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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17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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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9주일 -

 

 

2021년 10월 17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의인이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가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전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면 필요한 때에 우리의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17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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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53장 10-11절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리라.

 

10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히브 4장 14-16절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형제 여러분, 

14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10장 35-45절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그때에 

35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37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39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41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42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4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 또한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겸손과 봉사는 은총이며 하늘이 내리는 축복입니다. 은총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현세에서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우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17일 (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17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누구나 탐내는 첫자리에 진정으로 오르고 싶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강력한 힘과 권능을 가지고 현재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과는 달리, 메시아를 세상의 통치자며 권력자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반대의 메시아를 제시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성주간에 듣게 되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입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고난을 받는 것 같았지만, 그가 받은 고통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의 고통을 통해서 많은 이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대속’(代贖)의 의미가 담긴 노래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 주실 메시아는 강한 힘을 가지고 현세를 개혁하는 혁명가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죄를 대신하여 매 맞고 고통당하는 이였습니다(이사 52,13―53,12 참조).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 고난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백 년 전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이 바로 당신을 위한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아셨기에, 예언의 완성을 위해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말씀을 완성하시고자 온갖 수난과 고통을 인내하시며 ‘대속’의 길을 가신 예수님께서는, 아끼던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셨을 때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그 과정에서 서로 마음 상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예수님을 얼마나 힘들게 하였을까요? 우리는 지금 어떤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하던 힘과 권능을 지닌 메시아를 예수님에게서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한 바람은 우리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뿐이라는 사실을 오늘 복음은 알려 줍니다. 누구나 탐내는 첫자리에 진정으로 오르고 싶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고통마저도 사랑하는 사랑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고통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거창한 주제인데 철학적으로 얘기하면 악의 경험이고 다시 악이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싫어하는 것이요, 그래서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이란 내가 원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을 겪는 것인데 그렇기에 전에 싫어하고 거부하던 고통을 원하게 되면 그 고통은 이제 더 이상 고통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고통을 원한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고통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싫어하고 거부하던 병고를 어떤 이유 때문에 내가 원한다면 병고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육신의 병고는 여전히 내게 남아 있고 다만 마음의 고통이 사라진 거지요. 

다른 예를 든다면 예뻐지기 위해서 성형 수술을 하는 경우 수술로 인한 통증이 없는 것은 아니고 다만 마음의 고통이 없는 것이고, 마음은 오히려 기쁘고 희망에 부풀기까지 하겠지요. 

왜냐면 그는 전에 자기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 고통이 심했는데 원하는 얼굴이 됨으로써 마음은 기쁘고 희망차게 되는 겁니다. 

같은 예로 가난의 고통도 전에 그것을 거부하고 못 견뎌 할 때는 고통이 컸는데 프란치스칸 영성을 배워 가난을 진정 사랑하게 되면 가난 때문에 오히려 마음은 행복하지만 사는 것은 여전히 고달프겠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서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하심(下心)의 행복을 알아 스스로 낮아지고 섬기게 되면 높아지려고 하다가 낮아졌을 때의 고통은 사라지고 마음은 평화롭지요. 

그러니 죄악이 아닌 한 원치 않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을 원하게만 되면 마음은 평화롭게 행복한데 관건은 어떻게 모든 것을 원하게 되느냐 그것입니다. 

제 생각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고통마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더 완벽한 것은 하느님 사랑 때문에 고통마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일컬어 라틴말로 Passio라고 하고 영어로 Passion이라고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Passio가 Passio Christi 곧 그리스도의 수난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당신이 원하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죽음 곧 사람들을 위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을 오늘 주님의 종의 노래인 이사야 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아버지의 뜻은 주님이 으스러지고 병고에 시달리며 수난하는 것인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에 고통을 당해도 흡족하고 덕분에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게 되니 더욱 흡족해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으스러지고 병고에 시달리는 것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럴지라도 주님처럼 마음 흡족한 우리가 되라는 과제를 오늘 받아 안은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능력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마지막 때에 당신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럴 수 있다고 확고한 의지를 다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저는 이전에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오른편과 우편에 앉는 것도 당신이 정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리고 능력이 있고 의지가 있는 사람을 더 높은 자리에 앉혀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미 그 자리에 정해진 이들이 있다니?’

그런데 살다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사람, 혹은 그 자리에 합당하다고 원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았을 때 항상 이런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구관이 명관이다!”

특별히 전임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하던 이들은 전임보다 더 안 좋은 행태를 보이곤 했습니다. 결론은 자신이 그 자리에 합당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그것 때문에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내가 어떤 집에 초대받았을 때 주인은 어디에 앉으시라고 이미 자리를 정해놓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내가 그 자리에 앉기에 합당하다고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면 자기는 주인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나라건, 회사건, 성당이건, 내 것이 있습니까?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주님께서 정해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당연히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여기는 이는 무엇을 운영하던 하느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할 공산이 큽니다. 따라서 자리가 주님에 의해 정해지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자리에 앉히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노력하는 만큼, 능력 있는 만큼 자리를 인정받아야 한다? 이는 겸손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생각입니다. 

만약 어떤 여자가 엄청난 자기관리로 어마어마한 돈과 재능과 능력을 보인다면 그 여자가 연애를 위해 남자를 고른다면 그렇게 선택된 남자들과 태어난 자녀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재산이 약 5천억 원에 달하는 미국 할리우드 배우이자 가수인 제니퍼 로페즈는 17년 전에 헤어졌던 벤 애플렉과 재결합했다고 합니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싶지만 제니퍼 로페즈는 벤 애플렉과 재결합하기 전에 이미 3번의 이혼과 2번의 파혼 경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빼고는 4번이 모두 남자의 외도로 헤어진 경우입니다. 그러면 제니퍼 로페즈가 외도하는 남자들만 사귄 것일까요? 어쩌면 남자들이 제니퍼를 부담스러워했던 것은 아닐까요? 

제니퍼 로페즈는 1969년생으로 작은 섬나라 푸에르토리코 출신입니다. 5세가 넘었지만, 미국 슈퍼볼 하프타임에서 봉춤을 공연할 정도로 열정이 넘치고 완벽한 무대를 소화해 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힘들게 성공한 커리어를 놓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철저한 자기관리를 넘어서서 완벽한 무대를 위해 백댄서나 스태프들에게 무례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고 합니다. 

90년대만 하더라도 라틴계 여배우의 역할은 매우 한정적이었는데 로페즈는 자신의 노력으로 라틴계 처음으로 출연료 100만 달러를 받는 여배우가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가수로 데뷔한 것은 1999년 30세가 넘은 나이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영화계와 음악계의 디바로서 우뚝 선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백댄서와 코러스를 하며 라틴계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스타가 되겠다는 꿈 때문에 그녀는 집에서 쫓겨나 댄스 학원에서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고생을 하고 수모를 견뎌내며 버텨왔다는 일화들은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로페즈는 엄청나게 연습하고 관리하고 노력하는 일 중독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에 대한 상급이 ‘관계’에까지 미친다고 여기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 앞에서는 남자들은 스스로 한없이 작아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로페즈가 바람을 피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남자를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가질 수 있다고 여긴다면 남자는 버티기 힘들 것입니다.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고 또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나고 있는 유명인, 어쩌면 우리도 내가 노력하면 저 사람과 결혼하거나 저 자리에 당연히 앉아야 한다고 여기며 사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결혼이나 교회에서 어떤 자리에 앉는 것은 주님께서 정해주시는 것이라 믿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그 자리에 앉은 것이고, 내가 하면 더 잘할 것 같고, 내가 저 사람을 선택해서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관계 내에 주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이 말은 ‘교만’이 바탕이 된 관계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섬기는 마음이 없으면 상대의 교만으로 좋은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나 자리를 유지하는 힘은 ‘겸손’입니다. 그런데 그 겸손은 내가 노력해서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거나 혹은 내 능력으로 이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교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정해주셨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교황님이 가장 많이 탄생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분들은 교회에 큰 오점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다 주님의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최근 성인이 되신 두 교황은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성 요한 23세이시고 그 공의회를 실현하기 위해 사셨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입니다. 교황 23세는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도 그분이 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것은 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폴란드인 교황이라는 것은 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본인들도 원하지 않았던 자리에 앉은 두 교황은 현대사의 큰 획을 긋는 분들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느님의 시각으로 지금 그런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있다면 그것은 잘된 일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제가 되면 본당신부보다 잘할 것처럼 여기며 비판하는 사람은 관계나 자리가 인간의 능력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는 무신론자와 같습니다. 

모든 관계와 자리의 주인을 하느님으로 믿읍시다. 그래야 겸손하게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교회가 분열되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선거처럼 우리 교회도 그렇게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마티아 사도는 제비뽑기로 뽑았습니다. 관계와 자리에서 나는 섬기는 종의 모습인지, 하느님을 밀어내고 내가 주인이 되려는 모습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물에 빠진 사람을 함부로 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

 

물에 빠진 사람을 함부로 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어설프게 수영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 들었다가는 함께 물속으로 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조대원을 부르거나 도구를 이용해서 구해야 합니다. 만약 구조대원도 없고 도구도 없다면 물에 빠진 사람의 힘이 완전히 빠졌을 때만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생각해보니 그럴 것 같습니다. 인명구조대원 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데 그냥 단순히 필기시험만 보고 나서 자격증을 받겠습니까? 당연히 힘도 있어야 하고 또 기술도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오랜 시간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그냥 자고 일어나니 힘과 기술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도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도울 힘과 기술을 스스로 갖췄을 때 가능합니다. 단순히 좋은 마음만으로는 오히려 서로 힘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힘과 기술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실천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그런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착하고 선한 마음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는 청을 합니다.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이 마시는 잔을 마시고, 당신이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시지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을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즉, 죽음을 넘어서는 노력으로만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도 당신의 허락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여기서 인상 깊은 또 다른 장면은 야고보와 요한의 청에 대한 다른 제자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불쾌한 감정을 갖습니다. 
 
세상의 영광과 하늘 나라의 영광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원칙이 아닌, 하늘 나라의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그 원칙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주님을 본받아 사는 것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시금 주님의 뜻을 따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히브 4,16)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사실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 스피노자

 

 

잘하고 열정도 생겨나는 일을 합시다.

 

잘하지만 열정이 생기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마지못해 살기 위해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자기 일에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잘하고 열정도 생겨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원의 심리학자 에이미 프제스니에프스키 팀은 병원에 따라 청소부들이 자기 일을 어떤 식으로 경험하는지 연구했습니다. 
 
한 병원 청소부들은 자기 일이 특별히 만족스럽지 않고,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일을 직무 설명서 읊듯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병원 청소부들은 자기 일을 즐기고, 이 일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청소 외에도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환자가 힘들어하는지, 방문객이 줄었는지, 그들과 더 자주 대화하려 안부를 묻는다고 했습니다. 
 
잘하고 열정을 생기게 하는 일은 자신의 관심과 노력에 따라 결정됩니다. 자기 일만 한다면 의미를 찾기 힘들지만, 관심의 세계를 넓히고 사랑으로 나설 때 최고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일은 어떤가요? 할 일만이 아닌 더 넓고 큰 사랑의 실천에 잘하는 것은 물론 열정적인 최고의 일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 10, 45)

 

진짜 가을은 온통 불타오르다 떨어져내리는 십자가의 뜨거운 가을이다.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보며 사는 우리들 삶이다. 목숨 너머에 있는 참생명을 아직도 볼 줄 모르고 사는 우리들이다. 

목숨을 바치러 오신 예수님이시다. 당신의 목숨으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신다. 우리를 대신하여 기꺼이 죽으신다. 우리대신 몸값을 치르신다. 속죄 제물이 되신다. 예수님께서 몸소 제물(祭物)이 되신다. 

참된 사랑은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이시다. 당신의 목숨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당신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사랑이다. 내어주는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참된 믿음이다. 

목숨까지 바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우리를 새롭게 탄생시키신다. 진짜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죽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의 역설이다.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매일매일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이다. 진짜 사랑에 감사드리는 은총의 주일이다. 목숨 바치는 사랑의 빛이 눈부시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를 위해 목숨 바치시고 내놓으시는 사랑이다. 그 사랑이 사랑을 치유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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