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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1월 3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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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

 

 

2021년 11월 3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라야 하며,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1월 3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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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로마 13장 8-10절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는 이!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는 이!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는 이!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길이 이어지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는 이!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4장 25-33절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천상의 성사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주님의 힘찬 능력을 드러내시어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얻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3일 (수)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3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예수님과 함께하는 길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우리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길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니다. 때로는 그 여정이 힘들어 쓰러지고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 우뚝 섭니다. 너무 힘이 들 때는 잠시 길에서 벗어나 쉬어 가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목표가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처음 가졌던 확실한 목표가 보이지 않고, 곧게 뻗어 있는 것만 같았던 길은 구불구불한 오르막입니다. 갈림길이 나오면, 후회할지 모를 선택을 해야만 하기도 합니다. 

많은 군중 또한 길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목표를 바라보며 그분을 따라온 것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다. 가족을 미워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힘겹고 견디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입니다. 설레고 감동받았던 처음의 마음은 의심과 불신으로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희망의 길이었던 그 여정이, 이제 두려움과 아픔의 여정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계속 걸어가야 할지, 아니면 다른 이들이 걸어가는 좀 더 편해 보이는 길을 가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잠시 쉬라고 하십니다. 갈림길 앞에서 “먼저 앉아서” 우리가 걸어온 그 여정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여정 안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예수님께 집중하였는지, 혹시 다른 것에 눈을 돌리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그런 나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함께 들어 주셨는지, 그리고 내 욕심을 채우고자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그런 고민들은 보이지 않던 희망을 점차 뚜렷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길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각오 없이 기대만 하는?

 

오늘 주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많은 사람이 뒤를 따릅니다. 그렇게 따르는 사람들을 보시고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것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니 주님께서 '너희들이 이렇게 많이 따라오는데 뭣하러 이렇게 따라오느냐? 아무나 제자가 될 수 있고, 아무나 따라올 수 있는 줄 아느냐?'고 겁 주고 경고하는 것 같이 들리는데 그런 건가요? 

물론 그런 뜻이 아니겠지요. 당신 추종을 거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자 하면 그만큼 각오를 하라는 뜻이겠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들리는 것은 주님께서 겁을 주셔서 그런 것이기보다 제가 겁을 먹기 때문일 것입니다. 

갈수록 저는 주님 앞이나 옆에 있는 것이 좋고 주님 품 안에 있는 것이 좋지 주님을 따르는 것은 겁이 납니다. 

그런데 주님 품 안에 있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것, 그거 같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둘 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 품 안에 있는 것은 평안이나 안식의 느낌이지만 주님을 따르는 것은 오늘 주님 말씀대로 가족과 자기 생명까지 미워해야 하고, 달리 얘기하면 가진 것 다 팔고, 자기마저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처절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무리 겁나고 피하고 싶어도 하느님 품에 안기려면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주님께서 가시는 길은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길인데, 위령 성월에 맞게 이것을 더 풀어 얘기하면 주님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길은 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 죽음의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이지요. 

그러므로 탑을 세우기 전에 그리고 전투를 벌이기 전에 가만히 앉아서 계산하고 헤아려 보라는 오늘 주님 말씀을 우리는 잘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는 무턱대고 출발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헤아려 보라'는 얼마나 힘든 것인지 미리 가늠하라는 말씀이지요. 

제가 거듭 얘기하는 바이지만 우리는 각오를 해야지 기대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기대하기 전에 각오를 해야 합니다. 

기대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겪어야 할 것을 각오해야 하는 거지요. 각오 없이 기대만 하는 모순된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변하려면 내 안에서 나를 미워할 용기를 주는 대상을 찾으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부모와 형제,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소유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소유한다는 말 자체가 상대를 물건 취급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나의 생존을 위함입니다. 결국, 나에게 먹혀 피를 흘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미워한다.’라는 말은 ‘소유하지 않는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버려야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그리고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소유하지 않고 흘려버린다는 무슨 뜻일까요? 매일 자신을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내 안에 나를 다시 살릴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날 수 없으면 매일 입는 상처 때문에 점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 

여러 극단적인 상담 사례를 담은 『벼랑 끝, 상담』에서 ‘명상최면치료’로 정상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환자들을 치료한 사례들이 나옵니다. 오늘은 두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정상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살펴보고 그 방법이 오늘 복음과 일치하는지도 알아보겠습니다. 

‘아빠의 성추행으로 인한 불안증과 남자혐오’라는 사례는 짐승 같은 아버지를 둔 딸의 치료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불안증에 시달리는 딸을 데리고 상담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딸 뒤에서 머리에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딸이 머리가 돌았다는 동작을 했습니다. 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원장은 어머니를 나무랐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딸을 미쳤다고 보고 있는 어머니에게 분노가 치솟은 것입니다. 
원장의 추궁에 아버지도 딸에게 지금까지 해 온 짓들을 인정하고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문제는 이 트라우마로 인한 증상, 곧 샤워를 두 시간을 하며 살갗이 벗겨지도록 몸을 닦는 강박증과 지하철에서 남자의 몸이 스치는 것조차 극도로 두려워하는 남성 혐오증상을 해결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자신의 처지를 안다고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변화될 힘을 외부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최고야 원장은 이것을 ‘명상최면치료’라는 것으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환자의 경우 명상최면의 상태로 몰입하게 하여 추행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나’를 들여보내 그녀에게서 아빠를 떼어내고 상처 입은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주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과거의 나를 놓아주고 새로운 나로 성장할 수 있게 해 주어야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상처는 ‘나’에 새겨지기 때문에 ‘나’가 버려지지 않으면 그 나는 그 상처에 매몰됩니다. 

두 시간 샤워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나’를 명상최면으로 들여보내 샤워하고 있는 자신을 위로해주고 안아주고 용기를 주며 데리고 나옵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한 구원자입니다. 이것은 이전의 나를 ‘또 다른 나’로 변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이전의 나로부터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치료과정을 계속 한 내담자는 이제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결혼까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다음 사례는 ‘공황장애로 밖을 나가지 못하는 남편’입니다. 갑자기 잘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두문불출하는 남편 때문에 아내가 대신 찾아온 것입니다. 

최 원장은 간신히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실로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원인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명상최면으로 과거로 내려갔더니 아버지와 즐겁게 미꾸라지를 잡던 일을 가장 먼저 기억했습니다.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던 아버지는 중학교 1학년 때 아들이 보는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 남자에게도 아들이 태어나자 자신도 아버지처럼 죽을 수 있다는 불안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에 대한 감정도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는 없었습니다.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아빠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남자에게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떼어놓는 가장 두려운 사건이었습니다. 

최 원장은 명상치료를 통해 아버지를 소환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천국에 가시면서 아들에게 항상 함께 있어 주겠고 아빠는 좋은 곳으로 가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 준 것입니다. 내담자는 이 명상을 하며 눈물을 흘리며 아빠를 보내주었습니다. 아빠 말을 믿었고, 결국엔 치료에 성공하여 다시 취직하고 아들도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명상최면치료’의 방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자신이 트라우마를 자신의 힘으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어 극복하게 해 줄 누군가를 명상 안으로 넣어서 새로운 믿음을 가지게 하는 방식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니면 믿지 않습니다. 

두 번째 사례에서는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해 줄 대상이 아버지입니다. 내담자는 아버지를 가장 사랑했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은 믿음을 줄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례에서는 아버지도 엄마도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고 자신에게 무관심했기에 결국 자기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 곧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들여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또 다른 자기 자신은 지금의 자신과는 상당히 다른 자신 있는 대상입니다.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는 대상은 지금의 나가 될 수 없습니다. 태어나려면 부모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사랑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 한 대상만 있으면 나는 상처받은 이전의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창조자이시고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힘이십니다. 매일 잠들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상처받은 나를 안아주시는 생각을 하며 ‘괜찮아. 내일은 새로운 너로 살면 돼!’라는 명상을 한다면 분명 어제 일 때문에 이불을 차며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탈피하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살을 계속 치유하고 재생하느니 차라리 벗겨버리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끊임없이 상처를 받습니다. 상처받는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매번 그것을 찾아서 치유하며 살아가기 힘이 듭니다. 그러면 이전의 나를 벗어버리는 게 상책입니다. 이것이 나를 미워하는 방식입니다. 나를 미워하면 모두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흘려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나를 재생시킬 대상과 힘이 존재함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성체로 매일 내 안에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나를 생겨나게 하셨기에 오늘 밤에도 나를 탈피시키고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과거의 나로부터 영향받으며 살지 맙시다. 그러면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좋은 것만 남기고 과거의 나에게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과거의 내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길뿐입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나 자신을 내 안의 그리스도에게 봉헌하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게 해 주시도록 청합시다. 우린 분명 그리스도처럼 변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과정이 ‘기도’입니다. 매일 이런 과정을 거치면 명상최면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새로 태어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함으로써 매일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아니 매일 더 그리스도가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십자가는 사랑의 무게와 같다.

 

지금 인류의 종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네안데르탈인’이라고 있었습니다. 많이 이가 네안데르탈인은 머리를 쓰지 않아서 멸종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호모 사피엔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존재였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뇌의 크기가 150% 더 컸고, 몸집도 훨씬 컸다고 합니다. 즉, 머리도 좋고 힘도 좋기에, ‘호모 사피엔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멸종되었을까요? 
 
‘네안데르탈인’은 큰 무리를 지어 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함께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믿고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언제나 함께했습니다. 대규모의 무리를 지을 수 있었고, 이 무리가 커져서 국가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함께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본성을 가지고 함께하지 못하면 그만큼 이 세상에서 살기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함께’는 인간들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하느님’과도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든 당신의 길을 따르면서 함께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정말로 힘든 길이었습니다. 사실 초기의 제자들은 영광만을 가져다주는 길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수난과 죽음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를 받아들이면서 따르자면 엄청난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계속 어려운 조건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아닐까요? 완벽한 마음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27) 
 
십계명의 제4계명에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여기서 ‘미워하다’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싫어하다’, ‘혐오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뒤로 돌리다’, ‘2차적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의 표현이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필요하다면 부모까지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 다음 자리에 남겨 놓아야 한다는 뜻이고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까요? 하느님과 함께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사랑의 무게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무게로 십자가의 무게도 늘어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비교를 멈출 때 개성이 시작된다.

- 카를 라거펠트

 

 

주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그곳에 산이 있어 오른다.” 
 
1922년 하버드대학교 초청 강연에서 영국의 산악인인 죠지 멜러니 경은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는 곧바로 위의 대답을 했습니다. 워낙 유명한 대답이었고, 저 역시 신학생 때 산악반 활동을 열심히 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냥 산이 좋은 것입니다. 산악반 활동을 할 때는 산 자체가 너무 좋아서 산행 지도만 봐도 행복했고, 등산 장비를 사면 빨리 사용해보고 싶어서 설렘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되면서 산을 조금씩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등산하는 힘듦도 있었지만, 바빠서 종일 시간을 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점점 등산에서 기쁨과 설렘을 갖기 힘들었습니다. 그만큼 산을 좋아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종종 주님께 대한 신앙에 슬럼프가 온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처음과 달리 기도와 미사를 통해 기쁨을 얻기 힘들어지고, 성당 가는 것도 설레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주님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다시 좋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시 기쁨과 설렘으로 주님을 좋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33)

 

잎을 떨구는 11월의 나무들이다. 나무들은 제 갈 곳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소유를 버리는 것이 은총이다. 순간순간 버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역할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소유를 버리게 한다. 십자가로 시작하고 십자가로 마무리한다. 

우리가 소유한 하나하나가 내 것이 아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우리들 여정이다. 주님을 내내 가리는 것은 이기적인 우리자신이다. 모든 것은 끝내 사라져버리고 남는 것은 십자가의 주님뿐이다. 

비우고 가벼워지는 자연의 순리이다. 버려야 깊고 고요해지는 우리의 영혼이다. 버려야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이다. 버려야 참으로 열리는 아름다운 신비이다. 버리지 못하는 나의 뜻과 이기적인 욕심까지 버리게하는 십자가 사이에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있다. 

주님 안에 머무르는 관계란 자기 소유를 버리는 것이다. 버리는 것이 맑게 흐르는 것이며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가 우리의 소유를 참된 사랑으로 벗겨내고 있으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주님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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