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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27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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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

 

 

2021년 10월 27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시며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27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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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8장 26-30절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룹니다.

 

형제 여러분, 

26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27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리이다.

 

주 하느님, 살펴보소서, 저에게 대답하소서.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제 눈을 비추소서. 제 원수가 “내가 이겼다.” 하지 못하게, 제가 흔들려 적들이 날뛰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리이다.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리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3장 22-30절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체성사의 은혜를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27일 (수)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27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들려줍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적은지에 관한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받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우리말 ‘힘쓰다’로 번역되는 이 낱말은,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투쟁하다’라는 뜻으로, 훨씬 강한 어감을 지닙니다.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치열한 싸움을 치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며 적당히 노력하는 태도는 우리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닫힌 문을 보게 하리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닫힌 문을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과 함께 먹은 것이 아니었으며,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주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자기 진술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저 예수님 앞에 머문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당에 간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자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과 싸우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경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초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눈과 귀가 조금씩 주님께 향하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부르심이든 구원이든 받아야지 받는 것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구원받을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고, 독서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래서 누가 구원받고 부르심을 받는지 생각을 하니 즉시 받아야지 받는 것이고, 받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이것은 제 나름의 깨달음이고 그래서 자주 얘기하는 바인데 하느님께서 구원하시지 않고 부르시지 않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누구나 구원하시고 부르시지만 그 구원과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편지를 보냈는데 수신 거부를 하면 아무리 보내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래서 사랑하는 자와 부르심을 받는 자는 같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를 부르심받은 자와 동인격으로 얘기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반갑고 그래서 받아들이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의 부르심도 반갑게 받고,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도 간절히 원하고 받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과 함께 있자고 부르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하나도 반갑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구원도 아닙니다. 

제가 영적 동반을 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요즘 성소가 흔들리고 그래서 요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그 이유가 형제들과의 갈등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그는 형제들과의 갈등 때문에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성소를 잃는 것이고, 성소를 잃는다는 것은 형제들과의 씨름 때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망각하고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 형제가 수도원 들어올 때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부르심 때문에 들어왔는데 언제부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형제들과 씨름을 하다가 씨름이 싸움이 되고 싸움이 형제들을 떠나게 하는 거였습니다. 

들어올 때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부르심을 받아서 들어왔는데 나갈 때는 형제들이 싫어서 형제들과 싸우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들을 싫어하고 형제들과 싸우고 떠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형제들과도 잘 지내고 서로 다르지만 형제들과 함께 좋은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그 유명한 합력선合力善 이론입니다. 하느님을 진정 사랑하고 그 부르심을 사는 사람은 결코 제 뜻대로 살지 않고 부르신 분의 뜻과 부르신 뜻에 따라 살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일을 형제들과 함께 이루려고 합니다. 

이것이 부르심 받고 구원받는 사람의 삶이고, 이것이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삶입니다. 제 좋을 대로 또는 제 뜻대로 사는 거라면 구원의 문이 좁지 않지만 제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부르심과 구원을 받는 우리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좁은 문은 하느님과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십자가 고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을 선택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복음 본문의 흐름으로 보면 좁은 문은 아주 분명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안식일을 설명하시며 ‘열여덟 해 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던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저는 열여덟이 세속-육신-마귀의 합쳐진 숫자라 해석했습니다. 세속-육신-마귀가 인간을 땅을 보는 짐승처럼 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말씀과 은총’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녀의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시고 안수로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다음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며 ‘겨자씨와 누룩’으로 표현하십니다. 겨자씨는 말씀과 같고 누룩은 은총과 같습니다. 누룩은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어집니다. 세속-육신-마귀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은총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겨자씨가 자라나면 새가 날아와 쉬게 할 휴식처를 제공합니다.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리와 은총은 그 사람 안에서 자신을 죽이고 이웃을 위해 살게 만들어 짐승의 삶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 말씀에서 ‘좁은 문’은 ‘겨자씨와 누룩’ 때문에 당해야 하는 ‘십자가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룩으로 자기 자신이 죽는 것도 고통이요, 이웃을 위해 겨자나무가 자라나게 하는 것도 고통입니다. 

폴 브랜드는 선교사이고 의사입니다. 루이지애나주에서 의사로 일할 때 한 엄마가 딸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아이의 발엔 붕대가 감겨있었습니다. 폴은 아이가 아프지 않게 붕대를 하나하나 풀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남의 일인 양 진료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붕대를 다 풀었을 때 폴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발바닥에 종양이 생겨 발이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엄마가 어느 날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는 비닐 위에 빨간색으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낙서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가까이 와서 보니 아이는 자기 손가락에서 나온 피로 그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입을 보니 치아에도 피가 묻어있었습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손가락을 물어 뜯은 것입니다. 아이의 한 손가락은 그렇게 이미 짧아져 있었습니다. 발에 난 상처는 못이 박힌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썩은 것입니다. 

남편은 이런 ‘괴물’을 어떻게 키우느냐며 집을 나갔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얼마 뒤 양발과 손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상처가 났는데 아프지 않으면 자신의 몸이 망가집니다. 성장할 수 없습니다. 나병균이 손과 발, 눈 등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나병균은 그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눈이 이물질이 들어가면 고통을 느껴 깜빡이거나 이물질을 빼내야 하는데 눈이 곪고 썩어들어가도 감각이 없으니 눈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기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발에 뼈가 드러나도 그 뼈로 걷고, 불에 데면서도 손으로 뜨거운 것을 짚습니다. 

처음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 특권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고통이 없는 이 병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상에서 체험될 수 있는 가장 큰 지옥의 고통이 됩니다. 

폴 박사가 해외에서 나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심하게 지쳐있는 데다 몸에 열이 난 상태로 강연까지 소화해야 했습니다. 간신히 기차를 타고 강연장까지 가서 연설하고 집에 돌아와 누웠을 때는 발에 아무 감각이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늘로 발을 찔러보았더니 아무 감각이 없었습니다. 더 깊이 찔러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폴 박사는 절망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의사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환자를 치료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에 감각이 있어야 치료해 줄 수 있고 눈이 보여야 하는데 나병에 걸렸다면 이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뿐입니다. 

다음날 다시 바늘로 찔렀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따끔했습니다. 몸이 안 좋은 상태로 기차를 타고 왔는데 한 다리가 눌려서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일시적으로 마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폴 박사는 고통이란 것이 그렇게 큰 은총인지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조: 『고통이라는 선물』, 폴 브랜드와 필립 얀시, 두란노서원]

다미안 신부님도 나병 환자들만 모아놓은 섬에 들어가 그들이 하느님 자녀임을 알려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삶을 사는 그들은 신부님의 사랑을 그저 하나의 동정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도 나병이 걸리고 자신들을 형제라고 부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는 신부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정말 많은 나병 환자들이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만약 다미안 신부님이 본래 나병 환자였다면 그저 환자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감사하게도’ 나병에 걸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은총과 진리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만 보이게 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이웃을 위해 고통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데 왜 아파야 해요?”라고 묻는다면 사랑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 나를 봉헌하는 것도 고통이어야 하고 또 이웃에게 내 피를 흘려주는 것도 고통이어야 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누룩도 밀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할 수 없고 겨자씨도 나무로 자라지 못합니다.

따라서 고통의 신비를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사랑이 가능함을 믿는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그 은총의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조금 더 받으려고 노력합시다. 딸아이가 나병에 걸린 것을 보고 도망치는 아버지처럼 되지 맙시다. 

좁은 문, 십자가의 길. 이는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 이웃을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좁은 문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도구는 기도

 

코로나로 인해 힘든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고용 불안으로 많은 이가 불안 속에 있습니다. 이 형제님도 점점 어려워지는 회사 상황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 교육비를 포함해서 아직도 지출할 것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노후 자금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직은 절대로 이루어지면 안 되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매일 성당에 가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자신이 실직되지 않기를 그리고 회사가 잘 되기를, 그래서 우리 가족에 불행이 닥치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형제님의 바람대로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형제님은 실직하셨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기도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 바치는 시간이 행복하게 느껴졌고,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실직했어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하며 희망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곧바로 취업하게 되어 기쁘게 지금을 살고 계십니다.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의 선물을 얻게 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만을 보다 보니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서도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통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이 되며, 내가 원하는 것 이상의 필요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이란 어떤 문을 말하는 것일까요?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특히 불의를 일삼는다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불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그 불의로 자신의 욕심은 충분히 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자격은 사라지고 맙니다. 
 
주님의 일을 했다면서 주님께 매달릴 수 있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건축금도 성실하게 봉헌했습니다.”, “주일미사에도 몇 번 빠지지 않았습니다.” 등등의 말을 하면서 주님께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했다는 그 모든 주님의 일이 주님의 영광이 아닌,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실 것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어떤 순간에서도 멈추지 않는 기도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처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빛을 퍼뜨리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촛불이 되거나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 이디스 워튼

 

 

모나리자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로, 38만 점이 넘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모든 작품을 보려면 일주일이 걸린다고 하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이 박물관에 들어가는 사람은 목표로 삼은 작품이 생깁니다. 아마 많은 관람객의 목표 1순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로 77㎝, 가로 53㎝의 작은 크기지만, 이 그림을 보기 위해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두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사실 이 작품은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11년 6월 21일에 모나리자를 도둑맞았지만, 없어진 것도 모를 정도로 평범한 취급을 받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난 사실을 발견하고, 이 도난에 피카소와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소문이 돌면서 ‘모나리자’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존하는 천재 작가가 탐내는 작품이라고 하니 이 작품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관심’ 때문에 작품의 의미가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런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번 더 생각한다면 분명 새로운 의미가 내 삶 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이런 발견을 통해 우리는 더 힘차게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루카 13,24)

 

큰 문과 좁은 문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 길을 잃어 버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좁은 문을 제시하신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의(義)를 행하는 좁은 문이다. 길은 언제나 우리 내면에 있다. 거짓을 찢고 욕심을 벗지 않고서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다. 

우리가 작아지면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올바름은 좁은 문을 통해 드러난다. 간절하면 좁은 문도 활짝 열린다. 회개하지 않고서는 좁은 문을 빠져나갈 수 없다. 하느님의 문(門)은 닫히지 않았다. 길을 내시고 길을 여시는 분이시다. 

좁은 문 앞에서 우리자신을 만난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바르게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죽이는 것은 너무 커져버린 우리자신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살리는 좁은 문의 구원이다. 좁을수록 넘쳐나고 넓을수록 아쉬운 우리들 삶이다. 

우리를 끝내 살리시는 좁은 문을 통한 깊이 있는 사랑이다. 오늘 우리가 따르고 들어가도록 힘써야 문은 다름아닌 좁은 문(門) 이다.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주님께서는 점점 커지셔야 되는 좁은 문의 역설(逆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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