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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25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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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

 

 

2021년 10월 25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육의 행실을 따라 살면 죽음이 오지만, 성령의 빛에 이끌려 살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인을 낫게 하시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함을 일깨워 주신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25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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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8장 12-17절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2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하느님이 일어나시니, 그분의 적들은 흩어지고, 원수들은 그 앞에서 도망치네. 의인들은 기뻐하며 춤을 추리라.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주님은 날마다 찬미받으소서. 우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은 우리 구원이시다.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 주 하느님께 있네.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3장 10-17절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체성사의 은혜를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25일 (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25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안식일은 어떤 날일까요?

 

도대체 안식일이 어떠한 날이기에 회당장은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인이 치유되고 건강해지는 일로 분개하기까지 하였는지 묻게 됩니다. 안식일은 어떤 날일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쉬는 날’입니다. 성경에서 안식일에 대하여 가장 먼저 언급하는 곳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대목입니다(2,1-3 참조). 

창세기가 전해 주는 안식일은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 날입니다. 엿새 동안 창조가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곱째 날, 곧 안식일에 비로소 창조가 완성됩니다. 또한 이날은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신 날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는 날이며,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이날은 거룩한 날이 됩니다. 안식일은 그렇게 다른 날들과 구별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고 쉬셨기 때문에, 쉬는 날이 되기도 합니다.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여인이 치유된 일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좋은 상황으로 옮겨 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는 상황으로 바뀐 것, 곧 창조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여인은 예수님의 치유로 하느님의 복을 가득 받아 거룩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에 그녀는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여인의 치유 이야기는 안식일이 품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풍요롭게 만든 것이지, 안식일의 의미를 훼손한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에 분개한 회당장에게는, 안식일은 ‘쉬는 날’이었을 뿐 하느님께 축복받은 거룩한 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안식일은 예수님의 부활로써, 주님의 날, 곧 ‘주일’의 기원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날’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요. 그저 ‘쉬는 날’로 주일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눈은 회당장의 그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죄가 아닌 고통을 보는

 

오늘 주님께서는 십팔 년을 병마에 시달린 여인을 고쳐주시며 안식일에 그리해서는 안 된다는 회당장을 아주 신랄하게 꾸짖으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주님 말씀처럼 이 얼마나 큰 위선입니까? 동물은 안식일이어도 먹이면서 인간에게는 어찌 사랑에 인색합니까? 그러니 실은 동물도 사랑하기 때문에 먹인 것이 아니라 죽으면 자기에게 큰 손실이기 때문에 먹인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없을 때 인간은 크게 두 가지로 인간이나 사물을 대합니다. 하나는 이익과 손해의 관점에서 대하고, 다른 하나는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대합니다. 

그러니 오늘 회당장이나 율법주의자들은 사랑이 없기에 동물에게는 이익의 관점에서 먹인 것이고, 인간에게는 율법의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안식일에 치유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얘기한 겁니다. 

그리고 오늘 회당장에게서 볼 수 있듯이 사랑이 없으면 한 인간 안에서 고통을 보지 못합니다. 

회당장이 병의 치유는 안식일이 아닌 날 해도 된다고, 안식일이 아닌 날이 엿새나 되고 그런 날이 더 많다고 하지만 더 많은 날이 있어도 고쳐 줄 마음이 그에게는 없었을 겁니다. 

회당장은 엿새가 아니라 열여덟 해가 있어도 고쳐줄 마음이 없었을 텐데 그것은 그가 여인의 열여덟 해의 고통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열여덟 해를 앓는 고통도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주님은 단 하루를 봐도, 아니, 한 순간에도 그 여인의 길고도 큰 고통을 보십니다. 

사랑이 없으면 고통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순간에 보이는 죄스러운 단면만 보고 일생을 보지 못하는데 사랑이 있으면 그 순간의 죄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생의 고통을 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인간이 하느님의 귀한 자녀라는 것을, 그러니까 자신도 남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며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아니라 사랑의 영의 인도를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서로 안에서 죄보다는 고통을 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하늘을 보게 하는 사람인가, 땅을 보게 하는 사람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여덟 해나 병마에 시달리며 허리를 조금도 펼 수 없었던 여인을 치유하십니다. 문제는 그 시간이 안식일이었고 또 회당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회당장은 이렇게 분개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그저 일에서 쉬는 것만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안식일이 영원한 안식처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마치고 쉬신 것처럼, 그분의 안식처에 들어가는 이도 자기가 하던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히브 4,10-11)

바오로에게 안식처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에덴동산입니다. 천국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무엇에 순종해야 할까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 일이 엿새 동안 이뤄졌던 것입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는 동물처럼 사는 인간을 하느님 자녀로 태어나게 만들어 허리를 펴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창조사업에 동참한 아담과 하와는 안식일이라는 천국에 드는 것입니다. 

저는 열여덟을 동물의 본성 ‘세속-육신-마귀’가 합쳐진 숫자로 봅니다. 동물의 본성을 ‘육’(6)으로 볼 때, 그 육이 세 번 합쳐지면 열여덟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위해 당신 심장을 뚫어 ‘진리와 은총’이 솟아 나오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진리는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이고 은총은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입니다. 이 진리와 은총은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와 교회에서 칠성사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의 본성에 살다가 그리스도께서 엿새간 열심히 일한 까닭으로 하느님 자녀의 이름을 지니고 허리를 펴게 되었습니다. 허리가 굽는 병은 바로 동물적 본성으로 사는 삶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허리를 펴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펴있는 누군가의 허리를 굽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따라서 그 죽음이 나를 안식으로 인도하는지 영원한 벌로 인도하는지 구분할 수 있게 만듭니다. 

2020년 10월 10일, 이탈리아에서는 2006년 만 15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카를로 아쿠티스(Carlo Acutis)가 교회의 새 복자로 선포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성당에 나가지 않았으나 카를로는 4살 때부터 성당에 다니기를 원했고 매주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돈이 생기면 기부를 했고 왕따 당하는 아이의 편을 들어주기도 하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달 전에 자기 죽음을 예고했습니다. 

그가 특별히 사랑했던 것은 ‘성체’였습니다. 

“성체성사는 내가 천국에 이르게 하는 고속도로와 같습니다.”

백혈병으로 죽기 직전 힘든 상황에서 마지막 성체를 영해 준 사제의 증언은 이렇습니다.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병실에서 저는 어린 소년과 마주했습니다. 창백하지만 평화로운 소년의 얼굴을 보고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환자, 특히 사춘기의 환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성체 신심이 강했던 그는 성체 기적이 있었던 모든 곳을 다 조사하고 친구들에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몸이 좋지 않아 웹사이트를 만들어 세계의 성체 기적들을 올렸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하늘나라로 가는 비단길』이란 제목으로 두 권의 책으로 엮어져 출판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대학생 수준의 프로그래밍 실력을 쌓아 복음을 전하였기에 인터넷의 수호성인으로 칭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시복을 받게 된 데는 지난 2019년에 일어난 한 기적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만성적인 췌장 질환을 앓고 있던 브라질의 한 소년이 그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고 난 직후 감쪽같이 완쾌하여 난생처음 딱딱한 음식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아플 때 고통을 교황과 교회를 위해 봉헌하였고 장기 기증을 원하였으나 이미 암이 퍼진 상태였기 때문에 불가능하였습니다. 하지만 카를로의 유해는 아주 완전하지는 않아도 15년이 지났는데도 거의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고 지금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전에 입던 옷을 입고 제단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카를로는 말합니다. 

“사람은 모두 유일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많은 이들이 복제품이 되어 죽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성체만 한 것이 없다고. 

회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시선을 아래에서 위로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주 단순한 시선의 움직임만으로 충분합니다.”

카를로 아쿠티스의 짧은 생애 동안 한 노력은 자신이 하늘을 보는 것처럼 자신의 친구들도 땅을 보지 않고 허리를 펴서 하늘을 보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안식에 들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짧았지만 여섯째 날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 사람들이 땅을 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재산 싸움을 하게 하는 경우가 그럴 수 있습니다. 진리와 은총으로, 곧 가르침과 피로 사람이 허리를 펴게 만들어야 하는데 다 그렇게 죽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첫 개신교 선교사로 들어와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도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천주교인들의 박해 소식을 듣고 자신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배를 타고 조선으로 건너옵니다. 그러나 당시 병인박해가 있을 때라 육지에 도착도 못 하고 불타는 배에서 간신히 뛰어내립니다. 하지만 결국, 그를 기다리는 자의 칼을 맞습니다. 

그런데 토마스 선교사는 자신을 찌르는 사람에게 야소(예수)를 믿으라며 웃으며 성경책을 건넸습니다. 
그 성경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져간 박춘권은 20년 후 60대 후반이 되어 다른 선교사에게 자신이 지난날 어느 서양인을 죽인 당사자라며 세례를 받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인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든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긴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었다.”

나를 찌르는 이는 분명 땅을 바라보는 이입니다. 그에게 피와 가르침을 줌으로써 그가 늦게나마 하늘을 바라보게 한 토마스 선교사도 분명 하늘의 안식을 누릴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누구나 다 죽습니다. 오늘 하루 잠들기 전에 나는 사람들에게 허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게 하였는지 돈이나 명예, 세속적 성공 등을 좇게 만들어 굽히게 했는지 항상 성찰합시다. 그 하루의 마지막이 인생의 마지막이 될 때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가 결정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랑이다.

 

16세기 중세 때 여성의 지위는 정말로 형편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19살의 어느 소녀가 강간 사건의 피해자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가해자는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성범죄를 당한 여성이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서는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온전한 정신으로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외칠 수 있어야 진정한 피해자라고 판사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고문이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부러뜨리는 고문이었습니다. 마취 없이 멀쩡한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부러뜨리는 것이 괜찮았겠습니까? 이를 이겨내야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인정해줬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여성인 피해자는 몸도 마음도 망가지지만, 남자는 오랜 재판 끝에 가벼운 선고를 받고 이마저도 얼마 못 가서 사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중세 때에도 이러했으니 예수님 시대에는 어떠했을까요? 여자를 사람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성에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었지요. 이 안식일에 치유행위를 했다면서 회당장이 분개하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이 회당장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이유로 곧바로 치유될 수 있는 여자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모습입니다.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랑’이기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절대로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안식일 법을 지키겠다고, 이날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해도 안 뜨고, 산소도 없어지고, 물도 없다면? 
 
여성에 대한 폭력성으로 인해, 이 회당장은 율법의 기본 정신인 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폭력을 사람들에게 휘두른다면, 그 자리에 주님의 사랑이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기를 원한다면, 모든 폭력을 버리고 지금 즉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에는 시간을 쏟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 류시화

 

 

내가 내 자리를 성지로 만들 수 있습니다.

 

먼 옛날, 인도의 한 스승이 제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긴 여정에 대비해 짐을 맡아줄 짐꾼도 동행했는데, 이 짐꾼은 너무 무례하고 버릇이 없었습니다. 툭하면 화내고 욕이 늘 입에 붙어있는 짐꾼과 함께하는 이 순례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제자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이 짐꾼을 쫓아내자고 스승에게 모두 몰려와 말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저 짐꾼이 아니면 누가 내게 욕심과 번뇌를 참고 원한을 일으키지 않도록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을 가르쳐주겠는가? 나는 저 일꾼에게 그런 수업을 받고 있다네.”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지순례를 하고 있다네. 만약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성지가 될 것이네.” 
 
여러분의 자리는 어떠하십니까? 바로 내가 내 자리를 성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루카 13,12)

 

삶의 한복판에 계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이기에 하느님을 만나야한다. 병든 생각과 아픈 마음을 치유하시는 안식일의 주님이시다. 일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은 믿음으로 나가야한다. 

참된 믿음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선물에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는 소중한 당신의 자녀를 치유하신다. 치유는 내어맡기는 신뢰에서 비롯된다. 하느님께 내어맡길 때 죄의 속박에서 풀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안식일은 치유의 날이며 용서의 날이다. 

안식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알게 된다. 창조와 안식은 하느님 사랑의 풍요로운 전개방식이다. 창조의 연결선상에 있는 안식일이다. 안식일은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는 기쁨의 날이다. 

안식일의 거울은 우리의 인격을 비추어준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으로 살고있는지를 묻게된다. 사람의 아름다움을 되찾는 안식일의 삶이 하느님 자녀의 삶이다. 하느님의 현존안에 안식일의 사랑이 있듯 안식에 이르는 길이 충만한 구속의 길이다. 하느님으로 하느님과 함께 사람들속에서 믿음으로 기뻐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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