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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2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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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2021년 10월 28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시몬 성인과 유다 성인은 열두 사도의 일원이다. 시몬 사도는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었다가 제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는 주로 페르시아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여 ‘타대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신약성경 유다 서간 저자인 그는 유다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도는 예수님의 친척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가 언급되는 복음 구절에 같은 이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마태 13,55)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모퉁잇돌이시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시고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열둘을 뽑으시고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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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에페 2장 19-22절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6장 12-19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성체를 받아 모시고 성령 안에서 간절히 청하오니 시몬과 유다 사도의 순교를 기념하는 저희를 주님의 사랑으로 지켜 주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28일 (목)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2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간절한 마음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의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 일생을 바친 두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들이 걸어간 여정은 예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들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은 복음에 자주 등장하기에 그다지 낯선 장면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홀로 기도하실 뿐 아니라,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시는 순간이 매우 중요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일치하는 가운데 그 일을 진행하십니다. 그렇게 소중하고 귀한 마음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선택이 이루어집니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삶의 여정 속에서 자신을 위한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모든 주도권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간 이들이 바로 사도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심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이천 년 전 열두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준비와 응답을 기다리시며 우리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간절함,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기 전에 보여 주신 간절한 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탈바꿈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오늘 두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자연스럽게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왜 두 사도의 축일을 같이 지내는지 그것이겠지요? 

그리고 두 분의 축일을 같이 지내는 것은 두 사도가 주님의 형제들이라고 교회가 인정하기 때문인데 두 분이 사도가 된 것은 자원한 것인지 아니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께서 뽑아서 된 것인지 그것이 두 번째 질문이지요. 

제 생각에 두 분이 제자가 된 것은 자원한 것이고, 열두 사도 중의 하나가 된 것은 뽑힌 것일 겁니다. 

저의 이런 생각은 열두 사도 외에 주님을 추종한 사람들 곧 제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에 근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자가 되기로 자원할 때와 사도로 뽑힐 때 두 분의 마음이나 의도는 어땠을까 다시 생각이 됩니다. 

망설임은 없었을까요? 두려움이나 조심스러움은 없었을까요? 오히려 불순한 의도나 뻐기는 마음이 있었을까요? 

불순한 의도나 뻐기는 마음이라면 주님의 형제라는 것을 이용하여 주님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셨을 때 한 자리 차지하려는 것과 사도단 가운데서 자기들은 주님의 형제라는 것을 뻐기는 것이지요. 

만일 두 분이 이랬다면 제자에서 사도로 뽑힐 때는 기뻤을 것이고, 그러나 나중에 진정한 주님의 사도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절망과 죽음의 계곡을 건너는 회개와 세례가 필요했겠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의 형제라는 것 때문에 제자와 사도 되는 것에 망설임이나 두려움이나 조심스러움이 없었다면 열두 사도 중 주님의 진정한 사도가 되기 위해 제일 많이 탈바꿈해야 할 분은 두 분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탈바꿈에 대해 생각해보려는데 탈바꿈의 사전적 의미는 모양이나 형태나 상태가 바뀌고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동물의 경우는 매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유충이나 유생에서 성충이나 성체로 탈바꿈하고, 식물의 경우는 본래의 것과는 아주 달라져 독립된 종으로 탈바꿈하지요. 

그러니까 탈바꿈이라는 말에는 성숙과 완전한 변화라는 좋은 뜻이 있고, 그렇게 되기 전에는 미숙하고 불완전하였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두 분의 축일을 같이 지내는 것은 두 분이 이런 탈바꿈의 대표이고 모범이기 때문이겠는데 우리는 두 분의 탈바꿈을 영적인 탈바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영적인 탈바꿈은 요한 복음에서 세례자의 물의 세례와 비교하여 주님의 세례를 불의 세례, 성령의 세례라고 한 것과 같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 완전히 영적인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영적인 탈바꿈은 존재의 영적 탈바꿈 뿐 아니라 삶과 역할도 영적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영적으로 탈바꿈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탈바꿈하도록 모범이 되고 역할을 하는 겁니다. 

두 분의 경우 단순한 제자에서 사도로 탈바꿈하는 것인데 사도란 열두 지파의 대표로서 주님 교회의 기둥이 되는 것이니 두 분을 본받는다면 우리도 제자에서 사도로 영적 탈바꿈을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소명과 사명의 차이: 모든 이들은 기도의 소명으로 불리운다.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 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시몬은 열혈당원으로 불렸고 유다는 그리스도의 형제로 여겨집니다. 열혈당원은 당시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무장세력이었습니다. 

『하.사.시.』에 의하면 시몬은 독립운동을 하다 나병에 걸렸고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며, 유다는 야고보와 함께 알페오의 아들들로 불리며 예수님의 사촌 형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신 다음 그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시고 당신이 복음을 전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십니다. 나중에 파견도 하시지만, 오늘 복음만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다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룩한 부르심’, 곧 ‘소명’(召命)에 대한 참다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명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도록 맡겨주신 일일까요? 

아닙니다. 소명의 뜻은 “생명을 요구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냥 나의 존재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언가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는 ‘사명’(使命)이라고 합니다. 만약 소명과 사명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큰일이 벌어집니다. 가리옷 유다 같은 사도가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소명의 의미를 사명과 헛갈린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주님께 무언가 해 드리려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아마 세속적인 것에 밝아서 예수님께서 돈주머니를 맡기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그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점점 자기식으로 주님을 섬기려 했고 결국엔 주님을 팔아넘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명에 집중하는 사람은 ‘업적 주의자’가 되어 눈에 보이는 일을 해내지 않으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처럼 여깁니다. 

“선생님 제가 물 위를 걸어 갠지스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수행자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라마크리슈나’를 찾아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높아진 도력을 자찬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있던 라마크리슈나가 물었습니다.

“그래, 몇 년이나 수련했는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18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스승은 다시 물었습니다.

“이보게, 갠지스강을 건너는 데 뱃삯이 얼마인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18루피라고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라마크리슈나가 수행자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이나 수행해서 겨우 18루피를 벌었네.”

이것이 소명이 아닌 사명에만 집중하는 제자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명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를 증명하며 삽니다. 그리고 증명되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어떤 목사님이 10년 동안 죽도록 고생하여 사목하였는데도 신도가 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절망에 빠져 십자가 앞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는 실패한 목사입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실패한 것이다.”

그 목사님은 “제가 실패한 건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실패한 것이다. 만약 많은 신도가 생겼다면 이는 네가 성공한 것이냐, 내가 성공한 것이냐?”라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에만 집중하여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 소명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자칫 가리옷 유다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명과 사명을 구분해야 합니다. 소명은 생명을 요구하신다는 것이고 사명은 일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결혼할 때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의 능력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본인도 어떤 능력으로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이혼의 빌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소 아내와 호랑이 남편이 결혼하였습니다. 소 아내는 호랑이 남편에게 맛있는 샐러드를 대접했고 호랑이 남편은 맛있는 살코기만을 잡아 왔습니다. 결국, 둘은 최선을 다했지만, 상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기며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일을 시키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은 당신이 다 하십니다. 그것보다 우선 주님은 당신과 함께해줄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불러주실 때 저는 “제가 아이 낳아서 주님께 두 명 이상 봉헌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나는 너를 원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무언가 해 드리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저’를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또 신학교에 들어와서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정말 감사해서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생명까지도 다 드리겠습니다. 당신께 무엇을 해 드리면 좋을까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다. 나에게 붙어 있어라!”

우리는 자꾸 나를 불러주신 분을 위해 무언가 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 자체가 그분께는 모욕이 됩니다. 나 없으면 무언가 부족한 분으로 내가 취급해드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내가 없어도 잘만 지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내 능력으로 무언가 해 드리는 일이 아닌 그저 당신 덕분에 행복해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주님께서 나를 써주셔서 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소명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그분 부르심의 응답입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분께 나 자신을 봉헌하여 붙어 있을 줄 아는 것이 소명에 응답한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렇게 소명을 기도로 응답하면 사명은 그때그때 내려주십니다. 

저는 유튜브를 시작한 것을 매우 만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강의하는 것에 지쳐 있었고 또 저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서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때 코로나가 생겼고 코로나 동안 기도하던 중 주님께서 유튜브를 하라는 강한 느낌을 주셨습니다. 저는 처음에 어떻게 하는지 몰라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았는데 그들은 팀을 꾸려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채널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여 찍고 편집하는 방법 등을 유튜브를 보고 스스로 배워 부족하지만 조금씩 올렸습니다. 일 년 반이 지난 지금 많은 분이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공감해주십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도 어려워하던 것들을 평신도분들이 이해하고 삶을 그렇게 변화시키려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내 힘으로 무엇을 하는 것보다는 주님의 뜻에 맡겨 사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께 주의만 기울이고 있다면 사명은 주님께서 그때그때 알려주십니다. 내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명은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은 소명입니다. 소명이 있으면 사명은 필요할 때 저절로 주어집니다. 그러니 지금 삶의 목적이나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찾지 마십시오. 우선 내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먼저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이 아닌 당신을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으시고 당신이 내려가셔서 선교하십니다. 제자들을 뽑으시고 일을 시키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보다는 소명에 집중합시다. 주님은 나를 원하고 계실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야?

 

종종 예민한 반응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봅니다. 예민한 것이 나쁜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국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 박사는 다섯 명 중 한 명은 예민한 기질을 타고났다고 말합니다. 만나는 사람 중 20%는 예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민함을 나쁜 것처럼 생각하면, 세상 사람의 20%를 나쁜 사람 취급하는 것이 됩니다. 바른 판단이 아닌 잘못된 판단입니다. 
 
예민함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를 물으면, 그들이 별것 아닌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이런 예민함이 있기에 깊이 생각하고 사려 깊으며 남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 어려움에 함께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민함이 있기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커다란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민함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이 더 많습니다. 
 
어떤 모습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른 이를 보고서 틀렸다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만이 분명히 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을 떠올려 봅니다. 12명의 제자. 그들 중에서 잘난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부, 세리, 열혈당원 등….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별로 대단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뛰어난 언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큼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 기준으로 볼 때 부족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를 뽑기 위해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 중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 역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기준에서 훨씬 뛰어난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들을 제쳐두고서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신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는 단순함과 굳은 믿음이면 충분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세상의 기준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실제로 주님을 증거하는 커다란 일꾼이 됨으로써 증명되었습니다. 
 
주님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받아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주님 안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도 판단을 내려놓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만이 사랑할 수 있고, 이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었으며 이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음을 믿을 때 진정한 사랑의 계절이 찾아온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너, 도대체 언제 공부할 거야?” 
 
공부하지 않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먼저 갖게 되는 반응은 ‘짜증’일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공부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아이와 적대적 감정만 생길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심리학자 김경일 박사는 대화에 물리적 위치를 포함하면 이야기가 한층 더 진행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공부 안 하는 아이에게 “너, 도대체 언제 공부할 거야?”가 아니라, “너, 어디서 공부할 거야?”라고 물으면 아이는 짜증보다 ‘어디서’ 공부할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종종 기도하지 않는 가족의 모습에 힘들다는 분을 만납니다. 그들 역시 배우자나 자녀에게 “언제 기도할 거야?”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것은 짜증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어디서 기도할 거야?” 
 
기도할 생각이라도 갖게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8)

 

단풍의 다채로운 빛깔의 순수한 선물이다. 새로운 탄생의 길은 언제나 순수한 감동과 환희로 벅차오른다. 생명의 길 안에서 미루지 않으시고 열두 사도를 뽑으신다. 주님께서 직접 선택하신다. 행복한 사도들의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사랑이란 주님께 순명하는 진리의 길이다. 혼자만의 구원이 아닌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걸어가신다. 갈등과 어려움 속에서도 사도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의 신비이다. 

앞장서는 사도들의 신앙이 못난 우리들의 신앙을 다시 깨운다. 불평과 안일함에서 벗어나게 한다. 굶주림과 아픔을 참아내며 주님을 따랐다.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기도로 어려움을 극복하셨다. 이와같이 길은 열려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삶을 바꾸어 놓았다. 생명과 참된 자유를 다시금 생각한다. 첫만남과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 참되게 사랑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이 시대 이 자리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이 되셨다. 

최초도 최후도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 다채롭고 다양하기에 풍요로운 사도들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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