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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2일 (화) 첫째 위령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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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일
위령의 날
첫째 위령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위령의 날 -

 

 

2021년 11월 2일 (화) 첫째 위령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첫째 미사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습니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욥은 구원자께서 살아 계시고 그분께서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오르시어 제자들에게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십니다.

 

 

천주교 위령의 날 온라인 첫째 위령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1월 2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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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욥기 19장 1절, 23-27ㄴ절

 

홀로 거룩하시고 놀라우신 하느님,
모든 성인과 함께
하느님을 경배하며 은총을 간청하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거룩하게 되어
현세의 나그네 식탁에서
천상 고향의 잔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욥이 말을 받았다.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치로 건너가게 하소서.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자비를 베푸시어 응답하소서.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로마 5장 5-11절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5장 1-12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세상을 떠난 주님의 종들을 위하여 파스카의 신비를 거행하고 비오니 그들을 빛과 평화의 나라로 이끌어 주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2일 (화) 첫째 위령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2일 (화) 첫째 위령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누군가의 그리움이 되고 싶습니다.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에서 ‘과거의 오늘’이라고 하여 몇 년 전에 찍었던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웃는 얼굴들 사이에서 갑자기 하느님의 곁으로 가신 분이 보였습니다. 함께 만날 수도,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도 없는 지금이 왠지 미안해졌습니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내 이야기만 하였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외면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감사했습니다. 그런 저를 사제로, 동료로, 동행자로, 그리고 친구로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감사함에 그분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가난했던 마음을, 그의 슬픔과 아픔을, 그의 부드럽고 따뜻했던 마음을, 그의 간절했던 호소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를 위하여 많은 것을 내어놓고 희생하였지만, 그래서 나보다 더 눈물 흘리고 아파하였지만, 그럼에도 행복해하였음을 깨닫고 감사해하며 미안해하는 것이 그리움입니다. 저는 지금 그 사람이 너무 그립습니다. 

그런 그리움을 더욱 많이 떠올리고 싶습니다. 나의 삶에서, 나의 지난 시간 속에서 그 그리운 모습들을 추억합니다. 

또한 오늘 누군가의 그리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그들보다 더 아파하고 힘들더라도, 그들이 나를 외면하고 멀리하여도 그들에게 그리움이 되어 주고자 더욱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들의 그리움이 될 수 있어 지금 행복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어코 뵈오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욥기 19,26-27)

어제 모든 성인의 날 성인이란 미래의 행복 그 중에서도 

하늘나라의 행복을 앞당겨 산 분들이라고 말씀 드렸고, 이 세상의 온갖 고통, 현재의 많은 고통 가운데서도 하늘나라의 상과 행복을 내다보며 앞당겨 행복한 분들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성인의 날에 이어 위령의 날을 지내는 이유는 돌아가신 분 중에 성인 곧 천국의 행복에 들어간 분들도 있지만 아직 들어가지 못한 분들이 있기 때문인데 아직 천국의 행복에 들어가지 못한 분들은 왜 아직 천국의 행복에 들지 못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직입니다. 

제 생각에 오늘 욥에 비춰 보면 관상 능력과 관상 의지의 부족 때문에 아직입니다. 

우선 관상 능력의 부족을 보겠습니다. 우리의 경우 욥처럼 큰 고통을 겪게 되면 고통에 함몰되어 고통밖에 보이지 않아 하느님 관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욥처럼 신앙이 있고 관상 능력을 지니게 되면 원망을 하건 질문을 하건 하느님께로 눈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 눈을 향하고 원망을 하고 질문을 해도 하느님께서 금새 당신을 나타내보이시고 응답하는 것은 아니지요. 

보통의 우리 경우, 하느님 부재 체험을 오랫동안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서 계시기는 한 것인지, 계시더라도 나와 함게 계시고 나의 고통을 굽어보시는지 의심을 하고, 의심을 넘어 하느님을 부정하거나 자기 인생에 대해 절망케도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거치며 우리도 욥처럼 기어코 하느님을 뵙고야 말겠다는, 이 세상에서 못 보면 죽어서라도 뵙고야 말겠다는 관상 의지가 있어야지요. 

제 생각에 성인과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고통과 죽음 안에서도 하느님을 관상하고, 고통과 죽음 넘어서 하느님을 관상하는 성인과 아직 그런 능력이 없고 의지도 없는 사람의 차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위령의 날을 지내고 위령을 달을 보내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직 이런 사람이 아닌지 성찰하면서 아울러 죽어서도 아직 하느님을 뵙지 못한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나도 정화된다.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며 기도를 드리는 오늘은 우리도 그들과 같은 운명임을 자각하고 이 세상에서부터 연옥벌을 면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배가시킵니다. 연옥의 아주 짧은 고통도 이 세상에서 받아야 할 고통을 합친 것보다 크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배워야 할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내 자신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줄 모른다면 사랑에서 오는 참다운 위로를 얻어 누릴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매여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버리라고 강요하실 수 없으십니다. ‘나’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부터 나를 버리기로 한 사람은 불완전할지라도 천국에 들어올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다른 초등학교에서 온 한 여자아이가 너무 예뻐서 청소하면서도 그 아이만 쳐다보았습니다. 용기 있는 친구가 그 여자아이와 사귀며 영화도 보고 왔다고 말할 때 그저 부럽기만 했습니다. 삼 년 동안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가면 더는 보지 못할 것 같아서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편지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만 써서 소문이 나면 안 될 것 같아서 여러 명의 여자아이에게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한 것이 창피해 죽을 지경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도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자기들끼리 정보교환을 한 모양입니다. 

‘나’는 세상 것에 집착하면서 그것을 얻어내게 하지 못하는 ‘자존심’입니다. 그냥 사람을 지옥으로 향하게 만드는 뱀입니다. 

대학에서는 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화이트데이라고 해서 선물도 하고 나름대로 답장도 기다리는 설레는 시간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남을 이어갔지만, 행복이 ‘1’이라면 나머지 ‘9’는 그 사람에 대한 서운함과 잃을 것과 같은 걱정으로 지냈습니다. 한 사람을 사귀는 행복을 느끼기는 했지만 ‘1’을 위해 ‘9’의 희생을 해야 하는 이상한 행복이었습니다. 그래도 여러 명에게 편지를 해서 한 통도 답장을 못 받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그런 고통스러운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그 집착이 사라졌을까요? 왠지 방학이 기다려졌습니다. 신학교에 머무는 삶이 전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가을을 탔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받는 고통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통은 남아 있었습니다. 집착이 바로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연옥의 고통과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집착을 완전히 끊고 죽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님도 우리 자유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끊음을 시작한 사람에게 정화의 시간을 줄 뿐입니다. 

저도 신학교의 연옥 생활을 거치며 조금씩 사제가 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런 집착이 생기지 않아 참으로 자유롭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와 이 연옥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의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도와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기도해주셨고 아버지는 믿어주셨습니다. 

제가 신학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힘든 일을 나가셔야 함에도 밤새 한숨 못 주무시고 새벽에 들어와 “네가 선택한 대로 해라.”라고 하시며 저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셨습니다. 

부모님께서 바깥세상에서 믿어주시고 기도해주시는 것이 신학교에 있는 사람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어떤 신학생들은 부모님이 걱정되어 중도에 포기하고 신학교를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힘을 주시는 분들 덕분으로 어떤 신학생들은 정화의 과정이 빠르게 끝납니다. 이것이 연옥 영혼을 위해 우리가 기도해주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영화 ‘브루클린’(2015)도 이와 같은 내용입니다. 브루클린은 미국 이민이 유럽의 하나의 흐름이 될 당시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에일리스는 어느 못된 상점 주인 밑에서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미래도 없이 힘겹게 삽니다. 신부님은 자신이 도와줄 테니 미국으로 건너오라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언니와 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차피 그들에게 짐만 되느니 희망의 땅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합니다. 

배를 탈 때부터 미국에서 직장에 다닐 때 모두가 낯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머니와 언니가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토니라는 미국인 남자가 다가옵니다. 토니는 배관공이었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일리스가 만난 첫 아이리시가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토니 때문에 왠지 미국 땅에서 버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언니는 에일리스가 미국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자신의 병을 숨기고 동생을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에일리스가 뒤늦게 언니 무덤이라도 가보기 위해 한 달 동안 떠나가려고 합니다. 토니는 자신과 결혼하고 가라고 합니다. 에일리스는 토니를 너무 사랑했기에 둘만 몰래 결혼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이 좋습니다. 에일리스가 결혼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의 미국식 스타일에 빠져듭니다. 그 동네 금수저인 짐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타지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고향의 익숙함에 빠져버린 에일리스는 이제 짐을 좋아하며 토니의 편지도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를 배 아파하던 이들에 의해 에일리스가 미국에서 결혼하고 왔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에일리스는 다시 눈을 뜹니다. 자신이 떠나가 된 이유.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돈이 최고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동네였습니다. 에일리스는 자유의 땅으로 다시 떠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눈에 밟힙니다. 어머니는 에일리스의 마음을 알고 그녀를 놓아줍니다. 당신은 혼자 있어도 되니 행복을 찾아 떠나라고. 그리고 에일리스는 이제 미국에 정착하려는 아이리시가 아닌 토니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완전한 아메리칸이 됩니다. 

천국에 정착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천국에 살고 싶다가도 이 세상의 집착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갈팡질팡합니다. 이것이 지옥의 고통과 별반 다름없는 연옥의 고통입니다. 이때 에일리스에게 힘을 준 이들은 언니와 어머니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아이리시 에일리스가 완전한 아메리칸 에일리스가 되게 해 줍니다. 천국으로 떠나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완전한 행복을 주기 위한 이 세상에서의 기도와 희생은 분명 헛되지 않고 함께 천국으로 향하는 참사랑의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아직 이 세상의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여 지옥의 고통과 버금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합시다.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는 것이 이미 내가 연옥의 정화과정을 통과하는 길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자아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연옥의 과정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아마 기억되는 ‘죽은 이’가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특히 기억되는 분이 계시지요. 부모님이십니다. 작년에 어머니, 올해 아버지께서 하느님 나라에 가셨기에 더 많이 기억이 납니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위령의 날에 기억해야 할 분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연세가 많으셨으니 당연히 이런 날이 올 것이 분명한데도, 아직도 멀었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겪어야 할 ‘죽음’이라는 순간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휴가 때, 멋진 풍경이 펼쳐진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명 관광지라서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친구와 함께 온 어떤 청년의 말이 들리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부모님 모시고 와야겠다. 여기 정말 좋다.” 
 
이 말에 친구도 “맞아. 여기 정말 좋다. 나도 부모님 모시고 와야겠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둘의 말을 듣고서 눈물이 났습니다. 저에게는 모시고 올 부모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생전에 함께 여행도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좋은 하늘 나라에 계신다고 생각은 되지만, 그래도 허전한 마음입니다. 
 
위령의 날,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면서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을 열심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도 반성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죽음’ 앞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이가 죽음 앞에 후회합니다. 자기 죽음 앞에서도 그렇고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후회합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드는 후회이겠지만, 이 후회를 줄여나가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비결을 오늘 복음에서 진복팔단에 담아서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후회를 줄여나가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살아 있는 한, 움직이는 한, 누구나 다 현역이고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다.

- 장명숙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동창 신부가 수술을 받았습니다. 인대 접합 수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위가 참 재미있습니다. 글쎄 손가락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인대가 끊어졌냐고 물으니, 손을 털다가 인대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너무 어이없었다면서, 이제는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으니 무조건 조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동창 신부의 말을 듣다가 저 역시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맨 위의 계단에서부터 맨 아래 계단까지 엉덩이로만 내려왔던 며칠 전의 기억이 났습니다. 미끄럼 타듯이 위의 계단에서 맨 아래까지 엉덩방아를 찧은 것입니다. 그런데 엉덩이 살이 많아서인지 처음에만 아팠지, 별 이상이 없었습니다. 
 
미끄러지면서 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동창 신부의 말을 들으니 엄청나게 운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넘어지고서도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요. 정말로 감사할 일이 아닌가요?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감사할 일을 찾으면서 오늘도 기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마태 5,4)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다시 만나는 기억의 신비이다. 잡으려고 애쓰지만 그 어떤 것도 잡을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그러기에 구원을 갈망하는 우리들 인격이다. 인격은 사랑을 지향한다. 

하느님 사랑이 생명의 창조이며 인격의 죽음이며 부활이다. 우리에게는 인격을 살리시는 하느님이 계신다. 죽음을 위로하시고 따뜻이 안아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예외없는 죽음은 우리존재의 적나라한 본모습이다. 하느님 아니시면 어찌할 수 없는 가난한 실존이다. 

삶을 부정하는 것은 죽음또한 부정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우리모두가 하느님께로 돌아 가야 할 생명의 질서이다. 생명은 하느님의 고유한 영역이다. 사랑을 느끼는 사랑의 시간이 생명이다. 생명은 십자가를 통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죽음으로 십자가를 얻는 것이다. 십자가는 죽음처럼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끝까지 믿으셨다. 죽음이 있기에 구원이 있다. 기억하며 기도한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사실은 우리모두가 하느님을 향해 오늘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순서와 시간의 차이일 뿐이다.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며 다시금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지를 깨닫게되는 위령의 날이다. 맑고 행복한 죽음이란 끝없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다. 

지나가야 할 죽음의 여정이다. 우리를 받아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다. 다시 함께 할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억과 기도 사이에 삶과 죽음 우리의 구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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