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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24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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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0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0주일 -

 

 

2021년 10월 24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전교주일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교회는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와 전교 지역의 교회를 돕고자 1926년부터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일의 앞 주일을 ‘전교 주일’로 정하여, 신자들에게 교회 본연의 사명인 선교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오늘 전교주일의 특별 헌금은 교황청 전교회로 보내 전 세계 전교 지역의 교회를 돕는데 사용합니다.

 

 

✠ 오늘 제1독서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모든 민족들이 밀려드는 환시를 봅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24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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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2장 1-5절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밀려들리라.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주님은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주님은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은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주님은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로마 10장 9-18절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28장 16-20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그런데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24일 (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24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가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된 복음서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주목할 점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를 지닌 ‘임마누엘’로 소개한다는 것입니다(마태 1,23 참조). 

복음서의 시작과 함께 ‘임마누엘’로 불린 예수님께서 복음서의 마지막에 당신을 ‘임마누엘’이라고 밝히십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선교 사명을 깨닫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설명하고 그들을 교회로 이끄는 것이 전교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전하고 선포하는 우리 자신이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가 뿌리는 전교의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전교의 시작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일에만, 성당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오늘은 전교를 위하여 삶을 봉헌한 선교사와 그들이 활동하는 교회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과 그들의 공동체를 기도 가운데 함께 기억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선교사적 사랑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전교 주일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데 즉시 든 생각은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원하더라도 구원받도록 실제로 복음을 전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렇게 도발적인 질문을 할까요? 실로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없거나 줄어들고, 구원을 위해 선교를 하고자 하는 사람도 참으로 적기 때문입니다. 

제가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다음달이면 위령성월인데 옛날에는 이 위령성월에 부모나 조상들을 위한 연미사 봉헌이 많았는데 요즘 점점 줄어들고, 평사시에도 부모를 위한 연미사보다 자녀들을 위한 생미사가 더 많습니다. 

물론 이것은 치사랑과 내리사랑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영혼의 구원보다는 현세의 복을 더 바라는 표시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두 겹의 문제가 같이 있습니다. 사랑이 영혼의 구원보다는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쪽으로 기우는 것과, 보편적인 사랑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협소한 자기와 가정에 갇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선포하는 사람이 되려면 선교사적인 사랑을 지녀야 하는데 선교사적인 사랑이란 나와 우리 가정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뜻에서 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제가 선교사적인 사랑을 얘기하고 있지만 저도 미국에 살다가 오기 전까지 선교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제가 우리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할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외국생활이나 선교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복음이 우리나라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사실 10대 때는 복음이 우리나라가 아니라 저 자신 안에 갇혔고 25살이 넘어서야 겨우 나를 벗어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저의 복음 선포가 아직 우리나라에 갇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미국생활을 하면서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고, 특히 외국에서 우리민족을 보면서 북한의 복음화를 생각게 되었으며, 북한 복음화를 위해 일하다가 중국과 러시아, 일본으로 차츰 확장되었고, 이제는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 와 있는 이주민들에게로 향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여기 선교 협동조합>과 <여기 국밥>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자주 자신 안에 갇히고, 자기 가족과 나라와 민족에 갇히는데 우리의 사랑이 모든 사람과 나라와 민족에게로 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이나 독서나 전례 기도문을 보면 '하느님 백성', '모든 사람/만민', '모든 민족'과 같은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 '나' 또는 '나의'가 '모든'과 '하느님의'로 바뀌는 것이 선교사적 사랑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초대 교회 전교의 패러다임 : 특별하면서도 오를성싶은 나무가 돼라!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전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내가 먼저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좋은 것은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대부분 더 믿는 사람에게서 옵니다. 사제가 이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렇다면 전교는 이 ‘믿음’을 갖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는 전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보면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요? 믿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을 주려는 것이 전교는 맞지만 바로 믿음을 주려고 하면 사람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납니다. 

‘최고의 스타들은 왜 키가 작을까요?’ 『언씽킹』이란 책에 나온 소제목입니다. 2008년 미국에서 수입이 가장 많았던 10명의 배우를 봅시다. 

1. 해리슨 포드
2. 애덤 샌들러
3. 윌 스미스
4. 에디 머피
5. 니컬러스 케이지
6. 톰 행크스
7. 톰 크루즈
8. 짐 캐리
9. 브래드 피트
10. 조지 클루니

배우로서 ‘주연’이란 말을 떠올리면 키 크고 조각처럼 잘생긴 외모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여기 거론된 주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중에서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은 니컬러스 케이지뿐입니다. 그런데 니컬러스 케이지가 조각 미남인가요? 조각 미남이라 한다면 톰 크루즈나 조지 클루니를 들 수 있겠습니다. 조지 클루니는 178cm이고 톰 크루즈는 176cm입니다. 물론 저보다야 다 크지만, 서양인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키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말론 브랜도, 멜 깁슨, 로보트 드니로, 알파치노, 슬베스터 스탤론, 숀 팬, 맷 데이먼 등의 평균 키는 175cm입니다. 

우리나라 BTS 평균 키가 177.3cm입니다. 유일하게 RM만 181cm이고 나머지는 평균 175cm인데 모두가 사랑합니다. 우리나라 배우들도 보면 키가 키면 얼굴이 좀 만만하고 얼굴이 좀 부담스러우면 키가 만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180cm인 송강호 씨는 키가 크지만, 얼굴은 조각 미남이 아니고 이병헌 씨는 미남이지만 키는 좀 작습니다. 
여자는 어떤 여자들이 매력 있을까요? 분명 솔직해서 자신을 다 드러내는데 또 뭔가 신비감을 감춘 여자입니다. 그냥 한 번 만났는데 다 알 것 같은 여자는 매력이 없습니다. 남자도 특별한 것을 꿈꾸고 누군가를 만날 때 특별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신 부담스러우면 안 됩니다. 오르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면이 있으면서도 백치미까지 있다면, 그래서 ‘가능할 거 같은데?’라는 마음을 주는 여자가 가장 매력 있습니다. 

종교는 분명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르지 못할 나무만 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오르지 못할 나무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만 강조하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사람들에게 이것만 강조한다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불친절한 복음 전파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살기 부담스러운 나라에서 내 아이도 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특별합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나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화해서 우리나라에 살려면 어떨까요?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냥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게 낫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살기 부담스럽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스스로가 엄청난 경쟁을 시키며 한국인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이상한 의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열등감이 있으면 자신 안에 있는 하나의 특징만을 강조하며 그것만을 부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 매력적으로 되려면 그냥 큰 사고 안 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부자가 아니면 무시당하는 문화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매력적인 나라가 되면 자녀도 많이 출산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냥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그냥 어울려 사는 것을 ‘친교’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럽지 않은 공동체가 무엇일까요? ‘가족’입니다. 가족이 부담스러우면 그 사람은 어디에도 속할 용기를 얻지 못합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이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리만치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아버지!”란 믿음만 강조할 게 아니라 우선은 모든 사람이 어울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어머니, 형제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게 우선입니다. 이것이 오를성싶은 나무가 되는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서로 친교를 이루며 사랑하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 당신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때 사람들은 성체성사를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가진 것을 나누고 주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 했을까요? 성경에서 초대 교회 선교모델을 한 번 살펴봅시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 2,43-47)

일단 성직자들이 ‘놀라운 일과 기적’을 일으켜야 합니다. 물론 성사 거행보다 더 큰 기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친교’여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을 모아 친교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사제들의 몫입니다. 그 친교는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이 바탕이 됩니다. 이를 위해 성사가 존재합니다. 성사는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위해 자기 피를 흘리게 해줍니다. 이런 친교의 행복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교회여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맺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세상에 ‘매력을 발산’합니다. 누구나 친교의 행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겸손해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보고 들어와 ‘신도들의 모임이 커집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전하는 선교 방법이었습니다. 현재 성당에서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형제들 간의 친교를 이루는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교적 인원에 비하면 매우 작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냉담자를 말할 때 3년에 한 번 ‘고해성사’ 한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고해성사하고 성체성사 하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기적을 통해 ‘친교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사의 목적이 친교입니다. 형제간의 친교를 지향하지 않는 성사는 어쩌면 방향을 잃고 무조건 달리는 자동차에 기름을 계속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전교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 있을 수 없듯, 믿는데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서 형제간의 친교로 참으로 행복하고 그 공동체가 구원의 백성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너지를 채우는 것에만 목표를 두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면 열심히는 하는데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먼저 특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성사입니다. 성사 때문에 교회는 특별합니다. 하지만 성사만 강조한다면 교회의 특별함보다는 오르지 못할 나무로 보일 수 있습니다. 특별하게 만드는 것과 특별함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할 수 있어도,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누가 부담스러운 사람과 사귀고 싶겠습니까? 자신을 성장시켜 줄 특별함은 갖추어야 하지만 성사만 강조하며 부담을 주는 그냥 특별함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960년 펜실베니아 중부에 있는 로제토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단 것을 좋아하고 기름기 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며 술과 담배를 즐기고 녹초가 되도록 일했으며 비만도 흔한 이 마을에서 거의 심장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수 마을은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사람들의 정착촌이었습니다. 그 마을은 계층이 없는 소박한 사람들이었으며 따듯하고 친절한 가족과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바로 건강과 장수에도 직결된다는 의미로 ‘로제토 효과’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 중의 하나는 냉담자를 정할 때, 성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닌 공동체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해야 합니다. 적어도 한 성당 공동체에서 친교를 나누는 사람에게 신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가야 합니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가 없다면 어쩌면 교회도 우리나라 인구가 줄어들어 결국에 사라지는 길로 가는 것과 같은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성체가 아닌 공동체가 선교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제삼자로서는 너무 고되고 힘든 시간처럼 보이는 데도 기쁨을 가지고 그 시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저보다 더 힘드신 분도 많은데, 저만 힘들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어요?”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언젠가 읽은 책을 통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물리학자 스테판 클라인에 따르면 힘든 시간을 받아들이면 그 기억은 더는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험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면 전뇌의 영역이 편도체를 통제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억제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감정이 있어야 문제 해결에 긍정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렵고 힘든 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집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모욕과 치욕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도 이를 긍정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신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기에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소집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직접 만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의심하는 그 모습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제자들의 의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담겨 있는 복음을 접합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말씀을 따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십니까? 그보다 사회의 법칙을 따라야 더 현명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회의 법칙에 충실할 때, 우리는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때 주님께 대한 의심도 생기게 됩니다. 이런 부정적 감정이 자신을 어떻게 만들까요? 문제의 크기를 계속해서 만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법칙에 충실한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는 말씀으로 사랑을 멈추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긍정적인 감정으로 지금을 사시길 바랍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고독이란 당신이 당신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는 실험실이다.

- 마거릿 뮬락

 

 

나의 미래에 대한 희망

 

어느 한 부족의 추장이 자신의 후계자를 뽑기 위해 부족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 세 명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산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져온 사람에게 추장직을 물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세 사람은 곧바로 산에 오릅니다. 
 
시간이 흘러 한 명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귀한 약초를 가져왔습니다. 두 번째로 도착한 사람은 산봉우리 꼭대기에서 뜯은 푸른 이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는 빈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부족의 미래를 보고 가슴에 담아왔습니다. 이는 바로 언덕 너머의 옥토입니다. 제가 추장이 된다면 그 넓은 옥토를 바탕으로 부족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추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미래에 대해 희망을 꿈꾸는 자가 바로 추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희망과 미래는 중요합니다. 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어떤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 20)

 

모든 민족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가장 아름다운 진리가 복음이다. 복음과 봉사는 분리될 수 없다. 봉사가 가장 적극적인 복음의 모습이다. 복음은 모든 민족들을 향한 참된 봉사로 드러난다. 이와같이 복음은 봉사와 공동선의 추구로 우리를 초대한다. 전교는 신앙인들의 본래적 소명이다. 

소명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집과 교만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나누는 것이다. 건강한 삶의 나눔이 진정한 전교이다.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일이다. 전교는 일방적이지 되어서는 아니된다. 

참된 전교는 배려와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쌍방적인 사람의 소통이다. 서로를 통해 서로를 위한 우리의 복음화이다. 복음화는 이 시대에 필요한 서로간의 위로와 정화이다. 전교는 거창한 구호가 아닌 생활 속의 참된 실천이다. 올바른 생활의 실천이 바로 전교이다. 

우리의 전교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게된다. 복음화의 미래는 복음화에 있다. 복음화는 올바른 삶의 나눔이다. 나눔의 한가운데에 계시는 주님이시다. 나눔은 전교의 시작이며 힘찬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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