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1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모든 성인 대축일 -
2021년 11월 1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별도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기리는 날입니다.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된 이 축일은 609년 보니파시오 4세 교황 때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지내게 되었습니다. 5월 13일에 지내던 이 축일을 9세기 중엽 11월 1일로 변경했습니다. 교회는 이날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뒤의 새로운 삶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또한 지상의 우리와 천국의 모든 성인 사이의 연대성도 깨우쳐 줍니다.
✠ 오늘 제1독서
요한은 큰 환난을 겪어 내고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한 큰 무리를 봅니다.
✠ 오늘 제2독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오르시어 제자들에게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십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묵시 7장 2-4절 9-14절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나 요한은
2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4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11
그러자 모든 천사가 어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 둘레에 서 있다가, 어좌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말하였습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13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화답송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제2독서
1요한 3장 1-3절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복음
마태 5장 1-12ㄴ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듣는 이에 따라 울림이 다른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성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산 이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욕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한 이들입니다. 우리도 성인들처럼 살아가기로 굳게 다짐하며 성인들의 전구를 청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홀로 거룩하시고 놀라우신 하느님, 모든 성인과 함께 하느님을 경배하며 은총을 간청하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거룩하게 되어 현세의 나그네 식탁에서 천상 고향의 잔치로 건너가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1일 (월)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1일 (월)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왜 우리는 눈앞에 놓인 것에 전전긍긍하며 아등바등 살아갈까요?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면 즐겁고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때도, 좌절과 실패를 맛보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그때의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보니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이기에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는 것 아닐까요? 당시에는 사랑보다 아픔과 고통이 더 크게 보여 실망하고 슬퍼하였지만, 시간이 지나 사랑만이 자리한 그 흔적은 아름다움과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눈앞에 놓인 것에 전전긍긍하며 아등바등 살아갈까요? 어째서 내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사람도 없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가득한 자신만을 보며 살아갈까요? 시간이 지나면 그때 그 일들이 바로 사랑했던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할까요?
예수님께서도 행복 선언을 통해서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 갚아 주신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나약함과 어리석음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아픔을 겪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임을, 아픔보다는 사랑으로 행복해짐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위한 사랑과 희생으로, 기꺼이 그 십자가를 지고 행복해하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외로움의 순간에도, 고통과 아픔, 희생의 순간에도, 그 순간순간이 모두 사랑의 때임을,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 순간임을 느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여러분도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 성인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앞당겨 사는 행복, 그리고 성인들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저만이 아니겠지만 제게는 위선이랄까 이중성이 있습니다. 칭찬을 받고 싶어 하지만 막상 누가 칭찬을 하면 그것이 어색합니다. 상을 받고 싶어 하지만 막상 상을 주겠다고 하면 그것을 거부합니다.
제가 칭찬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욕 먹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고 제가 상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벌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니까 저는 욕이나 벌보다는 칭찬이나 상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칭찬이나 상을 쫓는 사람이고는 싶지 않은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육적인 사람 그러니까 성령에 이끌리지 않고 육의 영에 이끌리는 사람이란 하늘의 상을 받기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과 상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실상, 육의 영은 영의 내적인 신앙심과 성덕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이와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이 혹독한 단련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고 수치당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쉽게 얘기하면 육의 영은 이 세상에서 칭찬과 환대와 상받기를 원하는 데 비해 주님의 영은 이 세상에서 박해와 천대와 모욕과 멸시와 수치를 당하길 원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육의 영에 이끌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받을 상을 다 받았기에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상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진복 팔단의 끝에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큰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제 생각에 오늘 축일을 지내는 모든 성인이 바로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큰 상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가 몇 번 말씀드렸듯이 진복 팔단의 구조를 보면 1단과 8단은 현재형이고 그래서 여기서는 현재적 행복을 얘기하고, 2단에서 7단까지는 미래형이고 그래서 여기서는 미래적 행복을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영에 이끌리고 영 안에서 가난한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소유하지만 하늘나라에서 완성된다는 뜻이 있지요. 이것을 살짝 비틀면 하느님 나라는 'already but not yet' 곧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인들은 이 세상에서 온갖 고통과 시련과 수치와 모욕을 당해도 불행하지 않을 뿐더러 미래에 받게 될 상과 행복을 내다보기에 미래의 행복을 앞당겨 사는 존재들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죠?
아니 여러분도 아시겠지요?
미래의 행복을 확신하고 희망하는 사람은 미래의 행복을 앞당겨 지금부터 행복한 것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의 불행을 앞당겨 생각하며 비관하고, 영원한 불행을 앞당겨 가중하는 불행 때문에 자살하는데 성인들은 미래의 행복을 확신하고 희망하여 앞당겨 행복을 살고, 현재의 어떤 고통 중에서도 행복을 사는 사람들이기에 이것을 한편 다른 한편 본받으려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도의 지향에 따라 성인도 되고 악마도 된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일 년 동안 지켜주시고 기도해주신 저희 자신들의 주보 성인께 감사드립시다.
오늘 복음은 진복팔단입니다. 성인은 행복하신 분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행복하려면 마음이 가난해야 하고, 슬퍼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의로움에 주려야 하고, 자비로워야 하며,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평화를 이루고, 박해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단어로 통합하자면 ‘어린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
영성이란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일을 말합니다. 주님께 더욱 나아갈수록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기도’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기도가 그 사람을 더 큰 어른으로, 더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한 번은 본당에 있을 때 사목회 위원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물론 누구인지 알게 하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바꾸었습니다.) 약속도 하지 않고 와서는 신부님을 꼭 만나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화를 받고 어쩔 수 없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상담을 위해 내려갔습니다. 그 형제의 얼굴은 화가 잔뜩 나 있는 듯했습니다. 아들에게 화가 나 있었습니다. 사실 모든 것에 화가 나 있는 듯도 했습니다. 저를 찾아온 이유는 나중에 아들과 면담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재수생인데 그 착했던 아들이 어느 날부터 반항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봐도 말도 안 하고 문을 걸어 잠그기도 합니다. 언제부턴가 학원도 빠지고 방에서 게임만 합니다. 게임 하느라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문을 꽝 닫아버리길래 키보드를 부신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날은 잔소리 좀 했더니 아버지 앞에서 거울을 주먹으로 쳐서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손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성당에서 복사도 하고 착실했던 아이가 그렇게 되어서 신부님이 말씀하시면 들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있으니 말입니다.
아버지는 본당에서 열심한 신자입니다. 성경도 1년에 1번 이상은 통독하는 분이고 묵주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세상 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수억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었고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사람입니다. 그 아이의 형은 그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형도 전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일류대 의대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문제입니다. 그분은 기도하는 중에 환시와 같은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성당에 앉아있으면 예수님께서 나타나 위로도 해 주시고 미래의 이런저런 일을 알려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하면 하는 일도 잘 풀리는 기적을 많이 겪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성공한 것은 순전히 기도 덕분인데 둘째 아들을 위한 기도만은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이분의 영성이 의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형제는 자신의 세속적인 것들을 기도로 채우고 심지어 기도로 자신도 커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기도를 잘해서 가정이 이만큼이나 사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현재 상황이 안 좋아진 것도 자신이 그런 환시를 따르지 않은 벌이라고 여겼습니다.
일단 저는 아들에게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마 비싼 고시원에 넣어달라고 했는데 형 등록금 때문에 안 된다고 한 것에 화가 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 아파트를 더 큰 곳으로 옮기고 사업을 확장하느라 빚까지 져서 조금 돈이 달리는 때인데, 공부도 못하는 아들이 너무 비싼 고시원을 원하기에 안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아들이 아버지와 말을 안 하는 이유가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가난해서 라면만 먹은 적도 있고 맨밥만 먹은 적도 있으며 어머니 잠바를 입고 학교 다니고 돈이 없어서 공책도 사지 못한 경우도 많았지만,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약간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물질적으로 자녀에게 충분히 못 해 준 것 때문에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위해 하느님께 이렇게나 기도를 열심히 하고 물질적으로도 사실 남들보다 잘해준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으니 알아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선 위원장님께서 하시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내 의견을 주님께 관철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이, 그것이 비록 내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해도 다 받아들일 힘을 키우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님은 기도를 통해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집값이 오르기를 바라셨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자유뿐만 아니라 아들의 자유까지 인정해주지 않고 많은 것을 강요하셨습니다. 아들이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들의 인생에 간섭하고 계십니다. 아들이 말을 안 하겠다면 이젠 성인이 된 아들의 결정을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싶은 근본적인 이유는 형제님께 열등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열등감을 기도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도 형제님에게 이용당하는 소와 같이 됩니다. 여물 줄 테니 밭 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하느님도 자유를 빼앗기십니다. 이것을 우상숭배라 합니다.
형제님이 이렇게 된 데에는 어렸을 때 어떤 상처를 받았거나, 혹은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자존감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돈과 명예로 나의 부족한 자존감을 극복하려 합니다. 아마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으려 했지만 인정해주지 않으신 상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가족들을 이용해 낮은 나의 자존심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그러지 않습니다. 부모님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어른은 하느님 앞에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가족들의 자유도 빼앗습니다. 자녀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아버지의 뜻이 강하기에 아마 자녀들의 많은 것을 간섭하실 것입니다.
가장 큰 도둑질이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빼앗길 때 물건처럼 됩니다. 아드님은 이것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인정해주십시오. 둘째는 형처럼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기도하실 때 어린이처럼 되려고 하셔야지, 계속 하느님 앞에서 어른이어서는 안 됩니다. 당분간 나의 뜻을 하느님께 주장하기보다는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청하시고, 아드님에게도 생각할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찾아갈 자유를 주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이렇게 말씀드리니 얼굴이 좀 더 일그러지셨습니다.
“네, 다 제 탓이죠. 저는 아들이 제 말을 좀 잘 듣고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신부님을 찾아온 것인데.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더 기도해야겠네요.”
저는 마음속으로 이 형제가 기도의 지향을 바꾸기를 기도했습니다. 기도로 자신이 더 큰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모르며 기도하면 기도가 그 사람을 더 악하게 만듭니다.
세속-육신-마귀는 사춘기 때부터 급격히 증가합니다.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것들을 청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기도를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것들에서 벗어나 더 어려지기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어려질수록 하늘 나라에서는 더 큰 성인입니다. 어려질수록 하느님께서 아버지시기에 내게 없던 자존감이 넘쳐납니다. 그리고 그 자존감의 수준이 곧 나의 행복의 수준이 됩니다.
이와 상반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독일 루르 한인성당의 고정아 막달레나 자매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글의 내용입니다.
그 자매는 간호사로 독일에 와서 정착한 분입니다. 하지만 남편의 뇌세포 소멸로 인한 장애증세가 나타나면서 그 자매의 삶은 더 힘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성당도 열심히 다니고 간호사로서 돈을 벌며 남편도 잘 간호하였습니다.
이때 자식 없이 사는 옆집 할머니로부터 희망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자신이 자립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때 자신을 도와주면 남은 재산을 다 주겠다는 유언장을 변호사 앞에서 쓴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뒤 바로 풍을 맞아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자매가 일하며 남편과 옆집 할머니까지 간호하는 게 불가능하니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약속이 더 중요하다고 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의 서류를 정리하던 그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사실 쓰러지기 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조카에게 넘긴 상태였습니다. 지금 사는 집
도 조카 명의로 되어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가진 돈도 없이 이 자매를 속인 것입니다. 자매는 돈 때문이 아닌 무엇보다도 할머니에게 배신당한 것이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조카들은 할머니에게 사실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매는 며칠 동안 처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 자신 안에서 이뤄지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할머니가 불쌍하게 보였고 이젠 아무 대가 없이 더 극진히 간호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자매는 바보 소리를 들어가면서 끝까지 할머니를 돌보았습니다. 몇 년이 지나 장례를 치룬 이후에도 무덤 관리까지 자매가 다 했습니다. 자매는 때가 되면 무덤에 가서 꽃을 꽂아줍니다.
이 자매의 기도는 분명 위 형제의 기도와 달랐습니다. 한 형제는 자신이 커지기 위해 기도했고, 한 자매는 어린이처럼 작아지기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면 자매처럼 조금 슬프지만 그래도 가난하고 작아지고 순결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끔 ‘성인’(聖人)이란 말도 합니다.
이것이 선교의 방법입니다. 성인들은 기도로 자신들을 어린이처럼 만든 분들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모습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하신 분들입니다. 혹시 우리는 위 두 예 중 어떤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기도하면 성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기도한다고 다 성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더 어려지려고 기도해야 성인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요?
우연히 제가 있는 강화군의 출산 지원금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첫째 아이를 낳으면 500만 원, 둘째는 800만 원, 셋째는 1,300만 원, 넷째부터는 2,000만 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또 양육비도 지원하는데, 첫째는 1년간 매월 10만 원, 둘째는 2년간 매월 10만 원, 셋째는 3년간 매월 15만 원, 넷째 이상은 3년간 매월 20만 원 제공한다고 합니다.
전국에서 최고의 혜택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강화도에 살면서 아이들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생인구와 사망인구를 찾아보니, 사망인구가 출생인구보다 2.5배 높았습니다. 혜택이 많아도 왜 자녀를 낳지 않을까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행복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서민적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 나름의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요? 아마 ‘좋은 것을 정당하게 소유한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는 확실성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행복도 달라집니다.
지금 막 태어난 아기에게 돈다발을 준다면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아기에게는 엄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커다란 행복을 얻습니다. 이처럼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 무엇이 행복한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과거의 순교자들도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부귀영화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찾았기에 순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8가지 행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필두로 말씀하시는 8가지 모습은 행복보다 고단함이 더 많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 고단함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이 행복한 사람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관점이 아닌, 주님의 관점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의 요한 사도가 말씀하시듯이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었습니다. 이를 ‘지복직관’의 상태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직접 보게 되는 가장 큰 행복의 상태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내게 좋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찾고, 이를 소유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커집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
- 이기주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 않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두 동강이 났습니다. 객실은 연기로 가득 찼고, 언제 폭발할지 모르기에 생존자들은 빨리 이 비행기에서 탈출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줄까요? 아니면 패닉 상태에 빠져서 자기만 살려는 아수라장이 될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답합니다.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은 자기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 이런 사람은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오히려 남을 먼저 생각하고, 그 남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희생했습니다.
역사 안에서 ‘타이타닉호 침몰’, ‘911 테러’를 비롯한 커다란 재난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의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은 절대 악하지 않습니다. 악하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 본성을 유지하고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살아있는 모든 이의 몫입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그렇게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태 5,12)
삶의 시간은 짧다. 그러기에 소중하고 의미있다. 영원한 절망은 없다. 절망을 치유하는 실천의 삶이 있다. 모든 성인들은 진실한 실천에서 복음의 삶을 기쁘게 사셨다. 진실한 뜻은 진실한 실천으로 이어졌다. 기쁨을 실천하는 분들이었다.
성인들의 양심을 만나는 은총의 아침이다. 깨끗한 마음을 만난다. 마음이 맑아지면 세상도 맑아진다. 성인들의 삶은 과거로서만 남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기쁨을 전달한다. 저마다 고유한 삶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였다.
삶을 다르게 보게 된다. 고통을 다르게 보게 된다. 이것이 모든 성인들이 만난 새로운 기쁨이다.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낡은 생각 낡은 마음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도하였다.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삶이다. 이것이 깨어있는 일상의 삶이다.
모든 성인들이 실천한 사랑의 길 위에 우리가 있다. 오로지 사랑의 실천이 진정한 행복이며 참된 기쁨임을 보여주고 있다.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에서 자유를 체험한 모든 성인들의 삶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길 기도드린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년 11월 4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04 |
---|---|
21년 11월 3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03 |
21년 11월 2일 (화) 첫째 위령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1.02 |
21년 10월 31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0.31 |
21년 10월 30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0.30 |
21년 10월 29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0.29 |
21년 10월 2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0.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