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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23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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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

 

 

2021년 10월 23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그들 안에 사시기만 하면, 그들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된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하시며,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드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23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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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8장 1-11절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십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이는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11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3장 1-9절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1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현세에서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우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23일 (토)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23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회개의 시작

 

이스라엘 백성은 ‘행위와 결과’, ‘인과응보’, ‘상선벌악’이라는 분명하고 명확한, 그래서 기계론적이기까지 한 신앙의 논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면 ‘상’과 ‘복’을 받지만, 그러지 않으면 ‘벌’과 ‘저주’를 받는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을 잃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리는 등 좋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죄의 결과로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빌라도의 손에 죽은 사람들, 실로암의 탑에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이 유다인의 눈에는 죄의 결과로만 비쳤을 뿐입니다. 나아가 죽지 않은 자신들이 그들보다 의롭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행위와 결과’라는 도식으로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보려는 유다인들에게 두 번이나 같은 표현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의 의로움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죄를 많이 지었는지, 죄의 대가로 벌을 받았는지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죄에서 돌아서는 것, 곧 회개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일까요? 먼저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특별히 큰 죄는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것, 하느님 말씀보다 세상이 주는 달콤한 이야기에 귀를 더 기울이는 것, 온종일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시간을 보내면서 하느님의 이름은 잊고 살아가는 것 ……, 이와 같이 우리의 일상에서 하느님을 조금씩 밀어내는 행동들이 죄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과 귀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동안 하느님을 향하며 살아가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마음에 조금씩 하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것,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갑자기'가 아니도록

 

어제 로마서는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음을 보았는데 오늘 로마서는 내 안에 내가 아니라 다른 영들이 있을 수 있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실은 성령에 대해서만 얘기하는데 저는 의도적으로 다른 영들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왜냐면 바오로가 비록 육과 성령에 대해서만 말하지만 이 말씀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프란치스코는 육의 영과 주님의 영을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오로 사도가 그저 육이라고 한 것을 저는 프란치스코를 따라 육의 영으로 이해한 것이지요. 

어쨌거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육이나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육의 영은 성령을 거스르고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러는 이유가 바로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이 무엇입니까? 보통 육체 또는 육신이라고 하는데 그런 뜻뿐이겠습니까? 

육이란 말 그대로라면 살 또는 살덩어리라고 해야겠지만 넓은 뜻은 지상성(地上性)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
세상 사람들의 칭찬,
세상의 부귀와 영화,
육체적인 쾌락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과 성취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썩어 없어짐으로 끝날 것들이고 당연히 이런 것들은 세상과 함께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좋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이 엄연한 것을 알면서도 모르고 삽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알면서도 잊은 채 또는 모르는 체 삽니다. 

그래서 그러다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갑자기 죽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빌라도에게 살육당한 사람들과 실로암 탑에 깔려 갑자기 죽은 사람들 얘기가 나오지요. 

그런데 '갑자기'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뜻하거나 예상치 못한 거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은 '갑자기'가 아닙니다. 사건은 '갑자기'이지만 종말과 죽음은 예정된 것이고 계속 진행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회개는 종말이 '갑자기'가 아니도록, 아니, 하느님 나라가 '갑자기'가 아니고 죽음이 생명이 되도록 육의 영이 아니라 주님의 영을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로마서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죄로부터의 회개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회개’가 주제입니다. 회개는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결심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야 할까요? 우리가 지은 죄일까요? 아닙니다. 죄에서 회개하려면 영원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 근본적인 게 회개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회개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멸망하리라고 하십니다. 마치 삼 년 동안 열심히 거름을 주며 가꾸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결국엔 잘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몸을 가린 것이 무화과나무 잎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을 가렸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잎은 믿음이 없음을 상징하고 열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회개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특별히 나 자신을 믿는 삶에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회개해야 했던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뱀을 믿었다는 것이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한 행동에서만 회개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한 삶이 아닙니다. 이를 잘 나타내주는 영화과 ‘밀양’입니다. 

영화 ‘밀양’은 회개에 대한 의미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분명 전도연 씨는 믿음을 갖게 되어 용서해 주기 위해 자기 아들을 유괴 살인한 범죄자를 찾아갔습니다. 자신도 잘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시골에 와서 돈 많다고 떠벌리고 다녀서 결국 아들이 유괴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괴범은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납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시 나가지 않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자기도 죄가 있었다고 회개했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죄로부터의 회개를 넘어서 ‘나’에게서 회개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회개하지 않고 죄에서만 회개하려는 것은 여전히 내가 죄를 짓지 않을 힘이 있다는 교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가 죽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하느님과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나를 믿지 않고 나를 죽이는 봉헌이 되어야지 회개지 내가 한 행위에서 아무리 회개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부정’과 ‘하느님 인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나의 믿음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돌리는 게 회개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복음을 다시 살펴봅시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다가 빌리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바치는 제물 때문에 자신이 깨끗해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제물을 바친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물을 바치면서도 여전히 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제물에는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 못 박혀 그 피가 섞여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니 그런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이 주님께 무슨 가치가 있어서 주님께서 그 제물 덕분으로 나를 깨끗하게 해주어야 하거나 무언가 나에게 해주어야 한다고 믿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제물로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는데 무엇을 바랍니까? 그냥 받은 것에 감사해서 앞으로도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마음으로 봉헌해야 합니다.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곧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례는 받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열여덟을 ‘여섯 + 여섯 + 여섯’으로 보고 있습니다. 666. 짐승의 숫자입니다. ‘세속-육신-마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탑은 ‘자아’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으로 씻기만 하면 깨끗해지는 실로암이 있는지 자기를 믿었기에 그 자신에 깔려 죽게 될 것이란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총은 주님 무상의 선물입니다. 실로암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그런 은총을 받는다고 믿거나 세속-육신-마귀를 탑처럼 세워놓고 은총을 받으려 한다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나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앵그리스트맨’(2014)은 인생의 모든 게 불만인 헨리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유일한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 공부가 아닌 춤을 배운다고 해서 연을 끊었고 아내와도 별거 중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과 비슷하게 인생을 비관하는 의사에게 뇌동맥류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언제든 뇌혈관이 터져 사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 열이 받은 주인공은 도대체 그러면 얼마나 사느냐고 묻습니다. 의사도 자신에게 다그치는 그 사람이 싫어서 그냥 ‘90분’이라고 말해버립니다. 곧 터지니 정밀검사를 받자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쳐나가 마지막 90분 동안 해야 할 일을 찾습니다. 

세 가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데 첫 번째는 아내와 화해하는 것, 두 번째는 아들과 화해하는 것, 세 번째는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보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갔더니 다른 남자와 있었고,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고, 동창은 단 한 명 나왔는데 어렸을 때 여자친구를 뺏긴 것 때문에 당장 죽을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뇌가 터지든 말든 이젠 살고 싶지 않은 주인공은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주인공이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그를 구합니다. 그리고 지금 혈관이 새고 있으니 병원으로 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어내릴 때 이미 자존심까지 죽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들이 춤 연습하는 곳으로 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2년 만에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아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용서를 청합니다. 어렸을 때 아들과 함께 췄던 춤을 춥니다. 주인공은 수술하고 8일을 더 삽니다. 그러면서 아내와도 친구와도 화해합니다. 

봉헌은 바로 헨리가 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내 힘으로 무언가 해 보려는 것이 아닌 주님께 맡기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더는 나를 믿지 않겠다는 회개는 참된 봉헌으로만 표현됩니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는다는 말은 끝내 나를 믿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믿을 때 가장 먼저 믿게 되는 게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봉헌이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결심입니다. 

선악과가 그렇게 봉헌되어야 했습니다. 선악과의 봉헌은 더는 뱀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표현입니다. 그 때문에 회개는 봉헌과 직결됩니다. 이 선악과가 구약에서는 십일조가 되었고 예수님도 내라고 말씀하셨고 미사 때 빵과 포도주로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끝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은 무서운 결말을 제시하시며 참된 회개의 표징을 봉헌으로 표현하라고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나를 의지하지 않겠다고 내 피를 제물에 섞어 봉헌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사에 위탁하겠다고 내 자아의 탑을 무너뜨려 교회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봉헌에 내 피를 섞고 그래서 내 힘을 빼고 교회의 성사에 위탁합시다. 이것이 회개의 표징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 저예요. 조니.

 

어린 소년 조니는 항상 학교 가는 길에 성당을 지나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성당 문을 살짝 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예요. 조니.” 
 
그리고는 미소를 짓고는 문을 닫고 학교로 향했습니다. 이 소년은 나이가 들어서도 매일같이 성당 안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예요. 조니.” 
 
여름에 졸업여행을 가면서도 성당 문을 열고 하느님을 놀라게 하려는 듯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조니는 그만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죽기 바로 직전 조니는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조니, 나야. 하느님!” 
 
사후세계를 믿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후세계를 다녀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인 세상에서 무조건 사후세계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특히 주님께서는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임을, 그리고 우리가 모두 빠짐없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이 땅에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도가 죽인 갈릴래아 사람들과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보다 죄가 크고 큰 잘못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삼 년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지요. 그다음 해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라 버리라고 포도 재배인이 이야기합니다. 
 
열매가 바로 회개입니다. 지금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회개가 일어나야 죽음 이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회개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커다란 후회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중요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친절하고 의미 있는 것은 진정한 관심이다.

- 린다 피콘

 

 

고통과 시련 그러나 선물도 있습니다.

 

어느 원로 시인의 에세이를 읽다가 자신이 시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여인으로부터 거부당했기 때문이라고 적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눈에 반해 고백하고 인정받으려고 노력했지만, 이 여인에게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심한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힘든 마음을 시로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했고, 그 시가 당선되어 지금까지 시인으로 살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만약 그 여인이 자신을 받아주었다면 그런 시를 쓸 수 없었을 테고, 문예지 등단도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좌절과 절망의 어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커다란 선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고통과 시련이 있다면 반드시 선물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선물인지를 찾아보는 것, 지금의 어려움을 빨리 극복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5)

 

골고루 번져가는 단풍의 절실함이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계절의 참사랑이다. 그러나 한심한 핑계와 뼈아픈 회개 사이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주님의 뜻은 우리를 향한 연민과 회개에 있다. 이와같이 사람의 길은 회개의 길이다. 

회개는 참된 생명의 실천이다. 새로운 시작에는 언제나 회개가 있다. 회개 없이 정화는 있을 수 없다. 회개 하지 않는 것이 멸망이다. 회개의 만남이 복음의 참된 만남이 된다. 회개는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한다. 생활 속의 회개가 참된 회개이다. 

회개는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기쁨이다. 다시 행복해지는 길은 회개에 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습으로 우리자신이 돌아가는 것이다. 관계의 파괴가 아닌 관계의 복원이 바로 회개이다. 사랑과 용서의 삶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회개의 진실한 여정이다. 

생명의 바탕 생활의 토대가 바로 절실한 우리의 회개임을 주님께서 일깨워주신다. 새롭게 태어난 삶이 바로 회개의 삶이다. 회개의 삶은 참사랑을 향해서 가는 은총의 삶이다. 삶이 충만한 것은 회개가 있는 까닭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회개에 달렸다. 아름다워져야 할 우리들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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