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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0월 30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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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

 

 

2021년 10월 30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잘못으로 구원에서 멀어지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이로써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받습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것을 보시고,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0월 3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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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11장 1ㄴ-2ㄱ절, 11-12절, 25-29절

 

유다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벤야민 지파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11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걸려 비틀거리다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12 
그런데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의 실패로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 

25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26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시온에서 구원자가 오시어 야곱에게서 불경함을 치우시리라. 

27 
이것이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 그들과 맺어 줄 나의 계약이다.” 

28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29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주님, 행복하옵니다, 당신이 깨우쳐 주시고, 당신 법으로 가르치시는 사람! 불행의 날에도 평온을 주시나이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 소유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재판이 정의로 돌아오리니, 마음 바른 이 모두 그 뒤를 따르리라.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주님이 나를 돕지 않으셨다면, 내 영혼은 침묵의 땅속에 누웠으리라. “내 다리가 휘청거린다.” 생각하였을 때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받쳐 주셨나이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4장 1절, 7-11절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체성사의 은혜를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30일 (토)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30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윗자리’와 ‘끝자리’, ‘영광스러움’과 ‘부끄러움’이 이루는 강한 대조가 오늘 복음을 이끌어 갑니다. 흥미로운 것은 윗자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부끄럽게 되고, 끝자리를 찾는 사람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논리적 모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논리에서는 윗자리가 영광을 주고, 끝자리는 부끄러움을 준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당연하고 자명한 논리를 거스르는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세상 논리와 예수님 말씀이 충돌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 말씀을 듣고 예수님 말씀을 따를 수 있을지 묻게 됩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초대한 이에게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라는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밀려나더라도, 또다시 윗자리를 고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 논리를 더 익숙하고 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논리의 옷을, 예수님 말씀의 옷으로 갈아입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것처럼, 우리도 부끄러움이 아닌 영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이요 선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가 앉을 자리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산 위에 올라가면 높고 낮은 것을 따지는 것이 다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느낀다. 하느님 앞에 서면 인간끼리 누가 높은지 따지는 것이 우습다. 

이것이 오늘 복음을 읽고 즉시 든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초대받거든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는데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의 초대를 받고 어디로 초대를 받아야 할 것인가도 생각되었습니다. 

왜냐면 높낮이를 따지는 것은 하느님의 초대를 받지 않고 그래서 하느님 앞에 있지 않은 사람의 짓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초대를 받고 하느님 앞에 있으면 앞서 봤듯이 도토리 키재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묵상의 결론을 내리면 높은 자리에 오르고 거기에 앉으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 초대받지 않고 하느님 앞에 앉아있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겸손에 대한 권고를 마음에 마음에 더 소중히 새기는 오늘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 자기 의지로 내려오기를 원치 않는 그런 수도자는 불행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진정한 교리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살아난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안식일에 관한 교리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율법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어도 되는지, 되지 않는지조차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들이 왜 바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관해 설명합니다. 

먼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교만’에 대해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식사 자리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것을 비판하십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교만이 그들에게 주어진 교리까지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가난한 자’들을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부자끼리 어울리니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가난한 자들에게 다가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교리가 어려워집니다. 교리가 어려워졌다는 증거는 ‘비유와 상징’의 뜻을 잊어버리고 이론적으로만 가르친다는 것에서 증명됩니다. 사실 진리는 부유하고 배운 이들을 향할 때 그 생명력을 잃고, 오히려 가난하고 철부지 같은 이들을 통해 생명을 얻습니다. 

최고야 상담가의 『벼랑 끝, 상담』 첫 사례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처음 최 원장은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어주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에 큰 괴리감과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며 미술치료와 명상최면 등을 접목하여 내담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퇴근하려고 길을 나서는데 한 남자가 최 원장을 막아섰습니다. 최 원장은 여성입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상담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최 원장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예약을 잡아주겠다고 했지만, 그 청년은 지금이 아니면 너무 늦어진다는 것입니다. 

최 원장은 아무도 없는 상담실에 그 사람을 맞아들였습니다. 그 사람은 신문지에 쌓인 칼을 최 원장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습니다. 최 원장은 이미 자신을 찾아왔다면 희망이 있다고 여기고 무섭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지금 지하철로 마구잡이로 사람을 찌르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도망쳤고 아버지는 심한 구타로 아이를 키웠습니다. 아버지는 물이 나오지 않는 옥탑방이기에 어쩔 수 없이 변을 집 안에다 볼 수밖에 없었는데 4살짜리 아이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누나는 가출했지만, 그 청년은 아버지를 견뎌냈습니다. 아버지는 동네 형들과 싸움을 시켜서 이기지 못하면 또 때렸습니다. 

그렇게 그 청년은 대인기피증을 넘어서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없는 정도까지 이르렀고 특별히 엄마 때문에 여자들을 증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를 구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는 이렇게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잘도 살아가는 것이 너무 싫어서 참다 참다 칼을 들고 나섰는데 상담실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잠깐 멈춰 섰는데 원장이 나왔던 것입니다. 

최 원장은 돈이 없는 이 청년에게 돈을 받지 않고 상담을 해주겠다고 하고 자신이 아는 모든 치료방법을 써서 도와주었습니다. 특별히 그림 그리기를 하고 그 그림을 최면상태에서 태워버리거나 다시 액자에 끼우는 등의 상징기법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비유는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청년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여자와 영화까지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례를 접하면 어떨까요? 누군가가 상담에 대해 이론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홍보하는 것보다 최고야 원장이 하는 상담실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더 생길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렇게 이미 잘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못 배우고 가난한 이들의 변화를 통해서 증명됩니다. 어렵게 교리실에서 가르치는 것이 교리가 아니라 그들의 새로 태어남이 곧 교리 자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고 철부지들에게 진리를 드러내 보이신다는 말씀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저는 꾸르실료 교육을 받게 된 것이 유학에서 돌아와서 본당의 주요 봉사자들이 모두 꾸르실리스따들임을 알게 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을 하려면 우선 인정을 받아야 할 텐데 그 방법은 저도 꾸르실료를 받는 방법밖에 없다고 느낀 것입니다. 

하지만 3박 4일간의 꾸르실료 교육은 저에게 너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방금 신학박사를 따고 온 사람에게 평신도들이 알려주는 교리와 영성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심지어 틀린 것도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맡고 있고 할 수 있다면 전 신자들이 다 꾸르실료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피정과 교육을 받은 사제에게는 재미가 없을망정 들어온 대부분의 신자분은 큰 깨달음을 얻고 많이 배워서 나가고 하느님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꾸르실료가 사제나 수녀님들에게 맞추어져 있다면 그 가르침이나 교육 내용이 나무 고차원적이라 오히려 평신도들은 그 안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점점 내용이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꾸르실료 운동은 그 맛을 잃게 되고 점점 사그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꾸르실료 기본사상 책에는 교회에 열심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교회에서 떠난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교리가 매력 있으려면 그 내용이 많이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유가 사용될 수 있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습니다. 너무 고학력자들을 위한 교회가 되면 교리가 어려워지고 실생활과 괴리된 교리를 가르쳐 결국 인도의 불교처럼 일반 사람들에게 외면받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도 감사한 일 하나는 부모님이 온전한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머니는 아예 학교에 입학해보지도 못하셨고 아버지는 초등학교 수준만 공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장하였을 때는 말을 할 때 그분들의 수준에 맞추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 어려운 교리를 쉽게 설명하게 만드는 훈련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대학을 나온 부모님들을 만났다면 저의 강론은 일반인들이 듣기에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매력을 잃습니다. 매력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이 안식일 교리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 것처럼 교리가 변질합니다. 

우리 교회는 끊임없이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과 못 배운 이들을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자세를 바꾸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 안의 진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분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께 인정받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사제 서품을 받고 어느 본당의 보좌신부로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미사 후 신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제게 성경에 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잘 모르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가 이런 것도 모르냐고 할 것 같아서, ‘아마 이럴 거야’라는 생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분은 계속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제 말도 안 되는 설명을 듣고는 “알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사제관에 들어와 책을 펼쳐서 질문에 대한 답을 똑바로 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낙담했습니다. 잘못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설명으로 그분에게 커다란 혼란을 드렸을 생각에 너무나 미안했고, 괜히 아는체했던 저 자신이 미웠습니다. 
 
그 뒤, 저는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이라 연락처를 주시면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했어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오류의 틀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면, 오히려 세상에 잘못된 지식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윗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자기 과시를 위해, 또 자신의 위치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솔직히 일반적인 우리 모습입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척 그리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척하면서 자리싸움의 우위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기 자리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분 앞에서 과연 주인 행세를 하면서 맨 윗자리에 스스로 앉을 수가 있습니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도 낮아지셨음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 안에서 나를 드러내려는 교만의 삶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지위나 명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인정받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때로는 휴식이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일이다.

- 마크 블랙

 

 

너무 바쁜 우리

 

조슈아 벨이라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습니다. 그의 명성은 대단해서 공연하면 좌석 하나에 11만 원이나 하는 티켓이 금세 매진될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아침 러시아워 시간에 워싱턴 DC의 어느 지하철 역사에서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버스킹을 했습니다. 40억짜리 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서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평소 듣기 힘든 어려운 곡들을 연주했습니다. 자그마치 45분 동안 말이지요. 
 
이 45분 동안 음악을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명연주를 가장 가까이에서 무료로 들을 수 있었음에도 멈춰서 듣지 않았습니다. 바쁜 출근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음악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쁘다 바빠’를 외치는 우리입니다. 바쁜 직장인만이 아니라 공부하는 청소년들까지 모두 예외 없이 바쁨을 호소합니다. 어쩌면 어린이들까지 ‘바쁨’ 속에서 힘들게 사는 것은 아닐까요? 
 
바쁘면 소중한 것을 들을 수도 또 볼 수도 없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여유를 갖고 작은 것의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기쁨을 간직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4,11)

 

낮추면 길이 보인다. 교만을 씻어주는 주님의 참된 겸손이다. 낮추는 사랑이 깊어지는 참사랑이다. 낮추는 마음에 배신은 없다. 모든 아픔은 높아짐에서 비롯되는 관계의 분열과 파국(破局)이다. 끝까지 낮추면 모든 관계는 조용하다. 

우리 모두는 끝내 낮아질 수밖에 없는 낮아짐의 자녀들이다. 낮추고 낮아져야 주님과 함께 갈 수 있다.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복음의 이야기는 낮추는 삶의 모든 이야기이다. 마음을 낮추면 소중한 것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낮추면 하느님을 알게된다. 낮추고 낮아지는 삶의 신비이다. 하느님께서 온전히 낮아지심으로 높아진 우리를 새롭게 치유하신다. 아름다운 단풍이 낮아지신 주님 발아래 떨어져내린다. 

아름다운 삶이란 낮추는 삶이며 주님께 내려오는 삶이다. 그래서 구원은 낮추고 또 낮아지신 예수님을 만나고 닮아가는 삶이다. 낮추면 다시 열리는 삶의 선물이다. 겸손된 마음으로 삶의 여정을 다시 걸어간다. 우리의 자리를 아는 것이 참된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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