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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21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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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

 

 

2021년 10월 21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고,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시며, 한 집안의 식구들이 갈라져 맞서리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21일 (목)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6장 19-23절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2장 49-53절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현세에서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우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21일 (목)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21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불’과 ‘분열’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구약에서부터 불은 하느님 심판의 도구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퍼부은 불이 그러하였고(창세 19,24 참조), 오십인대장과 그 부하들을 삼켜 버린 엘리야의 불이 그러하였습니다(2열왕 1,10-14 참조).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릴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루카 9,54 참조). 이처럼 불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불은 심판의 의미만 지니지 않습니다. 불에 타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었고(탈출 3,2-3 참조), 병들거나 해로운 것들을 태워 정화하기도 하였습니다(레위 13,52 참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구원이었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심판의 의미만이 아니라 구원의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반대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이지요. 모든 것은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분열은 대개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분열의 의미는, 혈연이 아닌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 공동체를 이루려는 ‘가치의 전환’입니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가족 공동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기준으로 구성원들이 모인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붙이신 불, 그 불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심판의 불인가요? 아니면 하느님 안에서 가슴 뛰게 만드는 열정의 불인가요? 예수님을 우리 삶 한가운데에 모실 때, 우리는 마음에 구원의 불을 안고, 분열이 아닌 일치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거짓 평화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평화를 주러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주러오셨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불을 지르러 또한 오셨다고 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여기서 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르시는 거라면 그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말에 화가 있는데 한자어로는 분노라고 하지요. 화가 지글지글 끊는다는 표현도 우리말에는 있지요. 그런가하면 분노의 불꽃이라는 말도 있고 분노가 타오른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세상의 불의에 대해 정의로운 분노의 불을 지르러 오신 것이요, 분노의 불이 타오르기를 원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몇 년 전 광화문 광장에서 타올랐던 분노의 촛불 같은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 거대한 불의가 조직적으로 자행되면 이런 불의는 한두 사람의 힘으로 끝장낼 수 없기에 폭력적이지만 않다면 분노가 들불처럼 타올라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불이 성령의 불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받아야 할 세례도 성령의 세례이고요. 

주님께서는 성령의 불을 지르시어 그 불이 타오르게 하시느라 성령의 세례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왜냐면 분노의 불은 홧김에 집에 불을 지르듯 다른 사람은 태우되 자기는 태우지 않지만 주님의 불은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처럼 당신을 바쳐 세상과 우리를 불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의 성전정화의 모습을 보며 "당신 성전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 말씀을 떠올렸듯이 이 때 주님의 거룩한 분노는 당신을 바쳐 하느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하려는 열정과 사랑의 다른 이름이지요. 

세례가 자기 죄를 씻는 거라면 주님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없지만 그런데도 굳이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고 하심은 천주의 어린양처럼 당신을 바쳐 세상의 죄를 씻으시는 성령의 세례는 받으셔야 한다는 말씀인 거지요. 

그리고 성령은 사랑이시기에 하나가 되게도 하지만 갈라지게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일치도 가져다주지만 분열도 가져다주기에 성령의 주님은 일치/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것은 포용하지만 틀린 것은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잘못된 사랑은 다른 것은 배격하고 틀린 것과는 타협하지요. 

우리는 가끔 다른 것은 틀렸다고 하면서 포용하지 못하고, 틀린 것 그래서 정작 반대하고 배격할 것은 분열이 두려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타협하며 거짓 평화를 유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세례도 받고 성령의 불도 질러야 할 우리, 다른 것은 포용하되 틀린 것은 반대하고 배격해야 하는 우리, 거짓 평화는 배격해야 하는 우리여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령의 불이 붙으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를 일러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하시며,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라고도 하십니다. 당신의 세례를 통해서 세상에 불이 질러진다는 뜻입니다. 

‘불’은 ‘빛’이 되기도 하고 ‘나를 태우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불을 받으신 분답게 당신이 짓눌러져야 함을 예상하십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수님의 세례로 불이 붙어진 이들은 이전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족과도 세상과도 분리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중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단편영화로 제작한 것이 유튜브에 올려져 있습니다. ‘44번 버스’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중국의 어느 시골길에서 한 청년이 2시간 가까이 기다려 44번 버스를 탑니다. 

버스 운전자는 예쁜 여자입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가던 버스는 몸이 아파 보이는 두 사람을 발견합니다. 착한 운전자는 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버스에 태웁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변합니다. 강도였던 것입니다. 칼로 위협하며 버스에 탄 사람들에게 금품을 갈취합니다. 버스 안에 남자들도 많이 타고 있었지만 다치기 싫어서 모두 고분고분 가진 것을 다 내어줍니다. 

그들은 할 일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립니다. 내리다가 운전자의 얼굴을 보고는 운전자를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성폭행하려는 것입니다. 버스에 탄 남자들은 그런 상황에서 힘을 합치면 강도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말리고 어머니가 말려서 누구도 운전자를 도와주지 못합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탔던 그 청년만이 밖으로 뛰어나가 싸웁니다. 그러다 칼을 다리에 찔립니다. 

여자 운전자는 심한 폭행을 당하고 다시 버스에 탑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승객들을 노려봅니다. 이때 절뚝거리며 청년도 버스에 다시 타려 합니다. 그러나 운전자는 그 청년의 가방을 밖으로 던져주고는 문을 닫고 출발합니다. 청년은 어리둥절합니다. 도와주려 피까지 흘린 자신만 태우지 않고 떠나버리더니!

나중에서야 청년은 알게 됩니다. 그 운전자는 길을 가다 높은 다리에서 버스를 추락시켰습니다. 자신과 함께 버스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사망하였습니다. 

세례 때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은 ‘은총과 진리’입니다. 진리는 마치 빛과 같아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그리고 은총은 그렇게 행동하도록 힘을 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불’이라고 언급하신 것이 바로 ‘진리’이고, 짓눌리게 만드는 ‘압력’이 바로 은총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어 은총을 받았기에 생전 모르는 형제까지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여자 운전자는 세례를 거부했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 중 유일하게 그녀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청년밖에 없었습니다. 청년은 생판 모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그렇게 하도록 압력을 가합니다. 운전자는 그 부담스러움 때문에 그를 태우지 않습니다. 세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리를 위해 은총과 진리를 쏟아내신 분이십니다. 만약 그분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분이 하신 일을 보고 또 그분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그분처럼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을 거부한다는 말은 그분처럼 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버스 운전자처럼 됩니다. 

버스 운전자는 그 부담스러운 남성을 받아들여 자신도 똑같이 아무 잘못도 없이 피를 흘리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버스에 탄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바로 피 흘림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청년을 받아들였다면 마치 깨가 열과 압력으로 기름이 짜이듯 자신도 버스에 탄 승객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위해 피를 흘린 그 사람까지 함께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내 안에 태우는 것이 세례입니다. 피 흘리시는 그리스도를 태웠다는 증거는 나도 누군가를 피 흘리게 한 사람이기에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는 세례를 받고도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이는 실제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빛과 열로 우리를 당신처럼 살도록 강요하십니다. 그 첫 열매가 ‘용서’인 것입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체험한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브라디는 수녀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수녀님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브라디의 빛이 되고 압력이 됩니다. 수녀님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은총과 빛을 받아들였고 자신도 그렇게 불과 압력으로 기름이 짜이듯 죽었습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세례를 부르고 용서는 용서를 부릅니다. 이 시작이 세례가 되는 것이고 세례를 받았더라도 누군가 용서가 안 된다면 나는 예수님을 내 버스 밖에 내려놓은 것이 됩니다. 그렇게 불타고 있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 세례명은 마태오, 별명은 빠다킹입니다.

 

제 세례명은 ‘마태오’입니다. ‘빠다킹’을 세례명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있는데, 이는 별명일 뿐입니다. 
 
사실 어렸을 때 이 세례명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멋진 외국말 같은 세례명도 참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그레고리오, 프란치스코, 헨리코 등의 멋진 세례명도 많은데 우리나라 이름과 비슷한 ‘마태오’라는 세례명을 부모님께서는 왜 정하셨을까 싶었습니다.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기에 제 뜻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세례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간 뒤, 마태오 성인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주보 성인을 따라간다는 말처럼 저는 마태오 성인처럼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신 모든 모범이 제게는 정말로 커다란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멋진 이름이 중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멋진 이름보다는 멋진 삶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도 멋진 이름을 가지고 엉망으로 사는 것보다, 어떤 이름이든 상관없이 멋진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응원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멋진 이름이 더 중요한 것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멋진 삶을 사는 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참 진리의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이 불은 어떤 불일까요? 아마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노력’이 이 불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 노력은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에 잘 보이는 세상의 법칙에 더 관심이 많고, 이를 철저히 따르려고만 합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 착각합니다. 
 
남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면서 재물을 모은다고 행복할까요?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라면서 각종 비리를 저지릅니다. 마음이 편안해질까요? 
 
주님의 법칙은 세상의 법칙처럼 겉으로만 멋지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법칙을 따르는 사람이 ‘바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라는 비판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큰 분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평화가 아니라 분열이 일어날 것입니다. 
 
분열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법칙보다 주님의 법칙을 따르면서 주님 마음에 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멋진 삶입니다. 
 
주님의 관점을 철저히 따르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나누어 주는 만큼 자신의 행복도 커진다.

- 제러미 벤담

 

 

신앙도 안정 괘도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비행기가 사고 나는 구간은 이륙할 때의 3분과 착륙할 때의 8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구간을 마의 11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착륙할 때의 사고는 조금 이해되기는 합니다. 날다가 땅에 착륙할 때의 충격이 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금의 실수가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륙할 때의 사고는 왜일까요? 
 
모든 엔진을 한꺼번에 가동해 폭발력을 내어 하늘을 나는 것이었습니다. 일정 고도에 이르면 6개의 엔진 중에서 2개만 가동해도 비행기는 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엔진이 켜지는 이륙 직전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비행기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비행기가 어느 정도의 고도에 이르러야 안정적으로 비행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어느 정도의 괘도에 이르기까지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 안에서 커다란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금의 노력만 하고서 힘들다고 또 어렵다고 포기한다면 안정된 신앙생활이 아닌 불안정한 신앙생활로 큰 혼돈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노력하며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아무런 노력 없이 받기만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루카 12,49) 

 

물들이며 타올라야 할 때 타오르는 것이 대자연의 섭리이다. 소멸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자아 중심을 벗어나게 하는 신앙의 불이 우리에게로 왔다. 신앙의 불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뜨겁게 일깨워준다. 

예수님을 모르기에 삶을 모르는 것이다. 시들어버리는 삶이 아니라 타오르는 사랑의 삶이다. 마음이 죽으면 신앙또한 죽는다. 죄인은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용서의 불이 사랑의 불이 이미 타오르고 있다. 타오르는 삶은 변화의 삶이다. 

변화된 삶이란 타오르는 실천의 삶이다. 타오르는 아픔 없이 아름다울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복음은 우리들이 가야만 하는 아름다운 길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께로 가는 사람의 길이다. 삶의 새로운 변화인 뜨거운 마음이 필요한 우리 삶의 자리이다. 

삶의 자리에서 뜨겁게 아름답게 타오르는 단풍의 불길이다. 이것이 삶의 행복이다. 행복이란 십자가를 통한 변화의 여정이다. 이 타오르는 여정을 오늘도 걸어가는 창조의 십자가 창조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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