군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착하게만 보였던 기훈이 아니라 일남만이 이 안에서 사랑할 준비가 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다면 아무리 혼자 힘으로 이 세상에서 이웃을 사랑하려 해도 안 된다는 것이 이 시리즈물이 주는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이 게임에 들어온 모든 사람은 거의 모두가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빚쟁이들이었습니다. 빚을 지게 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기훈이 막일이라도 했다면 수백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을까요? 그는 일하는 대신 경마 도박을 했습니다. 빚이 없다면 돈에 대한 욕심도 없게 되고 그러면 오징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서는 세상을 벗어난 사람만 게임을 즐기며 사는 것처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시기도 한 하느님을 먼저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믿음을 유지하게 하시기 위해 선악과를 준비해 두셨고 구약에서는 그것이 계속 같은 의미로 십일조 계명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내는 것은 일남 할아버지처럼 세상을 즐기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데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반면 바리사이들은 십일조는 하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목적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오징어 게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일조의 의미를 바로잡아 주려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도구로 십일조가 사용될 때야만 하느님 사랑을 통해 이웃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오징어 게임은 놀이입니다. 이 놀이에서 유일하게 동심을 유지하며 즐긴 단 한 사람은 일남 할아버지 하나였습니다. 재산도 많고 어차피 죽을 것이라서 잃을 게 더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도 이처럼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일조는 안 내도 되고 사랑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뜻이 아니라 십일조를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이 더 강할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을 아버지로 믿을 수 있어야 일남 할아버지처럼 이 세상을 즐기면서도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로마 2,6)
남 탓을 많이 하며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그 마을의 현자라는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현자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떤 창고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은 먼지로 가득했고, 여기저기 거미줄이 처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사람의 방문이 없었던 곳임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현자는 그를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거울 위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지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자, 현자는 자기 소맷자락으로 거울을 쓱쓱 문질렀습니다. 먼지가 가득 날리면서 현자와 이 사람은 눈이 따갑고 목이 칼칼해지면서 기침을 했습니다. 그 뒤 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님은 지금 먼지가 덮인 이 거울과 같습니다. 불평불만의 먼지가 가득해서 형제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먼지를 닦아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분명 쉽지 않고 유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업을 마쳐야 진짜 내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먼저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 세상만을 바라보면 끊임없는 불평불만과 잘못된 판단으로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마치 먼지가 쌓여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교사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십일조는 열심히 지키지만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또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면서 정작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정작 자신의 옳지 못함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 2,6)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가지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하느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고난과 불행이 찾아올 때 비로소 친구가 친구임을 안다.
- 이태백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것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 가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피에타상에는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가게 앞을 지나다가 아주 볼품없는 커다란 대리석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대리석의 가격을 물으니, “그냥 가져가세요. 지난 10년간 이것을 팔려고 했지만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쓸모없이 큰 돌이 공간만 차지해서 귀찮았는데 잘 되었네요.”라고 주인이 말합니다.
일 년 뒤,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으로 피에타상을 만들어 주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주인은 깜짝 놀라며, “아니, 볼품없는 대리석으로 이런 훌륭한 작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리석을 보았을 때, 단지 불필요한 부분만을 쪼아낸다면 아주 멋진 작품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이 볼품없는 대리석이라며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은 우리를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 훌륭한 모습이 있습니다. 불필요한 부분만 제거하면, 하느님의 멋진 창조물임을 세상에 알릴 수 있습니다. 제거할 것은 무엇일까요?
욕심, 이기심, 미움, 부정적 마음 등…. 너무 많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루카 11,42)
복음은 실천의 재발견이다. 실천은 나와 너를 돌보는 참된 행복이다. 실천하는 우리의 행동이 이기심을 치유한다. 진정한 신앙인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건강한 믿음이 건강한 행복이다.
무엇을 위한 행복인가! 올바른 실천을 위한 우리의 행복이다. 요란한 삶을 치유하는 것은 올바른 실천이다. 실천해 나가는 것이 거듭 새로워지는 우리의 성장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실천하는 사람의 이름이다.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을 일깨워주신다. 행복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제대로 보는 것이 실천의 시작이다. 행복은 실천을 가까이에 두는 것이다. 깨끗한 실천이 우리의 맑은 행복이다. 오늘 이하루는 아는 것을 실천하는 행복의 멋진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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