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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
2021년 10월 26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자라서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이는 겨자씨와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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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로마 8장 18-25절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18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21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화답송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네.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네.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네.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네.
복음
루카 13장 18-21절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체성사의 은혜를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26일 (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26일 (화)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맨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작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닌 힘까지 작은 것은 아닙니다. 작은 씨앗이 나무가 되고, 또 누룩은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시는 이유는 하느님 나라가 지닌 역동성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누룩이 부풀어 오르려면, 겨자씨를 땅에 심고,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이 지닌 역동성이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홀로 만들어 가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당신 나라를 완성하시는 데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과 인간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건설과 완성을 위하여 오늘도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에 역동성을 부여하시고,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씨앗이 심어지지 않고 누룩이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것이 지닌 역동성은 결코 발휘될 수 없습니다.
부족한 신앙을 지녔지만, 하느님보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더 따르고 싶은 우리지만, 그런 우리의 손길을 하느님께서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꿈과 희망입니다. 그분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의 보잘것없는 힘이라도 보태고자 노력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곁에 세워지고,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희망의 차례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는 지금까지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얘기하더니 오늘은 희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얘기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믿음만 구원의 요소가 아니라 희망도 구원의 요소라는 얘기인데 믿음과 희망만 구원의 요소이겠습니까? 사랑도 구원의 요소이고 사랑이 제일 중요한 요소이지만 오늘은 희망과 구원을 얘기하는 것일 뿐이지요.
'희망은 있어'라는 말과 '어디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말을 쓸 때 우리는 언제 이런 말을 씁니까?
정말로 희망이 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희망이 없을 때 쓰지요. 희망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을 때 그리고 대부분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희망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사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희망이 없는 것이고, 대부분 그런데도 희망을 보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망을 보는 사람도 보이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지 못하는 대부분에게처럼 그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 보는 것이고 이 때 희망이 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런 희망을 보고 가능성을 봅니까? 그도 과거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절망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때도 오늘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보니, 다시 말해서 인내의 시간이 지나니 희망이 나타난 경험이 있는 사람, 이런 절망 체험과 희망 체험을 모두 한 사람이 희망을 또 보는 거지요.
이것이 인간적인 체험이라면 신앙 체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없었지만 그런데도 인간에게 희망이 없기에 오히려 하느님께 희망을 걸었더니 인간적으로 전혀 불가능하던 것이 이루어진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암이 너무 전개되어 서양 의학에서는 손을 들면 우리 인간은 어쩔수없이 한의나 자연 치유에 희망을 걸게 되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께 희망을 걸게 되지요.
의사가 희망이 있다고 하면 의사에게 희망을 걸지만 의사에게 희망이 없을 때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데 의사에게 절망할 때 그때서야 희망의 차례가 하느님께도 간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의 차례가 있습니다.
가까이 믿었던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멀리 믿을만한 사람에게로, 그 사람에게서 더 유명하고 그래서 더 믿을만한 사람에게로, 그리고 마침내는 인간에게서 하느님께로 희망의 차례가 있는데 실망과 절망의 차례에 따라 희망의 차례가 있는 것이고, 차례차례 다 절망한 끝에 하느님께 희망의 차례가 가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복음 얘기와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겨자씨가 아무리 작아도 거기에 큰 나무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 믿기에 자기 정원에 정성껏 심는 사람에게 겨자씨는 큰 나무가 되듯 하느님 나라도 겨자씨와 같음을 믿고 자기 정원에 심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하느님 나라 건설이 지금은 비록 겨자씨처럼 작고 형편없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 미미한 시작이 큰 결실을 거두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의 씨앗을 자기 정원 곧 마음에 심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 나라와 파스카 : 겨자씨는 양의 살, 누룩은 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전하려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비유로 설명해주십니다. 우선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겨자씨는 나무로 자라서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늘의 새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쉴 곳을 찾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겨자나무’는 그 사람을 맞아들이기 위해 내가 참아내야 하는 무엇일 것입니다. 그냥 그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가 져야 하는 그 사람의 십자가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참사랑은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십자가를 내 심장에 박게 하는 것입니다.
몬테팔코의 십자가 글라라 성녀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자신 안에 머물도록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슬픈 얼굴로 걸어가시자 글라라 성녀는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요즘엔 내가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구나!”라며 탄식하십니다. 그러자 성녀는 “제 심장에 당신의 십자가를 꽂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녀의 심장에 당신의 십자가를 꽂습니다.
성녀는 20대 초반에 탈혼 중에 돌아가시는데 그녀의 심장에서는 예수님 수난 도구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800년이 지난 지금도 썩지 않는 이 심장과 몸을 우리는 아직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뤄진 사람은 이렇게 사람들이 그 사람 안에 십자가를 꽂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줍니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 사람이 진 십자가를 꽂을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나로 가득 차 있다면 공간이 없어 누구도 쉬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진리와 은총으로 우리를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으로 만드십니다.
하지만 마음이 내 욕심으로 꽉 차 있다면 어떻게 십자가를 내어줄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래서 누룩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룩은 밀가루 서 말에 들어가 그 밀가루를 부풀게 합니다. 부풀게 만든다는 것은 그 안의 ‘공간’을 확장하게 시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신 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광야에서 세 유혹을 이기셔야 했습니다. 그 유혹은 돈과 육욕과 교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그것을 이기셨습니다. 그 결과 당신 안에 하느님과 이웃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과 쾌락의 마음, 그리고 이웃을 심판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누가 들어올 공간을 주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렇듯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역할은 내 안에서 죄를 없애고 하느님과 이웃을 받아들일 공간이 생기게 합니다. 그러면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CPBC에서 방영된 ‘향심기도, 제10강 관상’에서 김귀웅 신부님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분은 성탄 때 다문화 가정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고 신자들이 나와서 그 인간 구유에 경배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신자들은 처음에 ‘왜 우리가 사람에게 경배해?’라는 마음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탄의 참 의미를 알게 되자 모두가 나와서 한 어머니를 성모님처럼, 한 아기를 예수님처럼 경배를 하고 들어가더랍니다.
만약 사람들 안에 여전히 ‘나는 다문화 가정 어머니와 아이를 성모님과 예수님처럼 똑같이 대할 수 없어!’라는 생각이 있다면 인간 구유를 경배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은총의 누룩으로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자아의 생각을 몰아내면 마음이 넓혀져 모든 이를 그리스도로 보게 됩니다. 사람은 다른 이들을 자신의 수준으로 봅니다. 본인이 모기면 이웃도 모기고 본인이 사람이면 이웃도 사람이며 본인이 그리스도이면 이웃도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확장하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넓힌 사람만이 겨자나무가 꽂힐 공간을 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김귀웅 신부님은 예도 들어줍니다. 한춘희 님의 ‘파스카의 주인 – 시어머님’이란 글이었습니다. 간추려보면 내용이 이렇습니다.
80세이신 시어머니가 서서히 치매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시아주버님은 어머니를 치매 전문시설에 모시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모두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때 남편이 우리가 어머니를 모시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한춘희 님은 고3인 쌍둥이 아들들이 있었지만, 그 의견을 고민 끝에 받아들였습니다.
우선 소리 지르고 문을 두드리는 것 때문에 소음이 걱정되어 아파트 10층에서 1층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제일 큰 방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가족들은 작은 방에 머물렀습니다. 며느리는 성당 활동에다 제과점을 운영하고 아이들 돌보며 어머님 식사는 끼니마다 새밥을 지어드렸습니다.
어느 날 새벽 1시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도둑이라며 몽둥이로 내쫓으셨고 또 어느 날은 거실에 보따리를 여러 개 묶어놓고 빨리 한 개씩 들고 따라오라며 6.25 전쟁 당시 배를 타고 피난 온 것을 재현하곤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가족들은 어머님을 따라 보따리 하나씩 들고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돌고 난 후 어머니를 업고 들어와 주무시게 해 드렸습니다.
모두가 지치고 힘든 상황이었지만 고3 아이들에겐 더욱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으시는 예수님이 바로 할머니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거야. 그러니 예수님으로 사랑해드리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일은 기적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주위 시어머니를 모시기를 꺼리던 두 가정도 시어머니를 모셨고 의견을 나누며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신자분들도 많이 도와주었고 신부님은 “여러분이 이 세상의 하느님 나라 증가자들이십니다.”라며 힘을 주었습니다. 봉성체 할 때면 어머니는 놀랄 만큼 맑은 정신으로 들어와 기도문을 외우셨습니다. 시누이들도 어머니를 뵈러 와서 어머님을 끌어안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갈 때는 고맙다며 냉장고를 가득 채워놓고 갔습니다. 어머니도 가끔 잠든 아들과 손자들의 이불을 덮어주고 방해가 될까 봐 거실에 혼자 나와계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3년 정도 고생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의 모든 일정을 다 마쳤을 때, 두 아들은 나중에 이 같은 상황이 오면 우리도 엄마 아빠처럼 할 것이라고 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어려움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무엇을 해 드린 것보다 받은 선물이 더 큰 것 같았습니다. 그 선물이란 바로 어머니가 모시고 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파스카의 주인이셨습니다. 이것이 가정을 하느님 나라로 만드는 방식입니다.
시어머니는 십자가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며느리 가족은 그 십자가를 꽂을 공간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힘은 기도 생활에서 왔습니다. 시어머니를 그리스도로 보는 진리와 그 힘을 은총의 성사 안에서 채운 것입니다. 이는 마치 피로 문설주를 바르고 집을 죽은 어린 양에게 내어준 파스카와 같습니다. 피를 문설주에 발라 마음의 문을 열고 영혼을 넓히는 일이 누룩의 역할이고, 그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를 거부하지 말게 하는 일이 겨자씨가 하는 역할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가 된 사람은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때문에 내 심장을 굳은 땅으로 내어줍니다. 이 역할이 누룩이 하는 것이고 그 누룩으로 공간을 내어줄 마음이 생긴 사람은 누군가의 십자가를 자기 심장에 꽂게 만들어 그 사람을 쉬게 합니다. 그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신비가 이뤄지면 곧 파스카의 실현입니다. 그 파스카를 실현하는 나라는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새 모이만큼 먹는다.
‘새 모이만큼 먹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게 먹는다’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새는 적게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몸집에 비해 엄청난 양을 먹는다고 하더군요. 몸무게가 3kg인 왜가리는 0.4kg짜리 물고기를 삼킬 수 있습니다. 이는 45kg인 사람이 음식 6kg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새는 신진대사가 활발하고 체온이 높아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는 많은 먹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들은 하루 중 대부분을 먹이를 찾고 소화하는데 보냅니다.
결국 ‘새 모이만큼 먹는다’라고 말하면 무엇일까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매일 커다란 피자를 27개씩 먹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게 먹는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오랜 시간 알고 있는 지식도 이렇게 거짓일 수 있습니다. 하물며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이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을 말하고 거짓된 행동을 하곤 합니다. 따라서 늘 겸손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또 낮추어야 합니다. 내 말보다 남의 말을 듣는 데 집중하고,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 인정하고 지지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온전하게 따르는 모습이고, 주님과 함께 하는 모습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엄청난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엄청난 힘을 가지신 주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그마한 겨자씨가 커다란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듯이, 또 누룩이 빵을 크게 부풀어 오르게 하듯이, 주님께서는 아주 작은 것을 크게 변화시키시는 전지전능하신 힘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런 분과 함께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주님의 힘을 의심하고 거부합니다.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높이 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겸손의 삶을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시면서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겸손을 우리도 배우고 익혀서 삶 그 자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때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 것도 변하게 됩니다. 특히 주님께서 하시는 일 중에 불가능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실에 받아들이면서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하는 데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커다란 가짜보다 작지만 진짜 삶을 키워 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 김이율
우정을 키워야 합니다.
과학 저널리스트 리디아 덴워스는 60세가 넘으면 배우자보다 친구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친구가 있는 사람은 노화에 따른 고난을 잘 견디고, 인지 능력도 오래 유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나이 들어 연인을 잃어도 우정에 기대어 살 수 있게 진화되었음을 말합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연인이 없어서(신부이기에 그렇다는 것을 굳이 쓰지 않아도 아시죠?) 잘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친구의 자리가 무척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신부 친구들 뿐 아니라 사회 친구들과도 요즘에는 자주 연락하고 만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함께 우정을 키워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과학적으로도 노화를 줄이고 인지 능력을 더 오래 유지한다고 하니,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연락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루카 13,21)
마침내 우리의 삶을 온통 충만하게 하시는 은총의 주님이시다. 충만할 때 비로소 보이는 넘치는 은총이며 진심어린 사랑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안에서 익어가는 사랑의 삶이다.
누룩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 누룩의 여정이 십자가의 여정이다. 누룩은 실패가 아니라 성숙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누룩이 되찾아주는 삶의 신비이다. 절망 속에서도 부풀어 오르는 참된 희망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십자가를 통한 하느님 사랑이 하느님 나라이다. 십자가의 아픔은 부패되는 것이 아니라 발효되는 것이다. 고통 없는 성숙은 없다. 십자가의 발자국을 기억한다.
삶의 본질이 사랑이다. 삶이 은총임을 모르고 사는 우리들에게 삶을 가르쳐 주신다. 우리의 일상이 은총으로 십자가로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사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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